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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나호열 시인/詩 창작 강의

시의 언어는 어떤 언어인가

by 丹野 2008. 4. 11.

 

 

시의 언어는 어떤 언어인가


박상천

 

 


시를 일컬어 흔히 언어예술이라고 한다. 언어예술이라는 말은 시의 핵심이 무엇인지 잘 드러내고 있다. 따지고 보면 언어는 시의 질료(material)이면서 시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시에 관한 이론을 공부하건 시 창작의 방법을 공부하건 그 출발은 언어일 수밖에 없다. 언어에 대한 공부는 시 공부의 출발이자 기초이며 그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 공부를 언어 공부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말은 먼저 언어의 속성을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특히 일상의 언어와 시의 언어가 어떻게 다른지를 아는 일이 시 공부의 출발이다.



1. 언어는 사물을 존재하게 한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말했다.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는 것은 무얼 뜻하는 것일까? 언어란 가장 쉽게 말해 어떤 사물에 붙여진 ‘이름’이다. ‘나무’ ‘하늘’ ‘책상’ ‘물고기’ 등 물질적인 것들을 일컫는 언어만이 아니라 ‘슬픔’ ‘기쁨’ ‘사랑’ 등 추상적인 감정을 나타내는 언어들도 따지고 보면 그러한 감정들에 붙여진 이름이다.


사물들은 이러한 이름(언어)에 의해 구별되고 비로소 존재하게 된다. ‘언어에 의해 사물들이 구별되고 존재한다’는 말을 더 쉽게 설명해보자. 여기 우리가 ‘볼펜’이라고 부르는 사물과 ‘연필’이라고 부르는 사물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만약 이 두 가지 사물들을 각각 ‘볼펜’ ‘연필’이라고 구분하여 이름을 붙이지 않고 그저 ‘필기도구’라는 이름만을 붙였다고 한다면 ‘필기도구’는 존재하지만 ‘볼펜’과 ‘연필’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또 ‘장롱’ ‘식탁’ ‘의자’라는 각각의 이름이 없이 ‘가구’라는 이름만 있다면 이 세상에는 ‘가구’는 있지만 ‘장롱’ ‘식탁’ ‘의자’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이름이 붙지 않은 존재를 우리는 어떻게 존재한다고 할 수 있으며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러므로 ‘필기도구’라는 이름이 ‘필기도구’를 존재하게 하고 ‘볼펜’이라는 이름이 ‘볼펜’을 존재하게 하며 ‘연필’이라는 이름이 연필을 존재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하이데거는 언어를 일컬어 ‘존재의 집’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언어는 이처럼 사물에 붙여진 이름으로서 사물을 존재하게 하는 것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의 「꽃」 일부


어떤 사물이건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무어라 말할 수 없는 ‘하나의 몸짓’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사물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비로소 ‘꽃’이 되고 ‘나무’가 되고 ‘하늘’이 된다.



2. 언어와 사물의 관계는 자의적이지만 사회적 약속이다


언어는 가장 쉽게 말해 사물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사물과 사물의 이름인 언어의 결합 관계에는 필연성이 없다. 예를 들어 우리가 ‘나무’라고 부르는 사물과 ‘나무’라는 언어의 결합은 임의적이고 자의적인 것이다. 만약 ‘나무’라고 부르는 사물과 ‘나무’라고 부르는 언어 사이에 꼭 그렇게 결합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이 있다면 세계 각국의 언어가 서로 다를 수가 없고 시대를 따라 언어가 변화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모두 알다시피 우리가 ‘나무’라고 부르는 사물을 15세기에는 ‘나모’라고 하였고 영어에서는 ‘tree’라고 부른다. 사물과 언어의 결합이 필연적이라면 동일한 사물을 이렇게 다르게 부를 수는 없고 또 다르게 불러서도 안될 것이다. 그러므로 언어와 사물의 결합 관계가 자의적이라는 것은 여기서 명백해진다.

그러나 사물과 언어의 관계가 자의적이라고 해서 말하는 사람이 임의로 그 이름을 바꿀 수는 없다. ‘나무’를 ‘나무’라 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하늘’이라고 한다면 의사 소통은 불가능해진다. 그러므로 사물과 언어 결합의 자의성은 사회적으로 용인을 받아야 하고 용인을 받은 이름으로 사물을 부름으로써 우리의 의사 소통이 가능해진다. 그러므로 일상의 언어는 사회적 약속을 깨뜨려서는 안 된다.



