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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 램프를 켜다

허공의 무위無爲 / 김신영

by 丹野 2010. 7. 30.

 

 

 

 허공의 무위無爲

 

 

                                                                                                 김 신 영 (시인·문학박사)

        

 

  

전건호,「 슬픈 묘지」(《열린시학》2010년봄호)

송재학,「 공중」(《문학동네》2009년겨울호)

심보선,「 필요한 것들」(《문학과사회》2010년봄호)

임동윤,「 와온의 불빛」(《우리詩》2010년4월호)

정재학,「 공모共謀」(《창작과비평》2010년봄호)

 

 

 

  흔히 허공은 비어 있는 것으로 아무것도 없는 공간을 일컫는다. 반면 허

공을 역발상적으로 생각해보면 무엇이라도 채울 수 있는 곳으로 이해할 수

도 있다. 어떤 것을 하든 채워야 하는 공간으로서의 의미이다. 죽음의 의미

나 무덤의 공간은 허공으로 그 의미를 가지기도 하지만 무엇인가를 채운 것

이기도 하다. 여기에 수록한 시편들은 그러한 점에 관심을 가진 시들이다.

  무위無爲는 여러 의미를 가지고 있다. 불교적으로는 열반에 다름 아닌 또

다른 용어이다. 즉 무위란 불교에서, 여러 가지 원인·인연에 의해 생성되

는 것이 아닌 존재(asam skrta)를 말하는데 시간적인 생멸변화生滅變化를

초월하는 상주常住, 절대의 진실로, 열반涅槃의 이명異名으로도 사용된다. 이

는 허공과 유사한 면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허공은 무위이다. 어느

것으로도 인연이나 근본을 갖지 않은 존재이고 이 존재는 결국 열반한 존

재를 말한다. 그러므로 열반은 무위이자 허공인 것이다.

  현대인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의미를 만들고자 노력한다. 그러한 의미

는 사람뿐 아니라 자연도 마찬가지이다. 계절적으로 봄인 지금은 생동의

계절인데, 온갖 사물들이 세계와 인연을 맺고 뿌리를 내리며 솟아오르는

때이다. 바야흐로 난만한 꽃빛이 만발하여 세계는 화란춘성和蘭春城하고 만

화방창萬化方暢이다. 봄빛이 허공을 향하여 갖은 빛을 뿌리니 세상은 아름다

움으로 가득하다. 결국 허공에 뿌리내리는 기화요초들까지 합하여 세상은

오색으로 가득 찼다. 그러나 허공을 메울 수는 없다. 허공에 자리잡은 무덤

을 허물 수도 없다.

 

 

  단풍나무 아래 세워둔 차가 밤새 무덤으로 변했다/ 단풍에 덮인/

  불같이 살다간 어제의 내 묘지/ 저 집을 짊어지고/

  비탈길 오르내리던 나는 달팽이의 유령인가/ 난 바다를 표류하다/

  밤새 무덤이 되어버린 집앞에 선/ 달팽이가 되어/

  꽃잎 단장한 무덤을 어루만진다/ 꿈에서 깨어보니/

  집이란 게 본시 나를 묻어야할 무덤

  어제 묻혔던 봉분을 열자 풀썩 내려앉는 공기

  덥수룩한 얼굴 창백하다/ 웃음 몇 조각 붙어있는 입가에/

  거친 숨소리 이마에 고랑을 판다/ 교묘하게 뿌리내린 머리카락/

  헝클어져 엉킨다/ 기도를 막는 미완성의 시어들/

  화사처럼 목을 휘감는다/ 미라에 몸을 포개자 저절로 걸리는 시동/

  달팽이 걸음으로 달리는 차창에/ 새떼같이 날아드는 단풍/

  멈추는 순간/ 무덤이 되어버릴 집을 짊어지고/

  안개 속 질주를 한다

                    - 전건호, 「 슬픈 묘지」(《열린시학》2010년봄호)

