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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호열 시인/詩 창작 강의

자연적 현상은 시적 상상력의 보고寶庫 / 정유화

by 丹野 2010. 6. 12.

 

 

 

자연적 현상은 시적 상상력의 보고寶庫

 

 

                                                                                                                                           정유화

 

 

눈부신 과학의 발달은 인간의 삶을 매우 편리하게 해주고 있다. 효용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과학의 발달이야말로 인간이 영원히 추구해야 할 당면 과제이기도 하다. 인간의 삶의 영역은 과학의 발달에 의해 무한정 넓어지고 확장되어 간다. 이런 점에서 과학은 인간의 희망을 실현해주는 에너지 보관소라고 할 수 있다. 2008년 4월 8일, 한국 최초의 우주인 이소연 씨가 탑승한 러시아의 소유즈 우주선 발사의 장면은 우리 국민 모두에게 큰 감동과 희망을 안겨주었다. 물론 국제우주정거장에서 며칠 간 체류하다가 귀환할 때의 장면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때 맛보았던 국민들의 감동과 찬사 속에는 과학적 발달, 과학적 상상력에 대한 믿음과 희망이 자리 잡고 있었다.   

 

과학의 발달은 이성의 힘을 바탕으로 한다. 그래서 과학적 이론을 전개하는 인간의 이성은 냉혹하리만큼 아무리 작은 오차라도 허용하지 않는다. 만약에 발사된 소유즈 우주선이 지구궤도로 진입할 때나 혹은 소유즈 우주선이 국제우주정거장과 도킹할 때에 한치의 오차라도 허용했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할 엄청난 불행한 일이 터지고 말았을지 모른다. 이성에 의한 과학의 힘은 그만큼 논리적, 인과적, 합리적이다. 따라서 어떤 사물이 과학적 상상력에 의해 그 대상이 될 때에는 불투명한 존재에서 투명한 존재로 그 속성이 명료하게 밝혀질 수밖에 없다. 예의 이것이 바로 과학적 상상력이다.

 

이 지점에서 생각해 보자. 과학적 상상력과 문학적 상상력을 말이다. 보편적으로 상상력이라는 것은 감성과 오성을 바탕으로 하여 사물의 의미를 가상적으로 그려보는 마음의 힘이다. 범박하게 말하면 실제 하지 않은 세계를 마음대로 그려본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과학적 상상력과 문학적 상상력의 시발은 ‘가상의 세계’를 그려본다는 점에서 하나의 공통성을 지닌다. 하지만 상상력 탐구에 대한 그 과정과 목적을 보면, 양자兩者 사이에 변별력이 존재한다. 과학적 상상력이 가설을 전제로 해서 그 가설에 대한 논리적 합리적 인과적 추리를 통해 그 진위를 검증하고 증명하는 상상력이라면, 이와 달리 문학적 상상력은 가상을 전제로 하되 그 가상에 대한 논리적 합리적 인과적 추리를 초월하고자 하는 상상력이다. 그래서 그 진위에 대한 검증이나 증명을 오히려 탈피하게 된다. 이로 미루어 보면, 과학적 상상력은 ‘이성, 목적성, 유용성, 합리성, 논리성, 인과성, 진(참)’ 등을 요구하는 반면에, 문학적 상상력은 ‘감성, 무목적성, 무용성, 비합리성, 비논리성, 비인과성, 위(거짓)’ 등을 요구하게 된다. 부연하면 전자는 철저하게 이성적 통제를 받는 상상력이고 후자는 감성적 통제를 받는 상상력이다.

 

그러므로 자연 현상이 과학적 상상력의 대상이 될 때에는 탈신비화를 지향하게 된다. 이에 비해 문학적 상상력은 오히려 그것을 신비화하는 세계로 이끈다. 시인에게 자연적 현상은 이성적 대상이 아니라 감성적 대상이기 때문이다. 자연에 내재하는 존재들은 이성적으로 파악할 수 없는 무수한 비밀을 지니고 있다. 시인은 그것을 순간적 직관, 감성적 직관으로써 그 비밀을 엿보게 된다. 그 비밀은 비의적 세계 곧 신비한 세계이다. 시인은 그 비밀을 시적 언어로 포착하여 현상적으로 드러낸다. 이런 점에서 시인에게 자연적 현상은 논리적 차원을 초월해 시적 상상력의 비의적 보고일 수밖에 없다. 구체적으로 자연적 현상을 노래한 시인의 상상력을 살펴보기로 하자.


회화나무에서 쥐똥나무 울타리로

쥐똥나무에서 명자나무 가지로

아침 새들이 옮겨 다닌다


새는 나뭇가지와 나뭇가지를 연결하는

보이지 않는 악보를 열심히

공중에 그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새의 몸에 햇살이 쏟아지자

햇살이 깃털을 켜는지 깃털이 햇살을 켜는지

소리가 맑고 높다


새가 명자나무에서 수수꽃다리나무로

화락! 자리를 옮기자

붉은 질투가 꽃잎으로 진다.

