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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풍경 너머의 풍경

옥황상제가 내려보낸 아들이 몸을 바꾸어 서 있는 나무

by 丹野 2011. 7. 18.

[나무를 찾아서] 옥황상제가 내려보낸 아들이 몸을 바꾸어 서 있는 나무

   우리 산과 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노루오줌의 꽃. 사진은 에트나라는 품종의 노루오줌 꽃.

   [2011. 7. 18]

   평창에는 아름다운 강, 평창강이 그야말로 구비구비 흐릅니다. 오대산 남쪽에서 발원해서 평창읍을 지나는 아름다운 강입니다. 직선 거리는 60킬로미터인데, 실제 강의 길이는 220킬로미터나 되는 강입니다. 이 강이 얼마나 굽어 도는지 짐작할 수 있는 숫자입니다. 길은 어린 단종의 한이 맺힌 영월 청령포가 있는 영월 서강으로 이어집니다.

   돌고 도는 평창강을 따라 국도 31호선이 띄엄띄엄 이어집니다. 그 길에 우뚝 선 나무 한 그루가 있습니다. 느릅나무입니다. 긴 장마에 불어난 강물이 찰랑거리는 평창강을 따라 달리다 보면 마주치게 되는 약수리라는 작은 마을 어귀의 길가에 우뚝 선 큰 나무입니다. 속도보다는 풍경을 즐기는 길이었다면 당연히 훤히 뚫린 국도를 우뚝 막아 선 이 느릅나무 앞에서 멈춰 서게 됩니다.

   장맛비로 불어난 평창강 물가에 홀로 우뚝 서 있는 평창 약수리 느릅나무.

   느릅나무는 북유럽 신화에서 최초로 사람을 만들어낸 나무입니다. 신들의 세상에 부정과 죄가 쌓여 늑대가 태양을 삼키고 또다른 늑대가 달을 삼켜 버리며, 별들도 하늘에서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이어서, 대지와 모든 산들이 흔들리고 무너지며 나무는 뿌리째 뽑혀 화평했던 신들의 세상은 끔찍한 폐허를 맞이하게 됩니다. 신들도 모두 사라지지요.

   끝까지 살아남은 건 나무 한 그루였습니다. 그때까지 하늘을 떠받치고 서 있던 거대한 물푸레나무 '위그드라실'이 그 나무입니다. 다행히 목숨을 건진 신들의 신 오딘은 불에 타 스러져 폐허가 된 대지를 편력하고 돌아와서 드디어 최초의 인류를 만들어냅니다. 오딘은 나무 밑동에서 인류의 씨앗을 찾아내 숨결을 불어넣어 사람을 창조합니다.

   굵은 줄기 표면에 굴곡이 그가 살아온 세월만큼 깊다.

   오딘은 물푸레나무 밑동으로 남자를, 그 곁의 느릅나무 밑동으로 여자를 만들었습니다. 남자는 물푸레나무의 영문 이름인 Ash tree 를 이용해서 '아스크르 Askr'라 하고, 여자는 느릅나무의 영문 이름인 Elm 을 이용해 '엠블라 Embla'라고 했습니다. 북유럽 신화는 이렇게 인류 탄생의 신화를 이야기합니다. 나무에서 사람이 태어났다는 신화는 북유럽 뿐 아니라, 중국을 비롯해 인도 유럽어를 쓰는 민족들 사이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느릅나무를 보면 어쩌는 수 없이 여성성을 떠올릴 수밖에 없습니다. 문득 그 세세한 내용까지는 기억나지 않는 유진 오닐의 희곡 '느릅나무 아래의 욕망'이라는 작품이 떠오른 것도 그래서일 겁니다. 작품 안에 배경으로 등장하는 거대한 느릅나무 한 쌍은 분명 여성성. 음산한 모성 혹은 본능적 애정의 상징으로 배치돼 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하늘로 솟구친 느릅나무 줄기 위에 얹힌 푸른 이끼가 유난히 푸르다.

   야릇한 것은 아무리 느릅나무를 들여다봐도, 여성적 이미지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인류 최초의 여인 엘브라의 신화가 만들어지던 때의 사람들이 가졌던 여성에 대한 생각과 지금 우리의 생각이 다른 때문이겠지만, 도무지 실마리가 찾아지지 않습니다. 신들의 세계조차 폐허가 될 만큼 험난한 세월을 거치고도 오딘 앞에 살아 남았던 나무라는 이유 외에는 다른 이유를 못 찾겠습니다.

   지금 바라보고 있는 평창 약수리 느릅나무에서만 그런 건 아닙니다. 느릅나무 가운데에는 비교적 큰 나무인 횡성 둔내면 느릅나무는 더 그렇습니다. 제대로 난 길도 없는 영월의 깊은 산 속 금마리에서 찾아본 느릅나무도 마찬가지입니다. 볼 때마다 왜 이 나무에서 여성성을 떠올렸을까를 생각했지만 그 이유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북유럽 문화권에서 여성성의 상징으로 여겨온 느릅나무의 줄기 껍질.