 

 

  삶에서 소중한 것이라 여긴 필수품인 자동차가 단풍나무 아래에서 무덤

으로 변했다. 단풍잎들에 둘러싸인 차의 모습은 아름다웠을 것이나 시인은

그것을 무덤이라 지칭하고 있다. 무덤은 인생의 종언을 실현시키는 곳이

다. 또한 무덤은 단풍처럼 화려한 것들로 싸여서 덮여 있다. 그것을 보고

시인은 ‘불같이 살다간 어제의 내 묘지’라고 표현한다. 삶속에서 필수적으

로 항상 타고 다녔던 자동차가 어제의 묘지인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에 이

르자 자동차만 무덤이 아니라 집도 무덤으로 연상된다. 이제껏 자신이 살

아온 길이 비탈길을 오르내리며 ‘저 집’인 자동차를 짊어지고 다녔다는 것

을 인식한다. 달팽이처럼 집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그것을 보니 거친 한숨이 나오고 이마에 주름이 깊어진다.

  자동차를 열고 시동을 거는 것도 ‘미라에 몸을 포개’는 행위로 묘사되고

자신이 하는 일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만다. 자동차가 멈추면 ‘무덤이 되어

버릴 집’을 짊어지고 안개 속 질주를 하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이 시는 결국 우리가 가진 것들이 그대로 ‘슬픈 묘지’임을 천명한다.

  우리가 가진 것들이 허공이며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멋진 자동차를 갖고 있지만 그것은 무덤이며, 그 만큼의 무게만큼을 짊어

지고 비탈길을 오르는 행위인 것이다.

 

 

  허공이라 생각했다 색이 없다고 믿었다 빈 곳에서 온 곤줄박이 한 마

리 창가에 와서 앉았다 할딱거리고 있다 비 젖어 바들바들 떨고 있다 내

손바닥에 올려놓으니 허공이라 가끔 연약하구나 회색 깃털과 더불어 뒷

목과 배는 갈색이다 검은 부리와 흰 뺨의 영혼이다 공중에서 묻혀온, 공

중이 묻혀준 색깔이라 생각했다 깃털의 문양이 보호색이니까 그건 허공

의 입김이라 생각했다 박새는 갈필을 따라 날아다니다가 내 창가에서 허

공의 날숨을 내고 있다 허공의 색을 찾아보려면 새의 숫자를 셈하면 되

겠다. 허공은 아마도 추상파의 쥐수염올 가졌을 것이다 일몰 무렵 평사

낙안의 발묵이 번진다. 짐작하자면 공중의 아마 일가一家들은 모든 새의

울음에 나누어 서식하고 있을 게다 공중이 텅 비어 보이는 것도 색 일가

一家들이 모든 새의 깃털로 바빴기 때문이다 희고 바래긴 했지만 낮달도

선염법渲染法을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공중이 비워지면서 허공을 실천중

이라면, 허공래 가우리가 갖추었다 할 것들이 있다 바람결 따라 허공 한

줌 움켜쥐자 내 손바닥을 칠갑하는 색깔들, 오늘 공중의 안감을 보고 만

졌다 공중의 문명이라 곤줄박이의 개체수이다 새점을 배워야겠다

                           - 송재학,「 공중」(《문학동네》2009년겨울호)

 

 

  곤줄박이와 박새라는 작은 새를 소재로 하여 ‘허공’을 노래한 이 시는 새

의 모양새를 보고 허공의 세계를 읽는다. 색이 없다고 믿었던 곳에 곤줄박

이가 있었는데 곤줄박이는 시에서도 주지하듯이 회색 깃털과 갈색의 뒷목

과 배, 검은 부리와 흰 뺨이 두드러지는 새이다. 시인은 곤줄박이의 이러한

연약한 모습을 보고 그것이 그러한 영혼을 가졌다고 표현한다. 이는 공중

에서 묻혀온 색이라 여긴다. 그러므로 허공이라 생각했던 곳에서 날아온

곤줄박이의 빛깔을 통해서 시인은 허공이 가진 색을 알게 된다. 그것이 곤

줄박이의 보호색이며 허공의 입김인 것이다. 박새는 가는 대로 글을 쓰는

새로 묘사한다. 창가에서 허공을 숨쉬고 있는 그 새는 한 마리가 아니다.

