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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 램프를 켜다

새로운 시간들을 위하여 / 황정산

by 丹野 2010. 7. 30.

 

 

  새로운 시간들을 위하여

 

 

                                                                   황 정 산

                                                   (문학평론가, 대전대학교 교수)

 

 

나호열,「 운동 후기」(《미네르바》2010년 봄호)

한옥순,「 첫사랑」(《우리詩》2010년 3월호)

정영선,「그 집에다 두고 왔다」(《(애지》2010년 봄호)

허금주,「 삼월」(《우리詩》2010년 3월호)

강가람,「 캣 우먼」(《미네르바》2010년 봄호)

최동은,「 웜홀」(《시안》2010년 봄호)

 

 

 

  현대사회를 사는 인간들의 가장 일반화된 정서를 흔히 권태라고 지적한

다. 상투화된 일상에 매몰되어 새로울 것도 특별할 것도 없는 시간들이 계

속되기에 현대인들은 숙명적으로 이 권태를 안고 산다. 그런 이유로 현대

인들은 말초적 감각을 자극하는 순간적 쾌락에 탐닉한다. 하지만 이 말초

적 쾌락에의 탐닉으로도 권태를 벗어날 수는 없다. 순간의 쾌락이 권태라

는 근본적인 현대사회의 특성을 바꾸지 못하기 때문이다.

  권태의 근원은 수치화된 시간에 있다. 근대 이후 우리 인간들의 모든 삶

은 수치화된 시간의 지배를 받는다. 정해진 시간에 따라 우리는 하루하루

를 살아야 하는 것은 물론 그 시간의 프로그램에 의해 일생을 살아야 한다.

거기에서 벗어나면 사회적 무능력자로 찍혀 사회에서 추방된다. 인간의 모

든 활동도 역시 수치화된 시간으로 평가된다. 사람들의 수입도 물건값도

모두 교환가치에 의해 가치평가된다. 그런데 그 교환가치는 사실 투여된

노동시간을 수치화한 것일 뿐이다. 그래서 인간이건 인간이 만들어낸 어떠

한 사물이건 모두 수치화된 시간이라는 가치로 평가된다. 인간은 연봉 얼

마짜리 인간이고 물건은 얼마짜리 상품으로만 존재한다.

  이렇게 추상화된 숫자로만 표기된 모든 존재들은 그 생생한 본래의 의미

를 보이지 못할 뿐 아니라 스스로도 그것을 망각하고 살 수밖에 없다. 이것

이 권태가 지배할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 사회의 근본적인 운명이다.

 

 

몸에서 화약 냄새가 지워지지 않는 것은

그해 시월 때문이다

놀이와 노동 사이에서 태어난 나는

늘 힘이 모자랐다

낙하하는 포탄의 작열과

가지에서 떨어지는 벚꽃의 아우성이

피와 살의 힘

나는 빗나간 화약으로 태어났던 것이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꽃들이 진 만큼

또 수 없이 많은 꽃들이 피어났던 까닭에

우리는 놀이와 노동의 근친을 잊었다

희미하게 남아있는 홍조 그 부끄러움은

무거운 짐을 나르는 한 사내의 불끈거리는

팔뚝의 힘줄을 볼 때 더하다

앞으로 밀고, 잡아당기고, 위로 올리고

걷고 뛰면서

나는 한 사내를 이기고 싶다

누가 노동이 자유롭게 한다고 했는가

짐승의 시간이 초식의 슬픔을 잘게 부술 때

땀은 화약 냄새를 짙게 풍긴다

 

지금 내가 들어 올리는 것은

0그램의 허무

깊은 날숨이다.

 

                     - 나호열,「 운동 후기」《( 미네르바》2010년봄호)

 

 

  자본주의적 근대 사회에서 권태가 만들어지는 이유를 생각해보게 하는

작품이다.“ 노동이 너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부제가 달려 있는데 이는 물론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걸려 있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우리

가 사는 세상이 이 수용소와 다를 바가 없다. 노동 역시 현대사회에서 인간

에게 강요된 사회적 규율이다. 이 노동을 통해 인간은 행복을 보장받는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노동은 놀이와의 관련을 잊어버리고 만다. 인간의

활동은 유용한 가치를 창조하면서도 그 자체가 기쁨이고 즐거움이어야 한

다. 그런데 현대 사회에서 노동은 오직 추상화된 시간으로만 환원되어 이

기쁨과 즐거움을 배제하고 만다. 노동이 힘든 고통이 되는 것은 이 때문이

다. 거기에 바로 권태가 만들어 진다. 시인은 이를 “0그램의 허무”라고 표

현하고 있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 권태를 벗어나 있는 단 하나의 존재는 예

술이다. 그것은 어느 정도 수치화된 시간이라는 교환가치의 질서에서 벗어

나 있기 때문이다. 팔리지 않는 시를 쓰면서 몇 날 며칠 밤을 지새우는 것

이 바로 이를 잘 말해준다. 때문에 예술은, 특히 시를 쓰는 일은 이 권태라

는 수치화된 시간 질서를 거부하는 일이고 시간을 생생한 새로움으로 환원

하는 일이다.