3. 시의 언어는 사회적 약속을 깨뜨린다


언어와 사물의 관계는 분명 자의적이지만 그것은 사회적 약속이다. 따라서 사회적 약속을 저버리면 의사 소통이 불가능해지거나 어려워진다. 그런데 시는 이러한 언어의 사회적 약속을 저버리고 그 약속을 깨뜨리려고 한다. 가장 쉬운 예를 들어보자.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유치환의 「깃발」


이 시는 우리가 잘 아는 유치환의 「깃발」이다. 그러나 우리가 제목도 없이 이 시를 처음 대했다고 했을 때, 이 시가 무엇을 대상으로 쓴 글인지 또는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쉽게 알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사전을 찾아보면 ‘기(旗)’는 “헝겊이나 종이 같은 데에 무슨 글자, 그림, 부호, 빛깔 같은 것을 잘 보이도록 그리거나 써서 막대 같은 것에 달아 특정한 뜻을 나타내는 표상으로 쓰는 물건의 총칭”이라고 되어 있고 ‘깃발’은 ‘헝겊이나 종이로 된 기의 근본 부분’이라고 되어 있다. 이러한 사전적 정의들을 보고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사람은 없다. 그런데 왜 유치환은 누구에게나 뜻이 통하는 이런 정상적인 언어를 버리고 깃발을 일컬어 ‘소리없는 아우성’이니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이니 ‘백로처럼 날개를 편 애수’니 하는 말로 읽는 이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일까?


한 마디로 말해서 시의 언어는 일상의 언어를 ‘비틀고 왜곡’하는 것이다. 일상 언어가 지닌 가장 중요한 기능은 ‘의사 소통’ ‘정보 전달’이라 할 수 있는데 의사 소통을 위하여서는 언어의 사회적 약속을 잘 지켜서 사용해야만 한다. 그러한 일상어의 사용법을 ‘정상적 언어 사용법’이라고 한다면, 시의 언어는 그러한 정상적 언어 사용법을 어기고, 부수고, 비틀어 비정상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 시는 일상 언어의 정상적 용법을 사용하지 않고 사회적 약속을 깨뜨리며 비정상적 용법을 사용한다는 사실과 둘째, 그러므로 시는 의사 소통을 위해서는 효율적이거나 그다지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4. 시의 언어는 왜 사회적 약속을 깨뜨리는가?


언어가 사물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흔히 언어와 사물을 동일시하기 쉽다. 그러나 언어가 곧 사물은 아니다. 언어는 ‘사물의 공통적인 속성에 붙여진 이름’에 불과한 것이다.

예를 들어 여기 ‘연필’ 두 자루가 있다고 하자. 이 두 자루의 연필은 각각 별개의 사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두 가지 별개의 사물을 모두 ‘연필’이라고 부른다. 우리의 이러한 언어 사용법은 논리적으로 모순이다. 두 자루의 연필 중에 하나를 A라 하고 또다른 하나를 B라고 하자.


그러면 우리의 언어 사용법으로 볼 때, A〓연필, B〓연필이고 이 명제에 따라 ‘A〓B〓연필’이라는 명제가 성립해야 한다. 그러나 A와 B는 서로 다른 사물이므로 ‘A〓B’라는 명제가 성립할 수 없다. 왜 이러한 모순이 발생하는가? 그 까닭은 ‘A〓연필’, ‘B〓연필’이라는 명제가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물과 언어는 동일한 것이 아니다. 언어는 사물 그 자체가 아니며 또한 사물 개개의 이름이 아니라 ‘사물의 공통적인 속성에 자의적으로 붙여진 이름(기호)’에 불과한 것이다. ‘연필’이라는 언어는 연필 하나하나에 붙여진 개별적인 이름이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연필의 공통적 속성(흑연 심을 가느다란 나무때기 속에 넣어 만든 필기도구)에 붙여진 이름인 셈이다.