허공을 가르며 글을 쓰는 그 새의 숫자를 보고 시인은 숫자를 셈하면 되겠

다는 가능성을 깨닫는다.

  허공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공간이나 이제 시인은 새들의 비행과

몸짓을 보고 그곳의 빛깔과 수를 익히게 되었다. 그곳은 낮달도 쥐수염 붓

으로 ‘선염법’을 익히는 공간인데 일몰에 평사낙안인 아름다운 글씨나 여

인의 맵시를 통해서 발묵의 기법으로 번진 것이다. 이는 또한 새들의 소리

가 서로 울음을 나누어 서식하는 공간이다. 그러면서 공중이 비워지는 것

인데 공중이 비워지는 것은 허공을 실천하는 것이 된다. 허공에는 결국 곤

줄박이의 색깔과 새들의 숫자가 있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시인은 새점을 배우려 한다. 새가 절대적인 영험을 가진 존재로 새에게서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찾고자 하는 것이다.

 

 

  나에게는 6일이 필요하다/ 안식일을 제외한 나머지 나날이 필요하다/

  물론 너의 손이 필요하다/ 너의 손바닥은 신비의 작은 놀이터이니까/

  미래의 조각난 부분을 채워 넣을/ 머나먼 거리가 필요하다/

  네가 하나의 점이 됐을 때 비로소/ 우리는 단 한 발짝 떨어진 셈이니까/

  수수께끼로 남은 과거가 필요하다/ 만약 그래야만 한다면/

  모든 것이 이해되는/ 단 한순간이 필요하다/

  그 한순간 드넓은 허무와 접한/ 생각의 기나긴 연안이 필요하다/

  말들은 우리에게서 달아났다/ 입맞춤에는 깊은 침묵을/

  웅덩이에는 짙은 어둠을/ 남겨둔 채/

  더 이상 말벗이기를 그친 우리……/ 간혹 오후는 호우를 뿌렸다/

  어느 것은 젖었고 어느 것은 죽었고/ 어느 것은 살았다/

  그 어느 것도 아니었던 우리……/ 항상 나중에 오는 발걸음들이 필요하다/

  오직 나중에 오는 발걸음만이 필요하다/ 바로 그것, 그것이, 아닌,/

  아무것도 아닌, 아무것인,/ 모든 것이……

                       - 심보선, 「 필요한 것들」(《문학과사회》2010년봄호)

 

 

  허공과 반대되는 의미를 찾는다면 채워진 것들을 의미할 것이다. 이는

인간에게 ‘필요’라는 것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 6일’이 필요하다고 표현되

는데 이는 채워진 것들이라 할 수 있다. 허공이 아니라 무엇인가로 채워야

하는 시간이다. 이 시간들은 생의 욕구들로 바쁜 시간이다. 그러기에 ‘너의

손’이 필요하기도 하다. 너의 도움이 있어야 하는 까닭은 너의 손바닥이 작

은 놀이터이기 때문이다. 또한 다른 것들도 채워야 하는데 이는 조각난 미

래 때문이다. 조각난 미래를 채우기 위해서는 머나먼 거리라는 막연한 공

간이 필요하다. 이렇게 필요한 것들이 모여 결국은 드넓은 허무와 접한 생

각의 ‘기나긴 연안’이 또 필요해진다. ‘ 말’은 사람들에게서 달아났고 침묵

과 어둠을 남겨두고 더 이상 말을 하지 않는 사이가 된다.