  다음 시에는 이 시간의 생생한 기억을 되찾고자 하는 시인의 고투가 잘

드러나 있다.

 

 

국민학교 6학년 봄이었던가 아니었던가

체육시간에 여자 애들과 왈츠를 배웠었던가

그 애의 가랑머리 끝이 내 가슴에 닿았었던가

그 애의 귀여운 덧니를 내가 보았었던가

그 애의 웃음이 너무 환해 잠깐 고갤 돌렸었던가

그 애가 그만 와락 울음 터뜨리며 달아났었던가

그 애의 뒤를 내가 곧장 따라갔었던가 아니었던가

그 애의 팔랑대는 치마 속을 내가 언뜻 보았었던가

그때 내 마음이 동동거렸었던가 아니었던가

졸업식 날 어색한 악수 나누며 서로 얼굴 붉히었었던가

편지 꼭 하자고 약속을 했었던가 아니었던가

그 애가 이사 가던 날 뻐꾸기가 울었었던가

그게 나의 첫사랑이었던가 아니었던가

 

나이 사 십에 처음 아파트 사서 이사 오던 날

엘리베이터에서 인사 나누던 앞 집 여자의 덧니를

내가 잘못 보았던가 아니면 어디서 보았었던가

그 날 밤 뒷산에서 뻐꾸기 울음소리가

들렸었던가 아니었던가

                   - 한옥순,「 첫사랑」(《 우리詩》2010년3월호)

 

 

  수치화된 시간의 교환가치로는 환원될 수 없는 가슴뛰는 경험의 순간을

시인은 회상하고 있다. 처음으로 왈츠를 배웠던 날 바라본 여자애의 모습

에서 첫사랑을 느꼈던 경험, 이사한 날 들었던 뻐꾸기 울음소리 이사오던

날 본 앞 집 여자의 얼굴 등은 사실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그것들은 어떤

가치도 만들어내지 못하기에 소용없고 무용한 것이다. 세상은 과거의 희미

한 옛사랑의 기억을 지우고 살림 잘하는 여자를 만나 살기를 원하고, 뒷산

뻐꾸기 울음 소리보다는 거실 한켠의 뻐꾸기 시계가 우리의 삶을 통제한다.

  그렇기에 시인이 자신의 경험을 떠올리는 것에 항상 ‘했던가 아니했던가’

라는 의문이 수반된다. 오래된 일이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권태로운 일상의

삶들이 그 최초의 생생한 기억을 끊임없이 지우고 망가뜨리기 때문이리라.

이 수치화된 시간의 풍화작용 속에서도 시인은 원래의 기억들을 더듬으려

노력하고 있다. 그 노력으로 시인은 팍팍한 일상을 견디고 있다. 지금 우리

시대에 시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말하면 너무 과도한 일반화일까?

다음 시를 보면서도 우리는 이와 비슷한 생각을 할 수 있다.

 

 

밤늦게 달그락, 그릇 씻은 후 정갈한 고요를 걸어두곤 했던

칠엽수를 두고 왔다

 

넓은 이파리에 후드득 빗방울 치면 도레미파 음계를 만들던

홈통을 두고 왔다

 

뜨개질한다고 쭉쭉 당겨 식구들을 감던 무지개실을 두고 왔다

 

잠자리 떼를 몰아가느라 학교에 늦은 아이를 서쪽 창가 햇빛화살

방패막이로 세워두고 왔다

 

피아노 치는 손가락을 타고 공상 속으로 가서 내리지 않는

여자애를 두고 왔다

 

한 손은 핸들을 잡고 다른 손에 올린 봉다리에서 소금이 새는 줄도 모르고

하염없이 자전거 페달을 돌리는 사내애를 두고 왔다

 

잎사귀에 힌 빗방울에 빗방울 굴러와 커진 물방울에

단발머리 아이의 첫 입학식 날 두근거림이 비치고

아이 기억에 화인을 찍던 젊은 엄마가 보이는

안방의 불이 오롯이 박힌 물방울 집을 두고 왔다

달디 단 아낀 시간들 위에

늦었다고, 빨리 하라고 악쓰던 소리들로 두텁게 덧칠해진 시간들을

뭉텅 가위질해 나무 아래 묻고 왔다

 