개별적인 사물의 이름이 아니라 공통적 속성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언어의 성격 때문에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근본적으로 추상적일 수밖에 없고 불완전한 것이다. 다시 예를 들어보자. A가 ‘나는 슬프다.’고 말했다. B도 ‘나는 슬프다.’고 말했다. 그러면 이 두 사람이 말한 ‘슬픔’은 동일한 것일까? 이 두 사람의 ‘슬픔’이 동일한 것이 아님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슬픔’이라는 말은, 모든 이들이 가진 그 다양한 ‘슬픔’의 공통적 속성(뜻밖의 일에 낙심하여 눈물이 나거나 한숨이 나오며 마음이 아프고 괴로운 느낌)을 뽑아내어 ‘슬픔’이라고 이름 붙인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는 슬프다’ 라는 말을 가지고 자신이 지닌 개별적인 ‘슬픔’의 진실을 온전히 표현할 수는 없는 것이다.


시는 일상의 언어가 지닌 이러한 추상성과 불완전성을, 언어를 통해 극복하려는 노력이라 할 수 있다. ‘슬픔’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나의 슬픔. 그래서 사람들은 나의 슬픔의 진정한 모습을 표현해낼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된다. 그러한 노력이 시를 탄생하게 하였다. 그래서 시는 비유, 묘사, 상징, 이미지 등 다양한 시적 장치들을 동원하여 사물의 공통 속성에 붙여진 이름이 아닌 개별적 사물에 적합한 이름을 붙이려고 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 시에서는 일상 언어의 정상적인 사용법이 아닌 언어의 비정상적 사용법이 더욱 두드러지게 되는 셈이다.



5. 시의 언어는 의사 소통을 위한 언어가 아니다


언어의 가장 중요한 기능인 ‘의사 소통’ ‘정보 전달’을 위해서는 위에서도 설명한 바와 같이 사회적 약속을 지켜 언어를 정상적으로 사용해야만 한다. 그러나 시는 이러한 언어의 정상적 사용법을 무시하고 깨뜨리고 왜곡한다. 따라서 시는 언어 구조물임에도 불구하고 일상의 언어와는 달리 의사 소통이나 정보 전달을 위해서는 그다지 효율적인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의사 소통이나 정보 전달을 위해 시를 쓰는 일은 어리석은 일이다. 의사 소통을 위해서는 정상적 용법으로 가장 간명하게 표현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것이다. 그러나 시는 앞서도 설명한 바와 같이 의사 소통을 위한 효율적인 방법이 결코 아니다.


그렇다면 시는 의사 소통이나 정보 전달을 할 수 없는 것일까? 시도 언어로 만들어진 것인 만큼 의사 소통이나 정보 전달을 할 수 없는 것은 아니고 의사 소통의 목적을 위해 시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의사 소통이라는 목적을 달성하려고 할 때 시는 일상의 언어 수준으로 떨어지게 된다.

의사 소통의 일반적 원리를 생각해보자. 의사 소통이란 발신자(말하는 이)가 어떤 ‘매체’를 사용하여 수신자(말 듣는 이)에게 ‘내용’을 보내고 수신자는 매체를 통해 받은 ‘내용’을 해독하는 일련의 과정이다. 이러한 의사 소통의 과정이 제대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발신자는 ‘내용’을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매체를 사용하여 수신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보내야 하고 수신자는 발신자가 매체를 통해 보낸 내용을 발신자가 의도한 내용대로 해독하여야만 한다. 만약에 발신자가 보낸 내용이 수신자가 해독하기 어려운 내용이라거나 또는 발신자가 보낸 내용을 수신자가 임의로 해석하게 되면 의사 소통은 실패하게 된다. 이러한 의사 소통의 일반적 원리를 시에 적용한다면 시인은 발신자, 시의 언어는 매체, 독자는 수신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의사 소통의 일반 원리에 따라 시인은 독자가 해독할 수 있는 방법으로 내용을 전달해야 하고 독자는 시인의 의도에 따라 시를 해석해야만 한다. 그러나 시는 이러한 의사 소통의 일반 원리를 따르지 않는다. 시인은 언어를 통해 어떤 세계를 창조하였고 독자는 시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시인이 창조해 놓은 세계를 해독할 뿐이다. 즉, 시인은 독자에게 어떤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시를 쓰는 것이 아니고 독자는 시인의 의도를 알기 위해 시를 읽는 것이 아니다. 시는 시인이 독자에게 보내는 ‘편지’가 아니다.