   느릅나무 가운데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나무가 한 그루 있습니다. 삼척 하장면 갈전리의 느릅나무가 1982년에 제272호로 지정돼 현재까지 보호돼 왔지요. 4백 년 쯤 전에 갈전남씨의 시조가 심고 당산제를 올리는 마을 당산나무라고는 하지만, 이 나무는 사실 처음 지정할 당시의 위용을 많이 잃었습니다. 지금은 다른 곳의 느릅나무에 훨씬 못 미치는 상태인 게 사실입니다.

   그러고 보니, 평창 약수리 느릅나무는 나이에서나 규모에서 나라 안에서는 최고로 손꼽을 수 있는 느릅나무임에 틀림없습니다. 현재 산림청 보호수로 지정돼 있는약수리 느릅나무는 키가 25미터나 되니, 천연기념물인 갈전리 느릅나무보다 훨씬 큰 셈입니다. 갈전리 느릅나무의 키를 문화재청 자료에서는 키가 20미터라고 했지만, 그건 아마 처음 조사 때의 크기일테고, 지금은 그에 훨씬 못 미치는 크기이거든요.

   바로 곁으로 지나는 도로 때문인지, 도로 안쪽으로는 넓게 펼치지 않았지만, 도로 방향으로는 넓게 펼쳤다.

   게다가 약수리 느릅나무는 나이에서도 가장 오래된 나무이지 싶습니다. 산림청 자료에는 이 나무를 1982년 지정 당시에 455살이라고 했으니, 지금은 480살을 넘긴 셈입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7백 살은 훨씬 더 된 나무라고 입을 모아 이야기합니다. 가슴높이 줄기둘레가 약수리 느릅나무보다 더 큰 나무가 있긴 합니다만, 전체적으로 느릅나무 가운데에는 규모나 나이가 모두 가장 크다 해도 틀리지 않을 겁니다.

   약수리 느릅나무 바로 앞에는 '느티나무 가든'이라는 식당이 있습니다. 나무를 만나던 날, 이 식당 주인 내외를 찾아뵈었지요. 그 분들은 처음에 이 나무를 그냥 느티나무로 알고 식당 이름을 '느티나무 가든'이라고 했답니다. 나중에 군청 사람들이 알려줘서 알긴 했지만, 이 자리에서 태어나 자란 식당 주인은 어릴 때부터 마을의 모든 어른이 느티나무라고 불렀다고 이야기하십니다.

   다른 가로수 없이 홀로 우뚝 서 있어서 지나는 길에도 저절로 눈길을 주게 되는 약수리 느릅나무.

   나무 이름이 잘못 된 걸 뒤늦게 알게야 됐지만, 그렇다고 굳이 식당 이름을 고칠 생각은 없다며 허허 웃으십니다.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 정확히 하는 게 좋기야 하겠지만, 어쩌면 이 마을 사람들이 오랫동안 느티나무로 불러왔다는 세월의 흔적을 살펴 볼 수 있어서 오히려 제격이지 싶기도 합니다. 나무 이름 하나를 정확히 가르치는 것 못지않게 사람과 더불어 살아온 나무의 자취를 살펴보는 것도 중요할테니까요.

   이 나무에는 몇 가지 전설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옥황상제가 내려보낸 세 아들 가운데 하나라는 겁니다. 세 아들 모두가 느릅나무로 살아남았는데, 그 중의 한 그루는 오래 전에 죽어 자취도 없이 사라졌답니다. 다른 한 그루는 마을 안쪽의 들판 가운데에 이 느릅나무를 마주하고 서 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옥황상제가 아들을 이 땅에 보낼 때, 세 아들이 모두 잘 살면 마을이 잘 될 거라 했다는데, 한 그루가 죽는 바람에 아쉽다고 합니다.

   초여름에 붉은 빛으로 피어나는 노루오줌 꽃.

   오랫동안 사람 곁에서 사람과 더불어 살아온 나무이다 보니, 약수리 느릅나무에는 전설이 여러 가지 전합니다. 그의 연륜을 보여주는 증거겠지요. 또 하나의 전설은 단오 때에 이 나무에 그네를 띄우고 놀면 마을이 평화로워진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십 여 년 전까지만 해도 이 나무에 그네를 띄웠다고 합니다. 요즘은 그네를 놀 사람도 많지 않고, 또 나무 바로 옆으로 국도가 뚫리는 바람에 그네를 띄우기에 그 자리가 위험해 보이기도 합니다.

   평창 약수리 느릅나무 이야기가 바로 이번 나무 칼럼이었습니다.
   [칼럼 다시 보기]

   긴 장마 지나고, 태풍 소식입니다. 우리 땅으로 올라오지는 않는다지만 다시 또 비가 쏟아질 듯하다는 예보입니다. 태풍 지나면 무더위랍니다. 건강에 더 신경써야 할 때입니다. 모두 건강하시기 바라며 마무리합니다. 고맙습니다.

   고규홍(gohkh@solsup.com)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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