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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 램프를 켜다

너를 위한 변주곡 / 박해림

by 丹野 2010. 7. 30.

 

[우리詩월평】

 

 

                      너를 위한 변주곡

 

 

                                                                                                        박 해 림 (시인·문학박사)

 

 

 

이화은,「 물음표가 없는 질문」(《문학청춘》2010년봄호)

강중훈,「 눈 내리는 날 밤을 위해서」(《우리詩》2010년5월호)

오정국,「 내설악 일기日記」(《우리詩》2010년5월호)

이영식,「 시계는 뒤통수를 보여주지 않는다」(《현대시학》2010년5월호)

최문자,「 절반의 어둠」(《문학·선》2010년봄호)

고미숙,「 칠순, 어머니」(《우리詩》2010년4월호)

 

 

 

 

  일상 속에서 일상적이지 않게 산다는 건 매우 위험하다. 한 발만 떼고 있

어도 위태롭기 짝이 없는데 시인은 왜 양쪽 발을 다 떼지 못해 안달인가.

하긴 시인도 여느 직장인들과 다를 바 없다. 각자가 소속한 집단에서 생계

를 위해 주어진 일에 열심히 돈벌이에 골몰하거나 취미 생활에도 많은 시

간과 노력을 기울인다. 하지만 그건 외적인 것에 불과해 보인다. 시의 창구

를 통해 이따금 공중부양도 불사하는 모습이거나 양쪽 발을 아슬아슬 떼었

다 붙였다하는 것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일전에 들은 이야기 한 토막이다. 시 쓰는 직장 동료가 있는데 자주 상사

에게 꾸지람을 듣는다고 했다. 옆에서 보기에도 공사公私구분을 잘 못하고

있는,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어 시 쓰는 사람은 다 저런가 싶어 의아한 생각

이 들었다고 했다. 물론 일부에 불과할 터이다. 그러나 어쩌면 시인 다수가

일반인들에게 비현실적 양태를 보일 수 있겠다 싶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

계가 허물어져 보이는 이러한 모습은 어쩌면 시인이기에 자연스러울 수 있

을지 모른다.

  일상과 자연 속에서, 어떤 특정한 사물과 대상과 불현듯 맞닥뜨렸을 때

시인의 근성은 여느 사람들과 확연히 구분된다. 생래적인 감각의 인지적

능력은 보통 사람으로 내버려두지 않는다. 따라서 사회의 조직관계에서,

동료와 이웃과의 지류를 통해 문득문득 전율되고 감각되어지는 돌연한 시

적 상황은 일반인들과 구분되게 한다. 이들과의 교감이 작동되는 순간 감

전된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그 순간, 정말 아무렇지 않은 척 책상에

앉아 하던 일을 계속하고 있다 할지라도 내면에는 엄청난 회오리가 일고

있다. 만약 내적인 흔들림에서 초연할 수 있다면 둘 중 하나다. 하나는 그

깊이 때문일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일상인으로서 문학은 단순한 취미생활에

불과하던지 말이다. 살아있는 동안 누구나 시인이다. 자연과 사물을 맞닥

뜨리면서 파생되는 감정, 그리하여 내면 깊숙이 두레박으로 건져 올린 언

어들과의 조우는 언제나 새로운 세계와 영혼의 교감을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은 즐거운 일이다. 아래의

시는 내적 탐구, 즉 ‘너’라고 표상된 ‘나’에게로 향하는 여정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시사하는 점이 많다. 밤늦게 스스로 소외된 자아는 더 이상 혼자

이지 않은 것을 괴로워한다. 누군가 말을 걸어주었으므로 이제 더 이상 혼

자 있지 않다. 전화라는 매개체를 통해 철저하게 자신에게 탐닉해가는 도

정이 결코 낯설지 않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걸까. 한밤중 누군가 전화를

한다. 받지 않을 수 있지만 화자는 전화를 받아든다. 전화를 받아든 그 순

간부터 내적 탐구에 돌입하는 것이다. 도대체 밤늦게 전화를 건 이는 누구

며 무슨 일로 소통을 원하는 것일까. 전화를 건 쪽에서 자신의 신분을 밝히

고 상대에게 소통의 이유를 밝혀야 할 것인데 아래의 시는 정반대의 상황

을 연출한다. ‘나더러 누구냐’고 묻는 것이다. 현대사회의 소통 부재를 단

적으로 드러내주는 것이면서 한편으로는 억눌렀던 소통부재의 상황을 고

백할 뻔 한다.

