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취의 시학
- 보들레르를 중심으로
박 철 화 (문학평론가, 중앙대 교수)
디오니소스 신화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서양의 역사에서도 술은 아주 오랜 전통을 갖고 있다. 그 전통은 문화예술사에서는 더욱 두드러진다. 명징하고 냉철한 의식으로 조화와 균형을 중시한 아폴론적인 전통에 못지않게, 열정과 영감을 높이 평가하여 제한 없이 자아를 분출하고자 했던 디오니소스적 전통이 서양의 문화예술사를 수놓고 있기 때문이다. 이 무늬는 특히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에 이르러 마치 마법처럼 화려한 꽃을 피운다. 실제 작품은 물론이고, 그에 대한 미학적 고찰까지 더해지면서 술은 현대의 문학예술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공동체를 이루게 된 것이다. 세계와 인간에 대한 성찰을 존재이유로 갖는 문학예술이 현재에 함몰되지 않고 그 너머로 나아가기 위한 주요한 에너지로서 말이다.
그 가장 뚜렷한 증거가 바로 『악의 꽃』의 시인 보들레르다. 그 자신 현대시의 기원이 된 이 시집의 한 장을 술에 바치면서 다섯 편의 시를 남기는 것은 물론이고, 『인공낙원』을 포함한 글 곳곳에서 술 자체에 대한 고찰은 물론이려니와 술로 빚어진 풍경을 그려 보이고 있다. 현재의 우울을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어딘가 도취할 곳을 찾던 보들레르에게 술은 그만큼 절실한 유혹이었다.
항상 취해 있어야 한다. 핵심은 바로 거기에 있다. 취하는 일이야말로 그대의 어깨를 짓누르고 그대의 허리를 땅으로 굽게 하는 무서운 시간의 중압을 느끼지 않기 위한 유일의 과제이다. 쉬지 않고 취해야한다.
무엇으로? 술, 시 혹은 도덕, 당신의 취향에 따라. 하여간 취하라.
그리하여 당신이 때로 고궁의 계단이나 도랑의 푸른 잔디 위에서, 또는 당신 방의 삭막한 고독 속에서 취기가 이미 줄었든가, 아주 가 버린 상태에서 깨어난다면 물어보시오. 바람에게, 물결에게, 별에게, 새에게, 벽시계에게, 달아나는 모든 것, 탄식하는 모든 것, 구르는 모든 것, 노래하는 모든 것, 말하는 모든 것에게 물으라. 지금 몇 시냐고? 그러면 바람은, 별은, 새는, 벽시계는 대답하리. 지금은 취할 시간이다! 당신이 시간의 학대받는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취하라! 쉬지 말고 취하라! 술로, 시로 또는 도덕으로, 당신의 취향에 따라.
- 「취하시오!」 전문
이 산문시는 보들레르의 이상향인 도취의 세계가 술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물론 문제는 남는다. 취하는 일이 술만의 영역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면 무엇으로 취할 것인가?
보들레르는 문학이 하나의 마법magic이라고 말한 바 있다. 물론 이 표현이 전적으로 보들레르만의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적어도 낭만주의 이후 문학예술은 알게 모르게 현실과 이상 사이의 거리를 뛰어넘어 매혹적인 세계로 이르는 마술을 꿈꾸어왔기 때문이다. 거기서 예술가와 독자가 소통하며 하나가 되는 순간이야말로 문학예술의 궁극적인 존재이유라고 그들은 생각하였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보들레르 자신이 그 마법을 두 가지로 구분한다는 것이다. 하나는 하얀 마법이며, 다른 하나는 검은 마법이다. 위에서 인용한 시와 관련하여 설명하자면, 시와 도덕으로 취하는 것은 하얀 마법이 될 것이고, 술이나 마약으로 취하는 것은 검은 마법이 된다. 선악을 초월한 절대적 미를 찾으려 했던 보들레르라 조심스럽긴 하지만 적어도 여기서 하얀 마술은 긍정적인 것이며, 검은 마술이 부정적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그 점 『인공낙원』에서의 다음과 같은 진술이 잘 증명하고 있다.
