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주의 철학으로 세상 읽기]<2> 왜 우리 아저씨들은 소녀시대에 열광하나
한 CF가 떠오른다. 화실이었다. 화실에는 젊은 남녀가 있었다. 여자는 그림을 그리던 남자를 옆에서 지그시 응시하고 있다. 여자는 갑자기 남자의 얼굴을 붙잡고 깊은 키스를 나눈다. 상당히 당혹스러운 광경이다. 그러나 이 정도로 당황해서는 안 된다. 여자는 남자와의 키스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인지 “아닌가 보다”라고 말하며 쿨하게 돌아선다.
짧은 CF이지만 우리 시대 남성과 여성의 위치를 신랄하게 보여주는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적극적인 구애 행위는 보통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져 왔다. 그렇지만 이제는 여성도 자신의 욕망을 당당하게 표출하고, 심지어는 남성이 나와 맞는지를 적극적으로 실험하기도 한다. 실험에 통과하면 남성을 애인으로 삼겠지만, 통과하지 못한다면 친구로 지내면 된다는 식이다.
만약 남성으로서 당신이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어떤 감정이 들 것인가? 한 번 정도는 무방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여성이 반복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피력할 때, 어느 남성이든 당혹감과 불편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전통적으로 남성이 백치미를 가진 여성을 좋아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백치미를 가진 여성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심지어 상대방이 무엇을 욕망하고 있는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연애 관계에서 수동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여성, 그래서 작은 키스에도 얼굴에 홍조를 띠는 여성이다. 이 점에서 남성들이라면 누구나 블라디미르 나보코프(1899∼1977)의 소설 ‘롤리타(Lolita)’로부터 유래한 아동성애적 콤플렉스, 즉 롤리타 콤플렉스에 노출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소녀’만큼 백치미를 가진, 성적으로 수동적인 존재도 없을 테니까.
우리 시대 남성들이 겪고 있는 성적인 위축감을 가만히 놔둘 오늘날의 대중문화가 아니다. 비록 환상일지라도 성적인 당당함을 회복할 수만 있다면, 남성들은 거리낌 없이 지갑을 열 태세이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소녀시대’로 대표되는 걸그룹이 탄생할 준비는 이미 갖추어졌던 셈이다.
걸그룹은 과거 H.O.T.나 핑클과 마찬가지로 아이돌 그룹에 속한다. 그러나 과거 아이돌 그룹에는 없었던 흥미로운 현상이 걸그룹을 둘러싸고 나타났다. ‘삼촌팬’이 등장한 것이다. 청소년 틈에 섞여 소녀시대의 공연에 열광하는 30, 40대 아저씨들의 모습은 이제 별로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도대체 무엇이 30, 40대 아저씨들을 걸그룹에 열광하도록 만들었는가? 삼촌팬들의 성적 판타지가 가지는 메커니즘은 어떤 특징을 보이는가? 현대의 위대한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1901∼1981)의 통찰에 도움을 청해보도록 하자.
라캉에 따르면 대부분의 남자는 강박증(n´evrose obsessionnelle)에, 대부분의 여자는 히스테리(hyst´erie)에 지배받는다. 히스테리 환자는 자신의 욕망을 부정하고 타자가 욕망하는 대상이 되려고 한다. 그렇지만 어떻게 자신의 욕망을 부정할 수 있겠는가? 어느 순간 자신의 욕망이 드러날 경우, 히스테리 환자는 말 그대로 히스테리를 부리게 되는 것이다. 반면 강박증 환자는 자신의 욕망을 관철시키는 데 집중하고 타자의 욕망 자체는 부정하려는 경향을 가진다.
그렇기 때문에 강박증 환자에게 타자는 자신과 유사한 욕망의 주체가 아니라 단지 욕망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수단이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라캉이 “남자에게 여성은 창녀 아니면 어머니밖에 없다”고 이야기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대부분 남자는 사랑하는 애인에게 적극적인 신체 접촉을 시도하고, 여성은 사랑하는 애인으로부터 매력적으로 보이기 위해 노력한다. 이렇게 남성이 자신의 욕망에, 여성이 타자의 욕망에 집중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라캉은 가부장적 가족제도, 나아가 그것을 지탱하는 가부장적 사회제도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남아를 선호하는 분위기에서 여자 아이는 남자 아이에 비해 부모를 포함한 타자의 눈치를 보면서 자라게 되지만, 남자 아이는 상대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솔직하게 피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남성의 성적인 당혹감과 불편함은 타자가 자기의 욕망을 실현시켜 줄 수 있는 수단이 아니라는 사실에 직면할 때 발생한다. 역으로 이것은 대부분 남성이 애인이나 아내가 자신의 욕망을 받아주는 수동적인 자세를 취할 때 편안함을 느끼는 이유도 설명해준다.
이제 라캉을 통해 우리는 삼촌팬들의 복잡한 욕망 메커니즘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얻게 되었다. 우리 30, 40대 아저씨들은 1997년 외환위기의 한파를 온몸으로 겪었던 첫 세대라고 할 수 있다. 무한 경쟁과 그로부터 발생하는 고용 불안의 시대에 자신의 욕망을 관철시키려는 강박증 환자의 길이 그다지 쉬운 것은 아니다.
