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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풍경 너머의 풍경

장맛비를 뚫고 피어난 여름 꽃, 가까이에서 자세히 바라보기

by 丹野 2011. 7. 4.

[나무 생각] 장맛비를 뚫고 피어난 여름 꽃, 가까이에서 자세히 바라보기

   더위가 시작되는 여름이면 환하게 피어나는 태산목의 꽃.

   [2011. 7. 4]

   한 해의 절반이 지났다는 걸 확인이라도 시키려는 듯 며칠 동안 비가 세차게 내렸습니다. 오늘 아침 이곳에는 잠시 주춤하지만, 아직 장맛비는 며칠 더 계속된다고 합니다. 퍼붓는 빗줄기 굵은 날이면, 한 해를 기다려 애면글면 피어난 꽃들이 혹시라도 그냥 떨어지지나 않을까 걱정하게 됩니다. 올 여름에는 놓치지 말고 꼭 보아야지 하고 마음 먹은 꽃들이 있어 더 안절부절못하게 됩니다.

   기상청의 일기예보를 수시로 들여다보다가 잠시 비 그치는 틈을 타 후다닥 길 위에 오르는 건 아마 장마 중에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지난 편지에서 보여드렸던 튤립나무 꽃처럼 올 여름에는 꼭 보아야겠다고 수첩에 적어두었던 꽃들이 있지요. 멀구슬나무와 태산목의 꽃입니다. 서둘러 달려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목원'의 숲에서 빅토리아라는 이름을 가진 태산목의 꽃과 멀구슬나무의 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장맛비를 잘 견디고 멋들어지게 피어나는 보랏빛의 멀구슬나무 꽃.

   자잘하게 피어나는 멀구슬나무의 꽃은 높은 가지 위에서 피어나기 때문에 한창 활짝 피어났지만 짙은 보랏빛 향기를 가슴에 담아내기가 어려웠습니다. 머뭇거리다가 때마침 며칠 동안의 비로 팬 길을 보수하느라 바쁘게 오가던 우리 지킴이들이 가져다 놓은 사다리를 이용해 가지 끝까지 기어 올라가 멀구슬나무의 꽃을 한참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멀구슬나무 꽃 특유의 향기는 제대로 날아오지 않았습니다.

   태산목 빅토리아의 꽃 역시 가까이에서 볼 수 있어 좋긴 했으나, 향기를 느끼기는 어려웠습니다. 같은 꽃이지만, 향기가 강할 때가 있고, 덜할 때가 있긴 합니다. 아마 비 그치고 얼마 지나지 않은 게 향기가 덜한 중요한 이유이지 싶습니다. 꽃의 향기는 벌이나 나비를 부르기 위한 생존전략일텐데, 벌이나 나비가 그리 많지 않은 때에는 향기를 제대로 내지 않는 모양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고 보면 세상에는 이유없는 결과는 없는 거지요.

   짙은 향기가 특징인 멀구슬나무 꽃이 무더기로 피었지만, 비온 뒤여서인지 향기는 그리 강하지 않았습니다.

   멀구슬나무나 태산목은 지난 봄부터 마음을 설레며 기다렸던 꽃이지만, 바위취의 꽃은 그리 깊은 그리움을 남기는 꽃은 아닙니다. 꽃이 피었을 때나 꽃 없이 앙증맞은 잎으로 바위를 둘러싸고 퍼진 모습이 모두 예쁜 까닭이지요. 굳이 어떤 시기를 정해서 기다린 적이 없었던 거지요. 그래도 꽃은 꽃입니다. 무더기로 피어난 바위취의 작은 꽃이 예뻐서 그 곁에 주저앉아 꽤 긴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바위취의 꽃은 다섯 장의 하얀 꽃잎으로 이루어지는데, 그 중 위쪽의 석 장에는 붉은 색 반점이 박혀있습니다. 모든 꽃들이 그렇지만, 가까이 다가가서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 수 있는 특징입니다. 낮은 곳에서 피어나는 꽃들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무릎을 꿇고 허리를 굽히고 다소곳이 고개를 숙여야 합니다. 마치 존경하는 누군가를 경배하는 자세이지요.

   땅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하얗게 피어난 바위취의 꽃.

   아래쪽으로 삐죽이 뻗어낸 두 장의 길쭉한 꽃잎은 제법 도도한 몸짓으로 나선 꼬마신랑의 나비넥타이를 떠오르게 합니다. 정성들여 잘 접은 뒤에 되풀이해서 종이를 바짝 펼쳐주어 뾰족하게 내민 종이학의 날개를 떠올리게도 되지요. 위쪽의 꽃잎 세 장과 달리 하얀 색으로만 이루어진 길쭉한 꽃잎입니다. 서로 조금씩 다른 모습을 한 다섯 장의 꽃잎이 한데 어우러져 빚어내는 자연의 작품입니다.

   예쁜 꽃 한 송이를 피우기 위해 작고 가녀린 풀들이 지나왔을 지난 한햇동안의 살림살이는 어떠했을 지 가만히 생각합니다. 사람에게도 그렇듯이 풀들이라고 어려움이 없지 않았겠지요. 생명과 생명이 어우러지면서 빚어내는 삶의 소용돌이 속에서 쓰러지지 않고 일어서는 것들만이 이처럼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는 것이겠지요. 다시 쏟아져 내릴 장맛비를 생각하며, 이 땅의 모든 생명에게 주어진 운명을 생각할 수밖에 없는 습기 가득한 아침입니다.

   손톱 크기만큼 작은 꽃이지만, 오래 바라보면 오묘한 멋을 가진 바위취 꽃.

   탈 없이 장맛비 잘 견디시기 바랍니다. 장마 지나면 어김없이 찾아올 무더위도 잘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고규홍(gohkh@solsup.com)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