결코 금식도, 기도도 하지 않았고, 스스로 일하여 구원을 얻으려 하지 않던 이 불행한 사람들은 검은 마법의 힘을 빌려 단번에 초자연적 존재로 올라가는 방법을 구한다. 하지만 마법은 그들을 속이고, 그들을 거짓 행복으로 유인하며 거짓된 불을 켠다. 반면 우리 시인과 철학자들은 끊임없이 일하고 명상하여 우리의 영혼에 새로운 삶의 빛을 던져준다. 꾸준히 의지를 단련시키고 마음을 고결하게 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참된 아름다우의 정원을 마련해주었다. 믿음이 산을 움직인다는 말을 믿으면서 신이 우리에게 사용하도록 허락한 유일한 기적을 성취한 것이다.
보들레르는 여기서 환각 속에서 거짓 도취에 시달리는 대중과 진정한 도취에 다다르는 시인을 구별하고자 한다. 그러한 분별은 보들레르 스스로 술과 마약의 폐해를 뼈저리게 겪었다는 데서 온다. 술과 마약을 통해 얻는 순간의 황홀경은 신기루와 같은 것이며, 오히려 깨어난 뒤에는 더 커다란 허무와 무기력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들레르는 잘 알고 있었다.
더구나 시 쓰기에 있어 낭만적 영감을 거부하고 고전적 명징함과 냉철한 의식을 높이 평가한 그로서는 술이 가져올 감정의 과장을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자아의 과도한 발현은 적절하게 제어될 때만 아름답다는 것이 보들레르와 다른 낭만주의 시인들을 가르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그에게 있어서 낭만적 자아의 확산은 반드시 그 자아의 또 다른 집중을 필요로 한다. 술은 그런 점에서 위험한 유혹이다. 인간이 기필코 돌아가야 할 도취의 낙원을 순간적인 환각으로 보여줄 수는 있지만, 자아를 파괴시킴으로써 그 환각을 지속적인 것으로 만드는 일에는 성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진정한 예술은 도취의 낙원, 즉 인공낙원을 가능케 한다고 보들레르는 믿었다. 물론 그때의 낙원 또한 순간적이라는 차원에서는 환각일 수 있지만, 그것은 반복되며 되살아날 가능성을 지닌다는 차원에서 더 이상 덧없는 환각이 아니다. 실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 점은 보들레르의 시적 계승자인 발레리가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한편의 시란 언어로써 시적 상태를 산출하는 일종의 기계다 보들레르나 발레리에 따르면, 낭만적 열광은 시인의 심경이 아니며, 자신의 꿈을 그리려 하는 자는 오히려 명철하게 깨어있어야만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술과 하나로 엮인다. 술은 현재의 너머로 가는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오늘은 천지가 찬란하구나!
재갈도 박차고 고삐도 없이,
술 위에 걸터타고 떠나들 가자
거룩한 선경(仙境)의 하늘을 향해!
끈덕지게 달라붙는 환각에
시달리는 두 천사와 같이,
맑고 푸른 아침을 뚫고
아득한 신기루 따라서 가자!
슬기로운 회오리바람의
날개 위에 둥실둥실 흔들리면서,
너도 나도 다 같이 무아경 속에,
누이여 나란히 헤엄쳐 가자,
한시도 쉬지 말고 날아서 가자
꿈속에 그리던 낙원을 향해!
-「연인끼리의 술」 전문
보들레르는 이미 『악의 꽃』 1부에 해당하는 우울과 이상 시편의 「여행에의 초대」를 통해 누이를 부른 적이 있다. 여기서도 다시 한번 누이를 불러, 그것이 비록 아득한 신기루일지도 모르지만 꿈속에 그리던 낙원을 향해 가자고 초대한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 너도 나도 다 같이 무아경 속에 빠질 수 있는 술이 필요한 것이다.
어느 날 저녁, 술의 영혼이 병 속에서 노래하기를
인간이여, 오 친애하는 낙오자여, 나 그대에게
내 유리의 감옥과 주홍빛 봉랍(封蠟) 아래서
빛과 우애로 가득 찬 노래를 들려주련다!
나는 아나니 내 목숨 낳고, 나에게 얼을 넣기 위해선,
불타오르는 언덕 위에서 얼마나 많은 노고와 땀과
그리고 이글거리는 햇빛이 필요한가를,
그런데 어찌 그 은혜 저버리고 심술궂게 굴겠는가!