새 집에서 잠들었는데 벽지가 얼룩진 이전 집에서 깨어 문단속을 한다

                   - 정영선「, 그 집에다 두고 왔다」(《 애지》2010년봄호)

 

 

  이사를 한 경험을 시로 쓰고 있다. 보통 집을 새로 사 이사를 한다는 것

은 삶의 발전을 의미한다. 살림살이가 나아져 더 좋은 주거 환경을 마련했

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회의 발전은 사람들로 하여금 끝없이 이사를 하도

록 만들고 있다. 더 좋은 아파트 더 안락한 집을 만들어 그곳으로 이사해서

살도록 내몰고 있다. 분당이니 일신이니 하는 신도시가 다 이런 사회적 분

위기의 산물이다.

  하지만 그 이사를 통해 우리는 많은 소중한 것을 버리고 많은 아름다운

것을 잊어버리고 있다. 함께 지냈던 식물들, 옆집 여자애의 서툰 피아노 소

리, 천진한 동네 꼬마들 이런 것들이 사라지고 없는 새 집이 과연 행복할까

시인은 스스로 자문하고 있다. 그래서 시인은 꿈속에서나마 이전 집을 못

잊고 그 집의 문단속을 하고 있다.

  이렇게 발전과 더 나은 삶이라는 미몽이 우리에게 강요하는 삭막함이 바

로 권태의 근원적인 동인이 된다. 32평의 행복보다는 55평의 행복이 크다

는 믿음이 삶의 작은 계기들, 생생한 기쁨의 경험들을 모두 무화시키기 때

문이다.

  사람들이 봄을 기다리는 이유도 어쩌면 이 권태와 관련이 있다. 사실 봄

이라는 것은 계속 이어져 온 시간의 한 계기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매년

이 봄을 기다린다. 새로운 시간에의 기대 때문이다.

 

 

그는 오래된 꽃밭을 가지고 있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마악 연애를 하려는 총각아이

머리칼을 쓸어안은 소녀,

그 흔들리는 욕망을 피워내는

꽃나무 한 그루

꽃밭은 붉은 심장과 눈물방울, 뜨거운 입김

꽃잎과 살을 섞어

내 머리 위로 천천히 향기를 뿜으면서

열렸다 닫히는 가슴을 보여준다

여보세요, 아으 여보세요

망설이지 말고 나와의 사랑 이야기 살짝 섞어요

붉은 표지 시집 안에서

검은 잉크가 번지고

꽃잎들, 외마디 비명으로 꽃밭을 덮어 버린다

나는 저 꽃밭을 통과해야 한다

꽃 피는 육신이 아니어도

꽃밭에 쌓인 세월을 껴안을 수 있다면

꽃 필 수 있는 뿌리의 사랑으로 가 닿을 수 있다면

 

삼월을 앓는 꽃밭아

                 - 허금주,「 삼월」(《우리詩》2010년3월호)

 

 

  시인은 마지막에서 “삼월을 앓는 꽃밭”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왜 아파야

하는 것일까? 권태를 넘어서고 수치화된 시간을 통과하는 것이 힘든 일이

기때문이다.“ 마악 연애를 하려는 총각아이”와 같이 가슴 설레지만 자신의

욕망을 피워내고 자신의 가슴을 열어 보여주어야 하는 자기 갱신의 노력이

있지 않고는 도달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꽃은 특별함의 상징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특별한 날 꽃으로 장식을 한

다. 생일, 기념일 더 나아가 장례식에서까지 꽃은 특별한 시간의 표현이 된

다. 그런데 시인은 우리 모두는 이 꽃을 가꾸는 꽃밭이라고 생각한다. 상투

화된 일상의 권태 속에서 그 꽃을 보지 못하더라도 자신을 열어 그 꽃을 피

우기를 갈망한다. 시인은 그것이 사랑의 힘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사랑이

야말로 권태를 이기고 상투화된 시간의 압박을 무화시키는 가장 강력한 에

너지원일 것이다.

