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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풍경 너머의 풍경

천년 은행나무 앞에서 살아오는 가죽나무의 푸른 추억

by 丹野 2011. 5. 24.

[나무를 찾아서] 천년 은행나무 앞에서 살아오는 가죽나무의 푸른 추억

   1천 2백 년을 한결같이 살아온 은행나무에서 새로 돋아나는 여린 잎.

   [2011. 5. 23]

   아침이면 아무렇지도 않은 도시 아파트 숲의 길을 걸어서 작업실을 찾아옵니다. 그 길에 가죽나무 가로수가 있었어요. 그런데 얼마 전의 어느 날, 줄 지어 선 모든 가죽나무의 밑동이 사정없이 동강났습니다. 참혹했습니다. 도로의 한쪽 차로를 막고 인부들이 전기 톱의 굉음을 몰고 다니며, 차례대로 나무를 잘라냈습니다. 가슴이 아팠습니다. 이유는 듣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나무도 살아있는 생명체라는 걸 생각하길 바라는 게 지나친 욕심인가 봅니다.

   사람에 의해 생명이 절단 당한 커다란 가죽나무들에 대한 아픔을 채 삭이기도 전인 며칠 뒤, 가죽나무가 서 있던 자리에는 새 나무들이 앙상하게 자리잡았습니다. 길 옆 담장에는 "태풍에 잘 견디고 꽃이 아름다운 이팝나무로 가로수 교체작업을 마무리했습니다."라는 현수막이 붙었습니다. 한 글자 한 글자가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아픈 가슴을 저며냅니다. 또 가슴이 아픕니다. 사람을 위해 이 자리에 와서 말 없이 살다가 그 사람들에 의해 처참하게 잘려나간 가죽나무를 나는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겁니다.

   세월에 찢기고 뜯긴 상처를 붙안고 하늘로 솟아오른 영월 하송리 은행나무 줄기.

   옛날에 우리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사람살이의 상징으로 나무를 심고 키우며 사람처럼 아꼈어요. 때로는 조상처럼 모셨고, 또 사람살이를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받들기도 했지요. 1천2백 여 년 전, 강원도 영월 땅에는 중국 당나라에서 당시 임금이었던 현종이 새로 지은 악장(樂章)을 주변에 널리 알리기 위해 '파락사(波樂使)'라는 신분으로 신라에 들어왔던 분이 있었어요. 임무를 마치고 돌아가려 할 때,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서 그는 지금의 강원도 영월 지역인 내성군(奈城郡)에 머물렀습니다.

   아예 영월 땅에 눌러 살기로 한 그는 마침내 새 성씨(姓氏)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성씨가 영월엄씨입니다. 그러니까, 당나라에서 온 엄임의(嚴林義)라는 파락사가 바로 영월엄씨의 시조인 거죠. 그는 고려 때에 내성군(奈城君)에 올려졌고, 그의 후손들은 영월 땅에 보금자리를 틀고 살았습니다. 위쪽에 소나무가 우거진 솔숲이 있는 마을이어서, 소나무 아랫 마을, 하송리(下松里)라는 이름을 붙인 곳이지요.

   하송리 은행나무 앞에 영월엄씨 후손들이 세운 기념비.

   지금은 적지않은 변화가 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영월엄씨들의 집성촌이었던 영월읍 하송리에는 시조인 엄임의 어른이 심은 은행나무 한 그루가 남아 있습니다. 나무 앞에는 영월엄씨 시조인 내성군 어른이 손수 심은 나무라는 돌 비석까지 세워두었지요. 안록산의 난이 일어난 게 서기 755년부터 763년 사이이니 이 은행나무는 1천2백 년을 넘게 살아온 셈입니다.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가 신라가 망한 서기 935년 즈음에 심은 나무이니, 그보다 적어도 180살 쯤은 더 된 나무입니다.

   150여 년 전인 조선후기에 활동한 문인 신범(辛汎, 1823∼1879)도 이 은행나무를 찾아보고 그의 시(詩)에서 "中有千年杏", 즉 '마을 한가운데의 천년 된 은행나무'라고 이 나무의 위용을 표현했습니다. 그때에도 이 은행나무가 이미 천년을 넘은 나무라는 걸 모두가 알았다는 증거겠죠. 긴 세월 동안 사람들은 한 그루의 나무를 지키기 위해 무진 애를 썼을 겁니다. 엄씨 마을의 상징이자 조상의 얼이 깃든 나무이니 당연한 노릇이겠지요.

   나무 주위의 마을 풍경은 몰라보게 달라졌지만, 융융한 자태를 잃지 않고 서 있는 천년 은행나무.