  타자로 명명된 자아는 이 사회에 도처에 산재해 있다. 익숙한 타자인

‘나’를 확인하는 순간 ‘나’는 타자가 되고 ‘타자’는 ‘나’가 되는 상황이라

는 것이다. 너와 나의 소통부재, 즉 소통을 간절히 원하지만 일방적인 몸짓

에 불과한 나의 외침은 현대 사회의 비극이다. 단 한 통의 전화로‘하마터

면 내가… 나도 모르는 내 전생을 말해버릴 뻔’할 정도의 간절한‘나’의 존

재는 유무를 떠나 절대 혼자서 존재가 생성되지 않는 것을 함의한다.

 

 

밤중에 전화를 걸어

누구세요

나더러 누구냐고 묻는다

그 목소리가 늦은 골목의 깊은 발자국처럼

빗물에 고인 불빛처럼 눅눅히 귓속으로 스며든다

전생을 묻는 듯

하마터면 내가 대답할 뻔 했다

나도 모르는 내 전생을 말해버릴 뻔 했다

그러나 그 질문에는 물음표가 없었으니

단 한번 묻고 침묵하는,

어쩌면 자궁 속에 부호를 두고 나온

달이 덜 찬 미숙의 질문이었을까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전화는 오지 않았다

다시는 누구냐고 묻지 않는다

유리창에 스며 든 산 그림자처럼

나도 그에게 스며들었던 것일까

그래서 내가 누군지

누구의 몇 번 째 생生인지 다 알아버린 것일까

밤마다 누군가에게 훔치듯 전화를 걸던

슬픈,

그 작은 물음표 같은 여자인 줄을

         - 이화은,「 물음표가 없는 질문」(《문학청춘》2010년봄호)

 

 

  아래의 시는 제사라는 의식 행위를 통해 내적 탐구를 지향한다. 화자의

눈에 비친 한 인간=어머니의 내면이 송두리째 비춰지고 있다. 여기서 어머

니로 명명된 ‘나’에서 ‘너’로 향하는 매개체가 미움이다. 그러나 이 ‘미움’

의 실상은 ‘사랑’이다. ‘ 나=어머니’는 한평생 사단칠정四端七情 오욕의 숱한

시간들을 견디면서 이제는 생의 극지점에 서서 자신과 맞닥뜨리고 있다.

제사상이라는 매개물 앞에서 ‘나=너’의 공식을 보인다. 여기선 ‘누군가’로

불리지만 ‘너’의 또 다른 이름임을 알 수 있다. 사랑과 미움은 손바닥의 앞

뒤 면이 아닌가. 뒤집으면 사랑이고 다시 뒤집으면 미움이다. 백수를 살면

서 손바닥 뒤집히는 일이 다반사였을 어머니는 ‘이젠 다 잊어베사 하주기

(이제는 모두 잊어버려야 하느니’의 제주지역 향토어)’라고 독백을 주문처

럼 되뇌고 있다. 숱한 일상을 살아오면서 벗어버리고 싶었던 오욕이 ‘잊어

버리’자고 다짐하지만 겨울밤 눈처럼 여전히 내 가슴에 쌓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섣달그믐의 늦은 밤 눈발 휘날리는 제사상에서 구태의연한 수식어는 모

두 벗어버리고 살아 기억되는 일이 있다면 그 기억을 채운 온갖 감정들과

행위들은 ‘빈그릇 부시’는 의식에 바쳐 오욕에 찌든 ‘너’를 잊어버리고 싶

다. ‘ 나’를비우고싶은것이다. 일상, 즉 삶의 끝은 비어야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 미워한다는 건

누군가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의 전제,

섣달그믐 늦은 밤바람이 음지쪽으로 기울고

일억만 년 전 만유인력의 무게에 눌려 침묵하던

말과 말들이 소떼처럼 일어나

겨울밤 깊은 잠 속에서도 되새김하는 시간

백수를 달리고 계신 구부정한 어머니,

방금 물린 제사상 빈 그릇 부시며 하시는 말

‘이젠 다 잊어베사 하주기’*

찢긴 창틈으로 시리도록 새어드는 눈, 눈, 눈,

눈이 먼 장독대 한쪽 끝

그 눈발 그녀의 가슴으로 쌓이고 녹고

또 쌓이고 녹아내리는데,

누군가를 지극히 사랑한다는 것은

더 이상 미워할 수 없기 때문인 것을.