6. 시의 언어는 체험하게 하는 언어이다


일상의 언어와 시의 언어는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시의 언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사용되는 언어가 그대로 시에 사용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시의 언어와 일상의 언어가 완전히 동일한 것은 아니다. 기능 면에서 두 언어는 차이를 보여준다.

언어는 크게 보아 세 가지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정보 전달의 기능이고 둘째는 행위 요구의 기능이며 셋째는 체험의 기능이다.


첫째 정보 전달의 기능은 일상의 언어가 가지고 있는 핵심 기능이라 할 수 있다. 정보 전달을 위하여서는 언어는 가장 간명해져야 하며 사전적 정의를 사용하는 것이 가장 간명하면서도 효과적인 정보 전달의 방법이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려고 한다고 하자. 사전에는 ‘사랑’을 ‘① 아끼고 위하는 정성스런 마음 또는 그러한 일 ② 남녀가 서로 정을 들이어 애틋하게 그리는 마음 또는 그러한 일’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렇게 사전적인 정의를 통해 그 개념을 전달하면 읽는 이나 듣는 이에게 가장 간명하면서도 분명한 개념을 전달할 수 있다. 그러나 정보 전달을 가장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이러한 설명의 방법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 설명의 한계로 먼저 우리의 감정이나 정서를 설명하는 데에는 따르는 어려움을 들 수 있다.

앞서도 설명한 바와 같이 언어는 개개의 사물에 붙여진 이름이 아니라 사물의 공통되는 속성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근본적으로 추상적일 수밖에 없다. 추상이란 ‘낱낱의 구체적인 사물에서 공통되는 속성이나 관계 따위를 관념적으로 뽑아낸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개개인의 감정 상태를 적확하게 표현해 보여주지 못한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마음의 상태를 설명해보도록 하자. ‘나는 요즈음 A를 사랑하게 되어 마음이 기쁘고 즐겁다.’라고 설명을 한다고 해서 사랑하는 마음의 상태를 상대방에게 모두 전달할 수는 없다. 열 명의 사람이 있으면 열 명의 사람은 모두 사랑하는 마음이 같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열 명이 지닌 각각의 사랑을 ‘구체적, 개체적’이라고 한다면 그 구체적이고 개체적인 ‘사랑’이 지닌 공통의 속성 즉, ‘서로 정을 들이어 애틋하게 그리는 마음’이라는 관념을 뽑아낸 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추상적 언어인 셈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일상의 언어는 나의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사랑을 있는 대로 모두 다 표현해 낼 수는 없다.

둘째는 말하는 이가 말 듣는 이에게 어떤 ‘행위를 요구하거나 유도’하기 위한 기능이 있다. 그러나 그 행위를 실행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어디까지나 듣는 이의 ‘의지’에 달려 있다. 다른 사람을 설득하기 위하여, 설득하여 행동하게 하기 위하여 씌어지는 글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글들을 읽은 이들이 그 글에 설득당하거나 감동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으며 간혹 그 글에 감동하여 그 글이 요구하는 어떤 행위를 실행에 옮기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러한 언어 행위는 읽는 이의 ‘의지’라는 장애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인간들은 서로 사랑해야만 한다. 사랑은 인간들에게 주어진 최대의 사명이다. 그러므로 우리 서로 사랑하자.” 라고 말한다고 해서 사랑할 수 있게 된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워질 것인가?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개인 모두는 개체적인 의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행위 요구나 유도 지향의 언어는 그 목적을 실현하기가 쉽지 않다.

이러한 면에서 보자면 시의 언어는 정보 전달이나 행위 유도를 위해서는 그다지 좋은 방법이 아니다. 그렇다면 시의 언어는 어떤 기능을 하는 언어인가?

먼저 다음에 있는 시 한 편을 읽어보자.


당신 곁에 머물면

화상(火傷)을 입고.


당신 곁을 떠나면

동상(凍傷)에 걸린다.


아나벨리 내 사랑.


아아, 불

―이세룡의 「아나벨리」


이 시는 ‘사랑’을 ‘불’의 속성에 비유하여 시화하고 있다. 이 시를 통해 시인은 독자들에게 ‘당신 곁에 머물면 火傷을 입고 당신 곁을 떠나면 凍傷에 걸린다.’는 사실(정보)을 전달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그 사람 곁에 머물면 火傷을 입으니까 가지 말라거나 또는 사랑은 이렇게 좋은 것이니까 사랑을 하라.’는 행위를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이 시인이 ‘사랑’의 속성에 관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서 또는 ‘사랑’을 요구하기 위해서 시를 쓴 것은 결코 아니다. 이 시는 산문의 언어, 일상의 언어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사랑의 아이러니를 단 6행으로 표현해내고, 세계 어느 나라 사전에도 없는 ‘사랑’의 속성을 새롭게 말하고 있다.