   나무는 마을의 수호목이자 정자나무로, 마을 사람들의 쉼터 노릇을 했지만, 요즘은 나무를 보호하려고 주위에 울타리를 둘러친 탓에 나무 가까이에 다가서기는 어렵습니다. 이제는 쉼터로서보다는 바라보기 위한 나무입니다. 게다가 마을 풍경이 달라지면서, 이제는 마을의 수호목으로서의 의미도 조금은 퇴색했지 싶어 보입니다. 그러나 바라보기 위한 나무로서의 의미는 여전합니다. 나무를 구경하러 찾아오는 사람들이 무척 많은 나무지요. 영월 지역을 찾는 관광객들은 코스 안에 천년 은행나무를 집어넣고, 버스를 타고 찾아오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합니다.

   이 은행나무 안에도 오래된 나무에 흔히 전하는 전설처럼 신통력을 가진 늙은 뱀이 살고 있다고 합니다. 워낙 기가 센 뱀이어서 근처에 다른 동물이 접근하지 못한다는 거죠. 하지만 사람살이만큼은 더 풍요롭고 평화롭게 지켜주는 매우 고마운 뱀이고 나무입니다. 일테면 어린 아이들이 나무에 기어오르다 떨어져도 다치지 않을 뿐 아니라, 이 나무에 기도를 올리면, 아들을 낳을 수도 있다는 전설이 오랫동안 전해왔습니다.

   나무 앞에는 오랫동안 당산제를 지낼 때에 제물을 올릴 자리로 놓은 소박한 제단.

   살가운 전설을 가진 하송리 은행나무도 긴 세월 동안 많은 변화를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지금은 흔적도 찾을 수 없지만, 나무 앞에는 대정사라는 절집이 있었다고 해요. 어떤 연유로인지는 몰라도 절집은 얼마 뒤 사라졌고, 그 자리에는 옹기종기 낮은 지붕의 작은 집들이 모여 들었어요. 나무가 있는 자리는 도로의 막다른 곳 한가운데였고, 그 곳에서 시작되는 마을은 좁다란 골목길로 이어져 있었지요. 그런데 최근에 그 작은 집들이 모두 사라지고, 큰 길이 났습니다.

   주변에 대형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때문이었지요. 나무를 처음 찾아간 게 아닌데도 나무를 단박에 찾지 못한 건 길눈이 어두운 탓도 있지만, 몰라볼 정도로 달라진 주변 환경 때문이었습니다. 나무 바로 앞의 점방 하나만 옛 모습 그대로이고, 주변 풍경은 죄다 달라졌어요. 여러 변화에도 불구하고 한 그루의 나무는 변함없이 제 자리를 잘 지키고 서 있습니다.

   여느 은행나무처럼 아름다웠을 예전의 자태와는 또다른 장엄미를 드러낸 하송리 은행나무.

   당황하며 나무에 이르렀을 때에는 마을 노파 두 분이 나무 아래에 쪼그리고 앉아 도시락 점심을 나눠 드시고 있었습니다. 두 노파는 나무 주변을 정돈하기 위해 군청에서 할당한 일거리를 맡아서 이른 아침부터 풀 뽑기를 하던 중이었어요. 일년 중 일곱 달 정도 동안 두 분이 맡아서 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노파들 곁에 함께 쭈그리고 앉아, 요즘 이 나무가 어찌 살아가는 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졸랐습니다.

   느릿한 점심 식사가 끝날 때까지 턱을 받쳐들고 노파들의 입가에 눈을 맞추었으나 특별히 예전에 비해 달라진 이야기는 없습니다. 여전히 당산제를 지내고, 또 많은 사람들이 나무를 보러 찾아온다는 정도 뿐이었습니다. 특별한 이야기가 없어도, 또 세상살이가 끊임없이 바뀌어도 여전히 마을 모두에게 각별한 나무라는 게 두 노파가 어눌하게 들려준 이야기의 전부입니다. 그렇게 나무가 별다른 변화 없이 앞으로도 더 오래 지켜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앞으로도 천년을 더 살아갈 기세로 꼿꼿하게 뻗어올린 하송리 은행나무 줄기.

   사람살이는 어쩔 수 없이 변화를 겪습니다. 옹기종기 모여 살던 가옥들이 부서지고, 커다란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고, 그 사이로 휑하게 널따란 길이 뚫립니다. 새로 뚫린 길 양쪽으로 사람들은 어김없이 나무를 심을 겁니다. 그리고 얼마 뒤에는 이런저런 이유로 잘 살아있는 나무의 몸뚱아리에 톱날을 들이밀고, 도끼날을 처박겠지요. 그리고는 새로운 나무들을 어디에선가 데려와 심으며 박수를 칠 지도 모릅니다.

   작업실 앞에서 여름이면 초록 그늘을 드리우다 비명횡사한 가죽나무의 슬픈 밑동이 떠오릅니다. 살아나는 가죽나무의 푸른 추억에 마음이 아픕니다. 가죽나무를 베어내고 새로 심은 이팝나무 꽃이 피어나면 아마 더 아플 겁니다. 오래오래 아플 겁니다.

   고규홍(gohkh@solsup.com)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