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주의 철학으로 세상 읽기]
(1) 당신에게 자식의 의미는?
자녀라는 종교에 빠진 한국 부모들, 누구를 위한 순교인가
얼마 전의 일이다. 대학에서 강의를 끝내고 강의실을 나가려는데 세련된 모습의 중년여성이 내 길을 막아섰다. 내 수업을 듣고 있던 학생의 어머니였다. “저, 제 아이의 중간시험 성적이 예상보다 좋지 않아 확인차 왔는데요.” 대학에서 처음 겪는 일이라 당혹스러웠다. 그렇지만 친절하게 학생의 시험 결과를 알려주다가 놀라운 사실을 확인했다. 출석부를 확인해보니 그는 군대까지 갔다 온 학생이었다.
어머니의 이야기는 계속됐다. “좋은 대학에 유학을 보내야 하기 때문에 제가 아이를 직접 관리하고 있거든요. 선생님께서 선처해주세요.” 이 어머니는 자기 아이의 성적을 올려주면 다른 아이의 성적은 떨어진다는 사실을 알기라도 하는 것일까. 이 일을 통해 나는 우리 시대 부모들의 자식 사랑이 종교적 맹신에 가깝게 변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자기가 믿는 종교만 눈에 보이면 모든 다른 종교를 부정하는 것처럼 자기 자식만 눈에 보이면 모든 아이를 둘러볼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가장 외롭고 쓸쓸하게 느끼는 곳은 다름 아닌 대도시의 혼잡 속이라고 하는데, 이는 위에서 말한 자유의 이면일 따름이다. 왜냐하면 한 사람이 누리는 자유가 반드시 그의 정서적 안정으로 나타날 필요는 결코 없다는 사실은 대도시에서 가장 잘 나타나기 때문이다.”
―대도시와 정신적 삶
대도시의 삶에 적응된 사람들에게 ‘외상’이란 이미 전설이 되어버린 교환 행위다. 번잡한 길을 걷다가 편의점에 들어가 음료수를 꺼내들고 점원에게 말해보라. “돈은 나중에 가져다줄게요.” 아마 점원은 당신을 미친 사람으로 볼 것이다.
그렇지만 시골 구멍가게에서라면 사람들은 별다른 불편 없이 외상으로 물건을 살 수 있다. 소수의 사람으로 영위되는 시골생활에서 사람들은 서로 인격적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구멍가게 할머니는 누가 누구인지, 누가 어느 집에 살고 있는지 훤히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외상이 가능한 것이다. 이제 편의점에서 외상이 불가능했던 이유도 분명해진다. 낯선 사람들, 너무나 많은 사람이 우글거리는 편의점에서 사람과 사람이 인격적 관계를 맺을 가능성은 그만큼 적은 것이다. 외상은 인격적으로 아는 사람에게만 통용되는 것이지 모르는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법이다.
시골에서 밥이 떨어지면 옆집에서 밥 한 그릇 얻어오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갑자기 찾아오는 이웃 때문에 낭패를 볼 수 있다. 그만큼 시골사람들은 사생활의 자유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게는 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정서적 안정감은 강하지만 개인의 자유는 그만큼 희생되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자본주의의 발달이 대도시의 성장으로 이어지면서 사정은 전혀 달라진다. 대도시에는 너무나 많은 사람이 너무나 상이한 직업으로 살아가고 있다. 대도시의 사람은 모든 사람과 일일이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도 없다.
그저 생활의 필요에 의해 만나고 헤어질 뿐이다. 당연히 서로의 삶에 대한 불간섭은 하나의 불문율로 자리 잡게 된다. 마침내 인간은 대도시생활을 통해 사생활의 자유를 획득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 대가는 치명적이었다.
자유를 얻자마자 대도시 사람들은 정서적 안정감을 상실한다. 인간의 정서적 안정은 인격적 관계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들이 사랑에 몰입하고, 가족을 꿈꾸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이를 통해 잃어버린 인격적 관계, 그리고 그것에서 얻어지는 존재의 안정감을 되찾으려는 것이다. 마침내 우리는 사랑과 가족이 우리 시대의 화두가 된 이유를, 구체적으로 말해 경제적 효율을 고려하지 않고 자식을 낳아 키우려는 현대 부모들의 숨겨진 욕망을 발견하게 된다.