이처럼 시인은 언어를 가지고 기존의 ‘사랑’에 새로운 ‘이름’을 붙여줌으로써 ‘사랑’이라는 ‘존재’를 새로 태어나게 하고 있다. 그래서 시인은 사물의 새로운 면을 발견해내는 ‘발견자’이며 그러한 발견에 새로운 이름을 붙여 사물을 새롭게 존재하게 하는 ‘명명자’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는 이 시를 읽으며 ‘사랑’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존재’를 새롭게 또는 구체적으로 체험하게 된다. 정보 전달의 언어가 지닌 관념성이나 추상성을 극복하려는 시의 언어는 새로운 체험을 가능하게 한다. 시인은 시를 통해 일정한 사실을 전달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시를 통해 우리에게 새로운 체험을 가능하게 해준다.


그러므로 시는 언어를 통해 언어가 지닌 추상의 세계를 극복하고 구체화한다. 이해의 대상은 될지언정 체험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추상의 세계를 구체적인 체험의 세계로 만들어 준다. 우리가 알고 있었던(이해하고 있었던) ‘사랑’은 ‘남녀가 서로 정을 들이어 애틋하게 그리는 마음 또는 그러한 일’이지만 우리의 구체적인 사랑을 만족시켜주는 설명이 아니기 때문에 계속해서 대상을 추상적인 세계에 머물러 있게 한다. 그러나 위의 시에서 보듯 한 시인에 의해 ‘사랑’은 새롭게 존재하게 되었고 우리는 시인에 의해 창조된 새로운 사랑을 만나게 된다.

그렇다면 체험이란 무엇인가. 체험이라는 것은 구체적인 대상과 만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감각 기관을 통해 대상과 만나게 되고 그 대상에 대한 인식을 갖게 되는데 이를 ‘지각’이라고 하며 이러한 지각을 통해 대상을 체험하게 된다. 또한 대상을 지각하게 될 때 우리는 마음이 움직이는 어떤 느낌(감정)을 갖게 되기도 하고 이성적 사유를 하기도 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없이 많은 체험들을 하게 된다. 그러나 동일한 체험들이 반복되면서 체험의 대상들에 대해 무감각해지기 마련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늘상 만나고 있는 사물에 대하여 점차 무감각해지고 있다. 이러한 습관적이고 무감각해진 삶을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은 ‘자동화된 삶’이라고 말한다. 자동화된 삶 속에는 감동이 있을 수 없다. 어떠한 느낌도 주지 못하는 체험, 그 체험은 이미 체험으로서의 가치를 잃고 만 것이다.

이렇듯 일상의 반복되는 체험은 우리의 삶을 무감각하게 하고 있다. 그러나 시는 우리들의 잃어버린 감각을 되살려 줄 수 있어야 하고 대상과 삶을 새롭게 체험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새로운 체험이야말로 시를 시답게 해주는 가장 중요한 요건이라 할 수 있다.

‘사랑’이란 ‘남녀가 서로 정을 들이어 애틋하게 그리는 마음 또는 그러한 일’이라는 것을 이해시키기 위해 시를 쓰는 것도 아니고 여름에는 나무가 푸르고 가을에는 낙엽이 진다는 사실을 알리거나 내가 실연을 해서 슬프다는 사실을 독자에게 알리기 위해서 시를 쓰는 것도 아니다. 시는 무디어져버린 우리의 감각을 되살려주고 느낌이 사라져버린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해주지 않으면 안 된다.


시는 이렇게 우리의 삶을 그리고 세계의 사물을 새롭게 지각하고 체험하도록 해주어야 한다. 시인은 언어를 가지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낸다. 시의 언어가 새로운 세계를 존재하게 한다. 우리는 시의 언어가 새롭게 존재하게 해준 세계를 만남으로써 현실에서는 체험하지 못한 새로운 세계를 체험하게 된다. 시는 기존의 삶을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느끼게 해주려는 것이다.◑ (시인, 한양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