    - 강중훈,「 눈 내리는 날 밤을 위해서」(《우리詩》2010년5월호)

 

 

  다음 시에서도 눈은 등장한다. 힘들었던 고비마다 눈발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 사흘밤낮 눈이 내렸’고 그 눈을 ‘가까스로 빠져나’온 화자는 힘든

일상 속 ‘휘어진 타이어자국’을 따라 왔다. 여기서 재미있는 부분은 ‘그리

하여’의 원인과 결과의 접속어이다. 매 연마다 앞에 원인을 두고 뒷부분에

결과를 두는 방식을 택했다는 것이다. 단순한 반복인 듯 보이지만 화자의

심경이 내면 깊숙이 탐색의 여정을 밟아나가는 것을 볼 수 있다. 한 대상을

투시하면서 직유를 도입, 아름다운 이미지를 끌어올린다. 일상에서 맞닥뜨

린 대상에 몰입하면서 내적 탐구에 이르는 길을 절묘하게 표출하고 있는데

가령 첫째 연의 ‘이 문장은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물소리’, 둘째 연의 ‘산

너머로 가라앉는 해를 끌어올리는 밧줄’, 셋째 연의 ‘아궁이 속으로 휘어지

는 불길’로 묘사되면서 내적 여정이 긍정의 길임을 암시하고 있다. 하지만

넷째 연에서 ‘흰 목에 칼날을 받은 듯 하염없이 떨리’고 있음으로 해서 마

지막 다섯 째 연에서 내적 탐구의 여정이 결코 순탄하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문득’이라는 부사어를 도입하여 잠시 잊었던 일상을 떠올리며 그 속에

놓여 있는 자아의 형상을 들여다 본다. 외롭고 쓸쓸하며 동전의 앞뒤처럼

교차되는 삶의 질곡을 벗어나지 못하고 어찌할 수 없어 한다. ‘ 이 지상 어

딘가에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을 찾아낼 줄 아는 화자는 아직은 일상의

한 가운데서 자아와 정면으로 대적하고 있다.

 

 

  사흘밤낮 눈이 내렸다 가까스로 눈밭을 빠져나간

  차량들, 아득하게 휘어진 타이어자국을 밟고 다리를 건너왔다 그리하여 이

문장은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물소리와 같고

 

  무심코 등을 돌리면, 공중을 날아가는 새들의 앞가슴을 환하게 빛내주는

저녁해가 있었다 그리하여 이 문장은

산 너머로 가라앉는 해를 끌어올리는 밧줄과 같고

 

  밤늦도록 책을 읽다 불을 지피면

  이 지상 어딘가에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이 있으리라 생각되었다 그리하여

이 문장은

  아궁이 속으로 휘어지는 불길 같은데,

 

  이른 아침 산책을 나서면, 눈 덮인 설악雪嶽의 공룡능선이 채찍처럼 누워

있었다

  물 밑에서 솟아오르는 돌고래 같았다 그리하여 이 문장은

  흰 목에 칼날을 받은 듯

  하염없이 떨리는데,

 

  문득 고개를 들면

  내 마음의 천산북로를 헤매는 눈보라, 그리하여

  적송들이 쩍쩍 갈라지고, 그렇게 그 겨울의 하루하루는

  방바닥의 머리카락을 쓸어 모아 불태우는 것으로 마감되곤 하였다

                        - 오정국,「 내설악 일기日記」(《우리詩》2010년5월호)

 

 

  눈은 일상에서 이제 흔한 소재가 되어 있다. 시인이면 한두 번 이상 눈을

소재로 시를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가 눈을 필요로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아니, 내적 탐구에 이르는 길에 눈만큼 요긴한 매개물이 없어서일 것

이다. 자연 현상이 일상에 깊이 개입하여 내면에 침잠한 불온함과 온갖 감

정의 찌꺼기들과 불편함, 넋두리를 승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눈

은 덩어리로 뭉쳐져 있다. ‘눈사람’과 마주한 화자의 정면 대응은 홀로 자

아를 불러내는 행위를 통해 ‘나’와 조우하고 있다. ‘너’로 표상되는 ‘눈사

람’은 실제 사람은 아니지만 아마도 만나자고 했던 사람을 떠나보낸 후의

슬픈 정경의 중심에 서 있다. 일상에서 문득 마주치는 ‘나’는 ‘너’라는 대

상을 만날 때 비로소 뚜렷해진다.