일에 지친 사람의 목구멍 속에 떨어질 때면
나는 무한한 기쁨을 느끼고,
그의 뜨거운 가슴은 이 싸늘한 지하실보다
훨씬 더 즐거운 아늑한 무덤이기에.
그대는 들리는가, 주일의 노랫가락 울려 퍼지고
뛰노는 내 가슴에 희망의 노래가 재잘거림을?
탁자에 팔을 집고 소매를 걷어 올리고
그대는 나를 찬미하고 흐뭇해하리.
나는 그대의 기뻐하는 아내의 눈을 빛나게 하고,
그대의 아들에겐 힘과 혈색을 돌려주고
이 연약한 인생의 경기자를 위하여
투사의 근육을 굳혀줄 기름이 되리.
나는 식물성의 불사약, 영원한 파종자가 뿌린
귀중한 씨앗, 나는 그대의 속에 떨어지리,
우리들 서로 사랑하여, 진기한 꽃처럼
하느님 향해 솟아오를 시가 태어나도록!
-「술의 영혼」 전문
서로 사랑하여, 진기한 꽃처럼 하느님 향해 솟아오를 시가 태어나도록 술은 연인처럼 인간에게서 떨어질 수가 없다. 그런데 보들레르기 실제로 술을 사랑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엇갈린다. 젊은 시절 친구인 귀스타브 르 바바쇠르나 보들레르의 인물사진을 찍어 남기며 깊은 교분을 가진 당대의 사진가 펠릭스 나다르에 따르면, 보들레르는 술을 잘 절제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의 파괴된 육신도 술보다는 다른 약물의 결과일 가능성이 더 높다. 하지만 다른 연구자에 따르면 보들레르는 20대 중반부터 무절제하게 술을 마셨다고도 한다.
어쨌든 죽기 한 해 전인 1886년 1월 15일자 편지에서 보들레르 자신이 술에 대한 중요한 언급을 남기고 있다. 맥주를 마시면 안 된다는 것은 제가 생각하기에도 옳습니다. 차와 커피를 마시지 말라는 것은 마땅치 않게 여겨지긴 하지만, 그 정도야 할 수 있지요. 하지만 포도주까지 마시지 말라니요? 젠장 할, 그건 너무 심합니다! 그러니 적어도 술과 무관한 삶을 살지 않았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아니 오히려 태양의 아들인 술을 통해서 장엄한 마법을 보려하였다.
그런데 무엇 때문이었을까? 현실 속에서는 패배한 시인의 자기위안일까? 이 순간 보들레르는 스스로를 넝마주이로 비하하며 술을 찾는다.
바람에 불꽃 나부끼고 유리 삐걱거리는
가로등 붉은 불빛 아래,
부글부글 괴어오르는 술처럼 인간들 우글거리는
진창의 미로(迷路), 옛 성문 밖 거리 한복판에서,
흔히 보이는 것은, 고개를 휘저으며 비틀거리고,
시인처럼 담벼락에 부딪치며 걸어오는 넝마주이,
밀정(密偵) 따위는 제 신하처럼 조금도 개의치 않고
영광스런 계획 품은 가슴 속을 죄 털어놓는다.
선서를 하는가 하면, 숭고한 법률도 공포하고,
악인들은 타도하고, 희생자는 거들어 일으키고,
옥좌 위에 드리운 포장 같은 궁륭(穹?) 아래
저 자신의 찬란한 덕행에 도취한다.
그렇다, 살림의 고달픔에 쪼들린 사람들,
고된 일에 지치고 나이에 시달리고,
거대한 파리의 지저분하게 게워낸 오물,
산더미 같은 쓰레기 아래 녹초가 되고 꼬부라져서,
술통 냄새 풍기며 집으로 돌아간다,
낡아빠진 깃발처럼 콧수염은 축 처지고,
나날의 싸움에 백발이 된 한패를 거느리고서.
그들 앞에는 깃발이다 꽃이다 개선문들이
우뚝우뚝 솟아있구나, 아 장엄한 마법이여!
그리고 나팔과 태양, 함성과 북소리도
요란스러운 그 위황한 법석 속에서
사랑에 취한 민중에게 그들은 영광을 가져다준다!
이리하여 술은 부질없는 인생을 가로질러서
황금 속에 굴러 간다, 눈부신 팍톨 강과도 같이.