  현대인들은 말벗이 되기를 거부한다. 그것은 허공이다. 무위이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이기도 하지만 모든 것이기도 한 ‘필요’는 결국 허공이며 무위

이다. 허공이 가진 것이기도 하며 아무것도 아닌 것이기도 하며 열반에 드

는 것이기도 하며 것과도 인연이 없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짱둥어 여린 몸짓에도 놀라지 않으려면

  누구나 가볍게 귀를 열어 놓고 살아야 한다

  물안개 스멀스멀 일어서는 저녁/ 바지런히 갯벌을 경작하는 농게, 칠게들/

  마른 갈대들과 어울려 일가를 이루고 산다

  흑두루미, 저어새 혹부리오리들/ 노닐다 돌아가는 봄날까지 갯벌에는/

  길이 열리고 갈대숲엔 노을이 곱다

  와온, 말 그대로 따갑게 누울 수 있는 곳

  흔들려선 안 돼, 이대로 몸 눕혀서는/ 허리가 꺾여도 갈대들은 눕지 않는다/

  스스로 울음을 삼키며/ 짱둥어에게 아랫도리를 내어준다/

  먼 바다 숭어 떼들이 돌아오고/ 검은머리 갈매기가 먹줄을 긋고 가면/

  어느새 집집마다 정박하는 겨울/ 고막잡이배들은 돌아오지 않고/

  갯벌에 몸 묻어서는 안 돼/ 끝끝내 소리치는 사람들, 오랜 뚝심이다/

  가로등과 배 몇 척이 전부인, 그러나/ 아직 등불은 켜지지 않았다/

  꼬막 고르던 사람들 돌아가고/ 굴뚝마다 밥 짓는 연기 피어오르기까지/

  불씨는 좀체 꺼지지 않을 것이다

  마침내 저만치서 집집의 불이 들어오고 있다

                         - 임동윤, 「 와온의 불빛」(《우리詩》2010년4월호)

 

 

  세상의 따뜻한 것들에 놀라지 않으려면 가볍게 귀를 열어놓고 살아야 한

다고 시인은 충고한다. 귀를 열어 놓고 산다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세상의

모든 것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며 삼라만상의 소리에 관심을 갖는 것을 말

한다. 삼라만상은 바닷가의 생물들은 가족처럼 어울려 일가를 이루고 산

다. 그러자 갯벌에는 길이 열리고 갈대숲은 아름다운 노을이 나타난다. 마

치 상상속의 세계처럼 이 공간은 서로의 공존으로 해를 입는 것들은 보이

지 않는다.

  상생의 몸짓으로 세상은 아름다운 빛으로 가득한 것이다. 그곳은 ‘와온’

이며 따뜻하게 몸을 누일 수 있는 곳이다. 그곳에서는 흔들리지 않아도 되

며 갈대들은 허리가 꺾여도 문제가 없다. 스스로 울음을 삼키던 갈대들은

이제 허리가 꺾여도 눕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이 공간은 먼 바다 숭어 떼

들이 돌아오는 곳이며, 집집마다 정박할 수 있는 공간이며, 곧 불이 들어오

며 굴뚝마다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불씨가 꺼지지 않는 곳이다.

  모두가 부족함 없이 살아가는 이 공간은 이상적인 공간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공간에서의 자족은 허공을 채운 의미로 연결된다. 허공은 따뜻하고

부족함이 없는 것으로 채워져 사람들이 살아가기에 넉넉한 공간이 된다.

  이러한 자족에 이를 수 있는 것도 무위라 할 수 있다. 열반의 세계로 연

결되는 무위는 속된 것이 아니라 이상적인 것으로 채워진 공간인 것이다.