경제적 우월감이 없을 때 성적으로 위축될 수밖에 없는 것이 남성이다. 반대로 맞벌이에 뛰어들었던 그들의 애인이나 아내는 상대적으로 당당해지게 되었다. 자신의 욕망을 관철시키기에 무력해진 남성적 삶의 조건, 그리고 상대적으로 강화된 여성적 삶의 조건. 이 두 가지 조건 속에서 우리 아저씨들은 위축되어 있다.
그렇지만 압축된 용수철은 언젠가 조건만 주어지면 튀어 오르기 마련이다. 마침내 우리 아저씨들은 자신의 강박증적 욕망을 해소시킬 수 있는 대상을 발견하게 된다. 아니 정확히 말해 해방구가 없어 보였던 그들의 억압된 욕망에 기막힌 미끼가 던져진 것이다. 그것이 바로 걸그룹이었던 셈이다.
그녀들의 노래는 풋내 나는 청순한 소녀의 목소리로 울려 퍼지지만, 그녀들의 춤은 이와는 대조적으로 골반의 움직임을 과도하게 강조하는 관능미를 띠고 있다. 연예기획사는 걸그룹에 자신의 욕망에 수줍어하는 순수한 소녀의 이미지를, 한편으로는 나이에 비해 성숙한 육체가 뿜어내는 섹시한 이미지를 부여한 것이다. 소녀의 이미지가 우리 아저씨들을 당당하게 만들었고, 그녀들이 뿜어내는 섹시한 이미지는 마침내 아저씨들의 억압된 욕망에 활기를 불어넣은 것이다.
사실 걸그룹이 가진 이런 이중적 이미지는 이미 일본에서 만들어진 적이 있다. 1990년대 초 버블경제가 붕괴되면서, 일본도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 성적 판타지의 대상으로 등장한 적이 있다. 아니 멀리 갈 필요도 없을 것이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우리 사회에 원조교제나 아동성추행이 얼마나 커다란 사회적 문제가 되었는지를 기억한다면 말이다.
경제적으로 위축되었을 때 우리 아저씨들은 성관계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억압될수록 그들의 욕망은 더 강해질 수밖에 없는 법이다. 이 순간 영민한 연예기획사가 만든 걸그룹이 우리 아저씨들의 욕망을 집요하게 부추겼던 것이다. 그렇지만 걸그룹에 대한 아저씨들의 욕망은 현실화될 수 없는 신기루와 같은 것 아닌가?
기 드보르☆☆(1931∼1994)라면 아저씨들의 눈에 비친 음란하면서 동시에 순결한 소녀들은 하나의 풍경, 즉 ‘스펙타클(spectacle)’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했을 것이다. 그래서 스펙타클이란 ‘삶에 대한 시각적 부정’(‘스펙타클의 사회-La soci´et´e du spectacle’)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잊지 말자. 걸그룹에 몰입하면서 시각적으로 부정된 아저씨들의 삶도 극복되어야 할 대상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걸그룹을 향한 삼촌팬들의 환호는 자신의 욕망을 관철시키기 위해 약하고 수동적인 존재를 찾는 강박증적 증상을 반복한다. 그래서 삼촌팬들의 열광은 원조교제나 아동성추행과 유사한 메커니즘을 공유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삼촌팬들의 열광은 원조교제나 아동성추행과는 분명 다른 것이다. 전자가 환상 속에서 작동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어린 여아에 대한 현실적 폭력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잊지 말자. 만약 우리 시대 남성들이 강박증을 벗어난다면, 당연히 걸그룹도 삼촌팬들도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걸그룹의 성적 백치미는 우리 아저씨들의 위축된 성적 강박증을 먹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사실 강박증은 히스테리와 함께 인간이 반드시 극복해야 할 대상 아닌가? 타자와 제대로 관계하려면, 그것이 성적인 것이든 아니든 간에, 우리는 자신의 욕망뿐만 아니라 타자의 욕망도 부정하지 않아야 한다. 어쩌면 위기에 빠진 남성들은 드디어 온전한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는 기회를 잡은 것인지도 모른다. 위축된 남성적 강박증을 상상적으로나마 실현할 것인가? 아니면 여성의 욕망도 긍정하는 성숙한 인간이 될 것인가?
강신주 철학박사
자크 라캉★
정신분석학을 생물학적으로 환원하려는 당시 정신분석학계에 맞서 프로이트의 인문정신을 회복하려고 했던 프랑스의 정신분석가. 인간이 자신에 대해 생각한 것과 그의 실제 삶 사이에 커다란 간극이 있다는 것에 주목하면서 생각과 존재 사이의 일치를 도모하려고 했다. 주요 저서로 ‘에크리’가 있다.
기 드보르★★
대중매체와 대중문화를 가장 급진적으로 사유했던 프랑스의 영화 제작자이자 대중문화 비평가. 그는 대중매체가 인간을 수동적인 존재로, 구체적으로 말해 소비의 주체로 길들이는 현상을 예리하게 분석한 것으로 유명하다. 주요 저서로 ‘스펙타클의 사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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