  이 시의 묘미는 심각한 상황임을 애써 감추려고 코믹한 연출을 자연스럽

게 연결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눈사람이라는 허구의 대상과 ‘등신거울’이

라는 매개물을 등장시켜 허깨비 같은 숫자를 늘린 후, ‘ 나=너’에게 나비넥

타이와 숯 검댕 수염을 그려 넣을 궁리를 한다는 발상은 자칫 이 시를 가볍

게 할 수 있다는 우려와 함께 ‘시간’을 도입함으로써 시의 무게를 제자리에

앉혀놓았다. 일상의 뒷면을 보는 듯한 ‘시계는 뒤통수를 보여주는 않는다’

는 제목이 자아의 내적 상황의 풍경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밥 한번 먹자던 사람, 끝내 소식 없는 날

눈사람과 저녁식사를 함께 했다

눈사람은 눈이면서 사람

사람이라는 말에 피가 도는 듯 따듯했다

세한도 속 내 그림자뿐인 저녁보다는 눈사람이라도 마주앉으니 훈훈했다

우리는 벽에 걸린 등신거울 들여다보며 눈을 맞췄다

거울 속 두 사람을 합치니 식솔이 넷으로 늘었다

헛제삿밥 앞에 둘러앉은 군식구처럼 킥킥 웃음이 새어나왔다

내일은 나비넥타이를 맬까? 숯 검댕 수염을 코밑에 그려볼까?

넷이 머리 맞댄 궁리하는 게 너무 뻔하고

싱거웠다

시계바늘은 제대로 돌아가는데 시간은 가지 않았다

시계가 뒤통수를 보여주지 않아서 맹춘孟春이 눈을 뜨지 못했다

       - 이영식,「 시계는 뒤통수를 보여주지 않는다」(《현대시학》2010년5월호)

 

 

  일상은 이제 화자에 의해 절반으로 쪼개지고 있다. 안과치료를 받기 전

까지 어둠이 이리도 가깝게 느껴지지 못했다는 고백으로도 들린다. 하루의

절반이 어둠이고, 세상의 절반이 어둠이고,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 곳곳 어

둠인데 미처 느끼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다. 빛의 등가물로서 어둠이라는

존재는 우리 몸의 일부처럼 늘 친숙하게 따라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란 쉽지 않다. 세상을 향한 창이 고장 나고서야 비로소 보이는 내 안의 어

둠은 화자의 ‘기억의 실뿌리’를 통해 그 존재를 인정받는다. 두 눈을 온전히

부릅뜰 때 보이지 않던 세상의 이면은 빛 속에 숨은 어둠의 또 다른 표현이

다. 한 쪽 눈을 감고서야 발견된 세상의 이면은 화자에게 뜻밖의 깨달음을

안겨준다. 어둠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는 화자의 행위가 ‘나=너’를 찾아가

는 여정이며 기억과 몸 깊이 감춰 논 어둠과 화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준

것은 아닐까.

  좋은 것도 좋지 않은 것도 반만 보인다는, 역설로 건너뛰고서야 만나는

어둠의 실체는 무엇일까? 아주 단순한 구도를 깊이 있게 끌고 간 시인의 역

동성이 우리의 의식 한 가운데 자리한 어둠은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어둠

이며, 낯익고 친숙한 어둠이라는 등식을 세우게 한다. 그리하여 결코 떼어

낼 수 없는 삶의 일부로써 받아들이게 하고 있는 것이다.

 

 

   안과 치료를 받았다. 한쪽 눈 때문에 두 눈을 감고 있어야 하는 동안 시

력을 잃으니 참 비겁해졌다 누군가 무엇인가 꽉 붙잡지 않으면 어둠은 불

행한 예감처럼 달려들고 그 어린 초록 나뭇잎들까지도 숨어서 나를 지켜보

는 관객이 되고 내가 묻는 말에도 세상은 어둠만으로 끄덕이고 시간은 낮

에서 밤의 일색으로 흘러만가고 발 디딜 때마다 움퍽움퍽 패이는 땀, 헛발

질 여러번에 정말 참 비겁해졌다

 

  꽃도 웃음도 우울도 반만 보이는 여기는 깊은 땅 속, 그동안 땅 속에 묻

어두었던 기억의 실뿌리들이 슬그머니 다가와 내 손을 잡는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기억의 사이 사이로 깜깜한 소실점을 맺는다 처음으로 어둠의 감정

으로 함께 희미해지며 어둠과 놀았다

 

  어둠의 절반을 베어내고도 사흘 동안 조금도 적막하지 않았다. 어둠이

모자라는 눈에다 안대를 하고 광화문을 지났다 건물도 반쪽은 어둠이었다

어둠이 어둠을 알아보고 있었다

                     - 최문자,「 절반의어둠」(《문학·선》2010년봄호)

 

 