 

 

  죽은 지 이틀 만에 시체에서 머리카락이 갈대만큼 자라 있었다 나와

그림자들은 시체를 자루에 싸서 조심조심 옮겼다 그림자 하나가 울컥했

다 죽이려고까지 했던 건 아닌데… 나머지 그림자들이 그를 달랬다 그러

지 않았다면 네가 죽었을 거야 차 트렁크 열고 시동 좀 걸어놔 간신히 1

층까지 왔는데 아파트 현관 앞에 순찰중인 경찰이 보였다 이게 무엇입니

까? 하필이면 자루가 찢어져 그의 멍든 허벅지 살이 드러났다 하하 이건

고구마입니다 우리는 서둘러 트렁크에 실으려 했다 한번 확인해 봐도 되

겠습니까? 그림자 하나가 칼이 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옆의 그림자가

그의 팔을 잡았다 네 그렇게 하시지요 우리는 자루를 펴보였다 자루 안

에는 지푸라기와 고구마가 가득했다 경찰관과 우리는 미소를 지었다 고

구마 하나가 김이 모락모락 났다 방금 찐 고구마인데 하나 드셔보시겠습

니까? 그럴까요 네 고맙습니다 경찰관이 고구마를 한입 물자 썩은 피가

뿜어져 나왔다

                       - 정재학, 「 공모共謀」(《창작과비평》2010년봄호)

 

 

  죽음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살아 있던 흔적들이다. 이 흔적은 때로 죽어

서도 살아있는 모습을 드러낸다. ‘죽은 지 이틀 만에 시체에서 머리카락이

갈대’처럼 자라나 있다. 죽었는데도 왕성하게 살아있는 시체의 모습이다.

그 시체를 자루에 싸서 그림자와 함께 옮기고 있는 자아는 자신의 잘못으

로 죽은 것이 아닌지 자책감에 시달리는데 그림자들이 그를 감싸고돌며 합

리화한다. 그런데 돌연 경찰관이 나타나 그 자루의 내용물에 관심을 갖는

다. 이때 화자는 살인이라는 엄청난 행위를 합리화하기 위해 ‘고구마’라고

둘러대는데 어이없게도 자루 속에 든 것은 시체가 아니라 진짜 고구마로

표현된다. 경찰관은 시체를 본 것이 아니라 고구마를 본 것이 되는 것이다.

심리현상 중에 자기가 생각한대로 보이는 현상이 있다. 이러한 현상은 실

제와 똑 같아서 거의 구분할 수 없는 것처럼 여겨지고 사실과 심리현상 중

무엇이 진실인지 파악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로써 살인을 저질렀던 사

람은 자신을 합리화하고 양심의 가책에서 벗어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잘못

을 잊기까지 하는 것이다.

  결국 고구마를 확인한 경찰은 이를 묵인하고 자신은 고구마를 한입 베어

물기까지 한다. 그러나 결국 진실은 밝혀지는 것이어서 그가 한입 베어물

자 썩은 피가 뿜어져 나오고야 만다. 하나의 스토리 같은 이 시는 현실과

상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현상을 꼬집고 있다. ‘ 공모’라는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경찰관도 고구마를 본 것이며 그도 시체를 옮기는 일에 가담하는

죄를 저지르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로써 죽음은 허공이 아닌 사건으로 변

화를 시도하고 있다. 죽음이 커다란 사건이 되어 무서운 현실을 만들어낸

것이다.

  위에서 여러 편의 시를 통해 살펴본 바대로 허공은 필요를 의미하며 필

요는 또한 허공을 의미하기도 한다. 인생에 집착과 몰입을 통해 이루고자

한 것들이 결국 열반이며 무위가 되는 것이다. 때로 허공에서 흘러나오는

색과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물론 인생을 통하여 필요에 의해 집착과

몰입을 하는 것도 열반인 것이다.

 

 

 

 

  김신영 시인

* 1994년《동서문학》신인상으로 등단

* 시집『화려한 망사버섯의 정원』,『 불혹의 묵시록』

* 평론집『현대시, 그 오래된 미래』

* 중앙대 국문과 문학박사, 홍익대 강사

 

출처 / 우리詩 카페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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