  다음 시는 권태를 이기는 또 다른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태양을 포식하고 도착한 구름이

웅덩이에 누워있는 달을 핥고 있는 밤 

 

광장 시계탑 위에서

석류알 터지듯 물오른 울음을 터뜨리고 있어요

 

… (중략) …

 

그건 구름언덕의 밤을 위해 지퍼를 채운 아랫도리의 표정이 촛농처럼

흘러내고 있었던 것

 

한 줄의 섹스에

여러 가지 체위의 주석을 다는 사이코패스들 표정은 만지면 쉬 부서지고

말지요

 

비린 연애 같은 목소리로 나비야 나비야 고집스럽게 쫓아오는 바람

할머니가 잠든 콘크리트 담장을 살포시 넘고

문틈 사이로 안개 같은 숨소리

 

아홉 번 죽었다가 환생한 할머니 어둠에 온 몸 비비고 돌아온 비린 혓바

닥으로

당신의 굽은 등을 핥아드릴까요

                             - 강가람,「 캣우먼」(《미네르바》2010년봄호)

 

 

  시인은 스스로를 담을 타넘어 어둠을 넘나드는 캣 우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밤은 권태의 상징인 대낮과는 반대의 시간이다. 모든 것이 명징한 대

낮은 수치화된 합리성의 시간이다. 《이방인》의 뫼르소가 살인을 저지르고

이상의《날개》주인공이 날개의 흔적을 찾아보려고 한 시간도 모두 이 한낮

의 정점 정오라는 시간이다. 시인은 이 낮을 피해 밤에만 환생하는 존재가

되고 싶어한다. 그것은 권태가 지배하지 못하여 욕망이 살아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사실 근대 이후에 밤은 지워진 시간이다. 이 시간을 지우지 않기

위해 대낮같이 불을 밝힌다. 그러기에 현대문명은 밤을 잊은 문명이기도

하다. 시인은 이 밤의 역사를 되돌리고 싶어한다. 캣 우먼이 되어 아니 담

을 타넘는 도둑고양이라도 되어 시인은 이 밤 시간을 만끽하고자 한다. 그

것은 “한줄의 섹스에/ 여러가지 주석을 다는” 일이기도 하다. 또한 그것이

대낮의 권태를 넘어서는 또 하나의 방법이라는 것을 시인은 깨닫고 있다.

“당신의 굽은 등을 핥아드릴까요”라는 마지막 구절이 이를 잘 말해준다. 굽

은 등은 수치화된 시간의 압박, 다시 말해 노동의 억압을 가장 보여주는 말

이다. 그것을 위로하고 치료하는 것은 밤의 요정인 캣 우먼의 혓바닥이다.

또한 그것은 시이고 그 시를 말하는 시인의 혀이기도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태를 넘어서 새로운 시간을 맞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다음 시는 이 권태와 새로운 시간 사이의 건너기 힘든 좁은

길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보도블럭 사이 흘러내린 빗방울이 방금 떠나온 거기

산당화 꽃잎이 붉은 가시를 뽑아내던 거기

내 눈동자와 네 눈동자가 함께 쳐다보던 거기

얼음벼락이 떨어져 한 소리를 머물던 거기

죽은 몸이 사라지는 순간 또 한 몸이 일어나던 거기

한 마리 새가 공중돌기 하다 나뭇잎 하나로 떨어지던 거기

눈먼 자들의 눈꺼풀 속 어둠이 뛰쳐나와 펄떡거리던 거기

어미 몸을 떠난 아이 엉덩이에 푸른 멍자국이 새겨진 거기

배추벌레가 겹겹 허물을 벗고 연둣빛 몸으로 기어가는 거기

일란성 쌍둥이가 나를 행햐 걸어오고 있는 삼나무 길 거기

                       - 최동은,「 웜홀」(《 시안》2010년봄호)

 

 

  이 시의 제목 웜홀은 두 시공간이나 동일 시공간의 두 곳을 잇는 좁은 통

로를 말한다. 그것은 권태에서 새로운 시간으로 건너가는 통로이기도 하

다. 그런데 그것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그래

서 무용할 것 같은 사물과 생명들의 사소한 움직임이고 그 시간들이다. 이

렇게 사물의 생생함을 다시 불러내는 언어의 힘이 바로 권태의 치료약이

다. 그래서 오늘도 수많은 시인들이 이 봄밤 시를 쓰고 있다.

 

 

 

 

      황정산 시인

   * 고려대 불문학과 졸업

   * 고려대 대학원 국문학과 졸업(문학박사)

* 1992년《창작과비평》으로 평론 등단

* 2002년《현대시문학》으로 시 등단

*《정신과표현》으로 시와 수필 등단

* 현재 대전대학교 교수

* 저서로는『작가론 총서 김수영(2003)』

『쉽게 쓴 문학의 이해(2000)』

『주변에서 글쓰기(2000)』

『한국현대시의 운율론적 연구(1998)』

* rivertel@hanmail.net

 

 출처 / 우리詩 카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