  이제 일상이 오래 묵어 삶의 여정이 다 끝날 무렵이 된 어머니는 시인에

게 있어 언젠가 다다르고 만날 또 다른 자신의 모습으로 화化한다. 화자의

눈에 비친 ‘어머니’는 아직도 삶의 미련이 남았다. 그것은 ‘나’의 미련이기

도 하다. 현재의 자화상은 일상의 연속을 압축한다. 생의 극지점이 얼마 남

지않은형상이다. ‘ 잔치’라는 행위를 통해 살아온 날들을 희화화하고 구어

체적 언술을 통해 독자로 하여금 미소를 머금게 하며 시를 읽는 맛을 제공

한다. ‘ 떡국 칠십 그릇을 들으려도 장정 네댓 명은 필요하겄다’라는 재미있

는 언어구사를 보라. 매 년 한 그릇을 압축해 칠십 그릇을 한꺼번에 든다는

발상이 참신한 것이다.

  삶의 극지점은 누구나 가 닿을 곳이다. 그 여정의 신산함으로 하루하루

잊고 사는 것이 다반사다. 하지만 혈연일 때 삶의 극지점이 비로소 실감이

난다. 쭈글주글한 잔주름, 긴주름 사이에 끼어든 오욕의 삶은 ‘진실’로 표

상된다. 이는 미구에 만날 ‘나’의 모습이며 ‘너’의 모습이기도 하다. 숫자

칠십으로 매겨진 ‘나=너’의 도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구어체적 언술, 즉 이

야기 시의 형식으로 끌어오면서 훨씬 구수해졌다. 이렇게 가는 것이 일상

의 연속이며 연속적 일상의 서정화임을 확인하고 있다.

 

 

  칠순잔치는 뭐 하러 한다냐 늙었다고 동네방네 자랑헐 일 있냐 당최 안

할란다

  진달래꽃 피고 길 열리면 니 아부지랑 금강산이나 댕겨 올란다

  언제 이렇게 떡국을 묵어 부렀는지…떡국 칠십 그릇을 들으려도 장정 네

댓 명은

  필요하겄다

  이 얼굴에 잔주름 긴주름은 또 언제 떼거지로 왔는지 쭈글쭈글 청춘이

빠져나간

  곶감이로구나 곶감은 단맛이라도 있지 거짓말 못하는 애들도 놀라 뒤로

물러나는구나

  암만, 그것이 진실이지

  성모 마리아님이 오시면 손 내밀 준비는 되어 있다만 매급시 서럽고 눈

물나는구나

  안 그러려고 허는디도 자꾸 그래지는 것을 어쩔 것이냐

                          - 고미숙,「 칠순, 어머니」《( 우리詩》2010년4월호)

 

 

  위의 여섯 편의 시들은 각기 다른 내적 탐구의 도정을 보여준다. 시인이

시인이고자 함은 할 말과 쓸 말이 많기 때문이라 하지 않던가. 문학의 힘은

바로 여기서 기인된다. 자연과 사물과 어떤 대상에서 비롯되는 서정의 힘

과 교감은 감성의 촉수가 남다른 이에게서 실체를 이룬다. 시인의 세계관

이나 가치관까지는 아니어도 일상을 바라보는 ‘창’의 다양함을 살펴볼 수

있다. 형태적 특성도 특성이려니와 작품 곳곳에서 발견되는 내적 추구의

치열함 내지는 열중은 현실의 모습을 투영하기도 하고 미래의 자신을 견인

하기도 한다. 보이지 않는 시간 저쪽의 ‘나’와 닿지 않는 공간 저쪽의 ‘너’

가 합일되면서 오늘 하루도 힘차게 바퀴를 구른다. 때론 소외로 때론 비어

야 도달할 수 있기에 그 여정이 얼마나 신산한지에 대해서는 앞질러 갈 필

요는 없다.

  오늘 하루, 일상을 열면서 교감을 얻게 되는 대상을 만나는 것은 분명 행

운이다. 누구나 시인이 될 소질을 발현시킬 절호의 찬스이기 때문이다. 때

론 심각하게, 때론 우유부단하게, 때론 일과를 잠시 젖혀두고서라도 ‘나’를

찾아보는 것은 어떠한가?

 

 

 

 

  박해림

* 부산 출생

* 1996년『시와시학』신인상 당선으로 등단

* 2001년 서울신문, 부산일보 시조 당선

* 시집으로『실밥을 뜯으며』,『 눈 녹는 마른 숲에』,『 고요, 혹은 떨림』,

『 간지럼 타는 배』(동시집)

* 지용신인문학상, 이영도문학상 신인상 수상

* hlm21@naver.com

 

출처 / 우리詩 카페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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