사람의 목구멍 통해 술은 제 공훈을 노래하고,
갖가지 선물을 베풀어 참다운 왕처럼 군림한다.
말없이 죽어가는 저 모든 저주받은 늙은이들의
원한을 재우고 무감각을 달래려고
하느님은 뉘우침에 사로잡혀 잠을 만드셨는데,
인간은 술을 덧붙였다, 이 거룩한 태양의 아들을!
- 「넝마주이의 술」 전문
그러나 장엄한 마법을 가능케 하는 술을 마심으로써 잠을 만든 신의 지위와 동격에 오르는 것. 모욕의 삶 속에서도 시(詩)의 종교를 꿈꾼 보들레르에게 그러니 술은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다. 마법의 에너지를 가득 품고 있는 거룩한 태양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록 현실에서는 넝마주이에 불과할지 모르나 술은 그를 신의 자리로 이끌고 간다. 다음과 같은 시구는 거기서 나온다.
모두가 너만 못하다, 오 그윽한 술병이여,
갈증 난 가슴 지닌 경건한 시인을 위해
네 넉넉한 뱃속에 간직하여둔 그 향기 높은 술만은.
너는 시인에게 부어준다, 희망과 젊음과 생명을,
- 그리고 긍지를, 이야말로 온갖 거지 근성의 보배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고 신들과 같게 만들어준다!
- 「고독자의 술」 부분
이처럼 술의 에너지를 듬뿍 받은 인간-신은 바로 시의 종교를 세우고자 했던 보들레르의 예술적 이상을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성스런 술 안으로 빠져 들어갈 수만은 없다. 자아의 과도한 확산 속에서 스스로를 제어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 상황이란 말의 구원이 사라진 자리에서 극단적 자아 파열이 펼쳐지는 상황이다. 보들레르는 그 순간에도 자아 그 자체가 될 수 있는 말을 창조해내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았다. 자아의 도취도 그 자아의 주인공이 시인인 한 하나의 시학(詩學)에 이르러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마르셀 레이몽이 지적하듯이, 현대시의 기원 보들레르에게서는 두 가지 물줄기가 흘러나간다. 하나는 베를렌느와 랭보를 거쳐 초현실주의로 이어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말라르메를 거쳐서 발레리로 향해 가는 것이다. 앞의 것은 자아와 세계의 심연을 향해 떠난 모험이었고, 뒤의 것은 그 모험을 말로 그릴 수 있을지를 탐구하는 또 다른 종류의 모험이었다. 그 둘이 초현실주의와 발레리로 나뉘기 전 잠깐 아폴리네르에게서 합쳐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보들레르가 빚은 술의 에너지 가득한 도취의 시학은 지금도 발효 중이다. 랭보의 「도취의 아침」과 아폴리네르의 「포도월(葡萄月)」을 거쳐 온 그 말들. 취기 가득한 그 말들이. 여기 잠시 아폴리네르의 것을 꺼내 술과 말이 익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사랑받지 못했으나 아름다운 노래에 말이다.
〔…〕
그리고 내가 말할 수 없는 모든 것
내가 결코 맛보지 못할 모든 것
파리가 갈망하던
순수한 포도주로 변한 이 모든 것 이 모든 것이
그때 나에게 떠올랐네
일 아름다운 날들 지독한 잠
초목 짝짓기 영원한 음악
움직임 숭배 신성한 고통
너희를 닮고 우리를 닮은 세계들
나는 너희를 마셨어도 갈증이 채워지지 않았노라
허나 그때부터 난 알았네 우주가 무슨 맛인지
물결이 흘러가고 너벅선들이 잠들어 있는 강변에서
모든 우주를 마신 탓에 전신에 취기가 도네.
나에게 귀를 기울이시오 나는 파리의 목청이니
마음이 내키면 또 다시 우주를 마시리라
내 만유명정(漫遊酩酊)의 노래를 들어주오
9월의 밤이 서서히 다 지나갔고
다리의 붉은 가로등이 센 강으로 꺼져갔네
별들이 사그라지고 이제 막 날이 밝아왔네
- 「포도월」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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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화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에 유학하여 석박사 과정을 마쳤다. 문학평론으로 등단하였고 평론집으로는 『감각의 실존』등이 있다.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출처 / 세상과 세상사이
C'est La Vie - Chyi Y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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