“현대 유럽인은 자유를 선고받았다. 그는 고향을 상실했다. 아이를 갖고 돌보고 부양하는 일은 삶에 새로운 의미와 중요성을 부여해줄 수 있고, 사실상 개인의 사적 존재의 핵심이 될 수 있다. 다른 목표들이 임의적이고 상호 교환될 수 있는 듯하고 내세에 대한 믿음은 사라지고 현세의 희망이 덧없어진 바로 그곳에서, 아이는 단단한 발판과 가정을 발견할 기회를 준다.”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도 정상적인 혼란
울리히 베크의 이 글을 읽자마자 우리는 그의 통찰이 현대 유럽인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사실을 직감한다. 자본주의 발달, 산업화, 도시화, 그리고 이어지는 개인의 파편화는 유럽에만 적용되는 현상은 아니니까. 지멜과 마찬가지로 베크는 현대인의 자유가 고향을 상실한 대가로 얻어졌다고 이야기한다. ‘상실된 고향’은 인격적 관계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정서적 안정감과 다름없는 것이다. 정서적 안정감을 얻기 위해서 남이 부러워할 만한 재산을 축적할 수도 있고 사회적 명망을 얻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일순간 사라질 수 있는 덧없는 것이다. 더군다나 우리는 언젠가 떨어지는 낙엽처럼 이 세상을 떠날 허무한 존재 아닌가. 이런 상황에서 재산이나 명망이란 것이 위로가 될 리 없다.
그렇다고 해서 현대인이 과거 사람들처럼 천국과 같은 내세의 삶을 꿈꾸면서 위로를 받을 수도 없다. 현대인은 너무나 세속적이고 속물적으로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니체의 말대로 우리는 신이 죽은 시대에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상실된 고향’을 되찾는 방법은 무엇일까.
베크는 우리가 선택한 방법이 바로 ‘아이를 갖고 돌보고 부양하는 일’이라고 이야기한다. 우리 어머니들은 아이에게서 영원성, 즉 정서적 안정의 근거를 발견하려고 했던 것이다. 생명 연장의 꿈이라고나 할까. 자신이 죽은 뒤에도 자신에게서 나온 아이는 자신의 생명을 연장할 것이라는 믿음이다. 아브라함이 신을 위해 자신의 아들을 제물로 바쳤다면 우리 어머니들은 자식을 위해 신을 제물로 바친 셈이다.
광신도는 가족도, 친구도, 직장도 신을 위해 포기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물론 이런 파괴적인 결과를 그가 의도했던 것은 아니다. 신에게만 온갖 관심과 정신을 기울이기 때문에 가족 친구 직장에 대해서는 그럴 만한 정신적 여유가 없을 뿐이다. 자식을 통해서만 정서적 안정을 찾으려는 우리 부모들도 마찬가지 아닐까. 자식 광신도는 그것이 주는 안정과 평온의 감정에 매료되어 자신과 더불어 살고 있는 타인이나 주변의 사물에 시선을 둘 여지가 없게 된다. 자식이란 신에 매료되어, 자신의 삶에서 마주치는 것들에 대해 둔감해진 것이다. 어쩌면 당연한 일 아닌가. A에 정신적 에너지를 집중하면 할수록 B에는 그만큼 적은 에너지만 투사될 수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남편을 기러기 아빠로 방치한 채 아이의 유학생활을 돕기 위해 외국으로 나간 어머니를 생각해보라. 헌신적인 자식 사랑이다. 이웃의 아이들은 생각하지 않고 원정출산을 당당히 떠나는 어느 젊은 임신부의 위대한 거동은 또 어떤가. 군대까지 갔다 온 아들을 위해 대학 캠퍼스를 휘젓고 다니는 어머니들은 또 어떤가. 때로 사람들은 ‘자연스러운 모정’이라고 이들을 옹호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제 우리는 안다. 정서적 안정을 얻기 위해서 우리 어머니들은 자식을 신적인 위치로까지 격상시켰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우리 어머니들은 맹신하는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제단에 기꺼이 바치고 있을 뿐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녀의 남편이나 다른 식구마저도 그녀의 이런 종교에 기꺼이 귀의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식 종교는 위대한 선교의 힘마저 갖추고 있는 셈이다.
강신주 철학박사
::강신주 씨는…::
연세대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철학자이자 인문저자다. 출판기획 집단 ‘문사철’의 기획위원. 동서양 철학을 넘나드는 글쓰기가 특징이며, 철학에 문학 등 다른 분야를 접목하는 시도를 즐겨 한다. 저서로 들뢰즈, 사르트르 같은 철학자들의 사유가 우리 현대 시인들의 시와 어떻게 만나는지 고찰한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을 비롯해 ‘철학 vs 철학’ ‘철학, 삶을 만나다’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 ‘상처받지 않을 권리’ 등이 있다.
한때 축복받았던 자식들이 이제는 짐스러운 존재로 전락한 시대다. 이런 시대에 자식을 낳아 기르려는 우리 부모들의 속내는 당연히 경제적인 현실을 넘어선 종교적 색채를 띨 수밖에 없을 것이다. 도대체 무엇을 계기로 우리 부모들은 자식에 광적으로 몰입하는 것일까. 게오르크 지멜의 이야기를 실마리로 고민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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