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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풍경 너머의 풍경

[나무를 찾아서] 바라보는 사람이 없으면 나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by 丹野 2011. 8. 23.

[나무를 찾아서] 바라보는 사람이 없으면 나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바늘꽃 종류인 Gaura lindheimer 의 꽃.

   [2011. 8. 22]

   부담 없는 여행 길이었습니다. 자동차를 운전하던 스무 살을 겨우 넘긴 도반이 난데없이 에마뉴엘 레비나스와 비트겐쉬타인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가만히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편안하게 앉아서 레비나스 이야기를 젊은 도반에게 듣는 건 흥미로운 일입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이 마주하는 대상의 의미는 자신의 태도와 철학에 달려있다는 타자성의 철학입니다. 레비나스 철학에 관련한 글을 읽으며 든 생각들을 털어놓는 그의 이야기가 근사했습니다.

   여행 길은 즐거울 수밖에요. 도반의 이야기에 시인 랭보가 말한 '나는 너'라는 싯귀의 의미를 보탰습니다. 또 레비나스가 겪은 유태인 수용소 생활을 비롯한 얄궂은 일생을 생각나는 대로 덧붙이며 이어진 여행 길은 즐거웠습니다. 타자성의 의미를 이야기하며 곁에 있는 사람들을 한번 더 생각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겠지요. 서로의 의미를 마음 속으로 짚어가며 이야기했을 테니까요. 의미가 부여되지 않는 상대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타자성의 철학 이야기에 이어서 제 머릿속을 맴돈 건 하릴없이 나무였습니다.

   서울 성균관대 캠퍼스 정문을 들어서면 왼쪽으로 나오는 문묘 구역의 명륜당 앞마당에 서있는 한쌍의 은행나무.

   제아무리 큰 나무라 해도 그렇습니다. 길을 막고 우뚝 서있다고 해서 그 나무가 모두에게 의미있는 건 아니겠지요. 사람이 그런 것처럼 바라보는 사람이 없으면 나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저 늘 스쳐지나는 거대한 기둥 정도라고나 할까요. 서울 종로 명륜동 성균관대 캠퍼스 안쪽에 서 있는 거대한 은행나무도 그렇지요. 크고 훌륭한 노거수이지만, 그것만으로 누구에게나 똑같은 의미와 가치를 지니는 건 아닐 겁니다.

   천연기념물인 서울 문묘 명륜당의 은행나무를 바라보고 고향을 떠올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이의 고향은 전라도 임실 오수면입니다. '오수의 개' 전설이 전하는 아름다운 마을이지요. 봄바람 타고 번져오는 들불로 죽을 수도 있는 위기에 처한 주인을 구해내고 자기는 죽음을 받아들인 충직한 개의 이야기가 살아있는 마을입니다. 개가 죽자 주인은 개의 무덤을 지어주고 그 앞에 꽂아둔 주인의 지팡이가 자라서 커다란 느티나무가 되었다는 전설입니다.

   천연기념물인 명륜당 은행나무의 늠름한 위용.

   이 오수마을에는 아직도 커다란 느티나무가 많이 있습니다. 그 마을에서 나고 자란 한 사내가 대학생이 되어 고향을 떠나 서울에 왔을 때, 가장 고향처럼 느낄 수 있었던 것은 학교 정문 바로 안에 서 있는 은행나무였습니다. 30년 쯤 전 이야기입니다. 객지 생활을 하던 그는 점심 때가 되면 도시락을 들고 은행나무를 찾았습니다. 은행나무 그늘에 들어서서 도시락을 까먹는 게 그는 좋았습니다. 잠시나마 고향의 느티나무 그늘을 떠올릴 수 있었고, 보고 싶은 어머니의 품을 느낄 수 있었던 겁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그는 은행나무 그늘을 떠나 다른 곳에 있는 직장을 다녔어요. 바쁘게 젊은 시절을 보냈지요. 그러다가 이제 중년의 나이를 넘겨 다시 은행나무가 있는 모교의 직장으로 돌아오게 됐어요. 그는 30년 전의 그 은행나무를 바라보며 고향에 돌아온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은행나무의 노란 낙엽이 소복히 쌓인 그늘을 바라보자 그는 모든 생각 내려놓고 그냥 누워버리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에게 명륜당 은행나무는 그냥 나무가 아니라, 고향이고, 어머니의 품이었지요.

   암나무였던 이 은행나무는 성균관 유생들의 바람대로 나중에 수나무로 성을 전환했다고 합니다.

   그에게 나무는 그만큼 큰 의미로 서 있지만, 나무 곁에서 젊은 시절을 보내는 모두에게 그런 것은 아닙니다. 같은 대학교를 다니거나 이미 졸업한 학생들은 해마다 몇 천 명이나 됩니다. 그 모든 학생들에게 이 은행나무가 똑같은 의미를 지닐 리 없습니다. 나무는 이 대학교의 정문에서 백 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지만, 학교를 다니는 내내 단 한번도 들러보지 않는 학생은 충분히 있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크고 아름다운 나무라 하더라도 그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람과 나무 이야기 (42) - 서울 문묘 명륜당 은행나무]

   그런 생각을 담아 명륜당의 그 사람과 그 나무 이야기를 지난 주 칼럼에 적었습니다. 이 나무는 특히 조선시대 때 최고의 유학 교육기관이었던 명륜당에서 공부하던 유생들의 바람대로 성을 전환하는 데에 성공한 특별한 나무이기도 합니다. 또 은행나무의 별난 특징 가운데 하나인 유주가 매우 크게 발달한 나무이기도 합니다. 나무에 얽힌 구체적인 사연은 칼럼에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았습니다. 편안한 시간에 살펴보세요.

   명륜당 은행나무의 줄기에서 발달한 유주. 유주는 공기 중에서 호흡하는 뿌리인 기근입니다.

   아침 저녁 바람이 선선합니다. 가을 내음이겠지요. 비만 계속 내리고, 뜨거운 여름 햇살은 그리 많이 느끼지도 못한 여름이었는데, 어김없이 가을은 찾아옵니다. 귀뚜리 소리도 훨씬 깊어졌어요. 그러고보니, 내일은 모기 입이 비뚤어진다는 처서입니다. 풍요로운 가을 잘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지난 '나무 편지'에서처럼 며칠 동안 [시가 있는 아침]에 소개한 시와 저의 감상 글들 소개합니다. 짧은 글이지만 관심과 성원 보내주시는 많은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시가 있는 아침' - 나희덕, '누가 우는가']
   ['시가 있는 아침' - 장석남, '작약']
   ['시가 있는 아침' - 박라연, '허화들의 밥상']
   ['시가 있는 아침' - 김형영, '생명의 노래']
   ['시가 있는 아침' - 박인술, '작은 풀꽃']

   "사람이 그렇듯 바라보는 사람이 없으면 나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지난 주에는 어느 방송사에서 진행하는 프리젠테이션 프로그램에 참여했습니다. 그 프로그램이 daum.net의 [TV 팟]에도 올라왔습니다. 더듬더듬 시작하다가 시간에 쫓겨 서둘러 마무리한 영상도 여기에 링크하겠습니다. '나무와 더불어 산다는 것'이라는 주제의 프리젠테이션입니다. 대나무의 신비, 화성 물푸레나무의 경이를 이야기하며 나무와 더불어 살아가는 의미를 짚어보았습니다.

   ['나무와 더불어 산다는 것' -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 영상]

   고맙습니다.

   고규홍(gohkh@solsup.com)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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