──공광규, 「아침 풍경」 전문(『현대시학』, 2009. 1)


이 텍스트에서 시인의 눈에 포착된 새는 ‘아침풍경’의 의미를 산출하는 핵심적인 이미지이다. 그런데 시인은 새와 관계를 맺는 모든 나무에는 이름을 부여하고 있지만 새에게는 이름을 부여하지 않고 있다. 가령, 회화나무, 쥐똥나무, 명자나무, 수수꽃다리나무 등에는 이름을 부여하여 지시 대상을 명료하게 변별하고 있지만, 새에게는 이름을 부여하지 않고 있어서 그 새의 종류나 모습을 구체적으로 떠올릴 수가 없다. 시인이 이렇게 한 이유는 아마도 그 새가 어떠한 종류의 새이냐 하는 데에 관심을 둔 것이 아니라 단지 새라는 존재 자체에 관심을 두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로 인해서 이름을 부여받은 나무들의 존재는 후경화되고 상대적으로 이름을 부여받지 못한 새는 전경화되고 있다.

 

아침 새들이 부재했다면 회화나무, 쥐똥나무, 명자나무, 수수꽃다리나무 등은 정적인 상태로써 시인의 이목을 끌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뭇가지와 나뭇가지를 옮겨다니는 새의 동적인 상태가 개입되는 순간, 나무들이 있는 공간은 시인의 주목을 끌게 된다. 왜냐하면 이름을 부여받지 못한 새가 “나뭇가지를 연결하는/ 보이지 않는 악보”를 그려가며 새로운 아침풍경을 연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새들의 악보는 서로 다른 나무들이 어울려 낼 수 있는 화음의 상징이다. 이에 따라 나무들의 공간은 음악의 세계로 전환되고 있다. 곧 조화로운 화음을 낼 수 있는 상생의 세계가 되고 있는 셈이다.

 

새에 대한 존재의 비밀은 무형의 공간에서 유형인 ‘악보’를 창조한 데에 있다. 새의 존재에 대한 비밀을 ‘악보’로 엿본 시인의 직관적 상상력은 매우 놀라운 것이다. 예의 그 새들은 악보를 보고 연주하게 된다. 그 연주는 다름 아닌 ‘맑고 높은 소리’이다. 물론 이 연주를 하게 하는 데에는 새의 몸에 쏟아지는 “햇살”도 한 몫 하고 있다. 이에 따라 천지 사물이 참여해서 내는 연주의 소리가 되고 있다. 이 텍스트는 새들의 ‘연주’에 의해 시각적 이미지에서 청각적 이미지로 전환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소리가 맑고 높다”라는 언술에서 알 수 있듯이, 그 연주의 소리는 텍스트의 시공간을 수직 상승하게 한다.

 

이 텍스트에서 또 하나의 묘미는 명자나무가 새의 무게를 감지하고 있다는 데에 있다. 이것 역시 존재의 무게에 대한 시적 상상력이리라. 가령 새가 “명자나무에서 수수꽃다리나무로/ 화락! 자리를 옮기자” 새의 발진에 의해 꽃잎이 떨어지고 만다는 사실이다. 이 현상을 통해 짐작해 본다면, 명자나무는 새의 무게, 곧 새의 발진에도 예민하게 반응할 정도로 매우 가녀리다는 것이다. 과학적 상상력으로는 발견하기 어려운 그런 시적 상상력인 셈이다. 시인은 ‘떨어지는 꽃잎’을 두고 “붉은 질투”라고 언술한다. 이것이 바로 시인이 창조적으로 발견한 존재의 비밀이다. 이와 같이 시인은 ‘새’와 ‘꽃’의 존재를 통하여 ‘악보’와 ‘붉은 질투’라는 감각적 이미지를 창조적으로 현시해 내고 있다. 따라서 이 텍스트의 ‘아침 풍경’은 사물들의 풍경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사물에 감춰진 비밀을 시적 언어로 조형해낸 새로운 풍경인 것이다. 

 

 

 

 


저것 봐!

아침, 숲의 거미줄에 맑게 맺혀 있는 물방울들을

거미가 하나씩 땅에 떨어트리고 있네

마치 두 손바닥을 오므려 샘물을 뜨듯, 앞발을 모아 포옥 떠서

혹은, 이빨로 콕, 깨물어 터트려서, 아래로 떨어트리고 있네

꼭 마당으로 굴러들어 온 귀찮은 돌멩이를 치우는 것 같네

아니, 씨알이 튼실히 영글도록 감자꽃밭에서

감자꽃을 따주는, 적화摘花의 손길 같네

그러니까 거미는, 숲의 아침, 맑게 거미줄에 맺힌 물방울들이

그 투명하고 영롱하게 핀 물방울꽃들이

녹으면 물이 되어 흘러내리는, 물이 되어 흘러내려

새 꽃 물고기 같은 형상들을 지우고, 무정형의, 물의 본래의 얼굴로 되돌아가는

얼음 조각彫刻 같은 것이란 것을, 알고 있는 듯한 눈빛이어서

비 온 후, 아침에 거미줄에 맺혀 있는 거미가

이슬의 눈처럼 맑네

──김신용, 「이슬의 눈」 전문(『시작』, 2008년 겨울호)


새와 나무와 햇살의 코드를 숲과 거미(거미줄)와 물방울의 코드로 변환하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자연 현상에 대한 시적 이미지만 변별될 뿐, 그 존재들의 비의성을 탐색하려는 시적 상상력의 지향성은 동일할 것이다. 이에 해당하는 코드가 예의 김신용의 「이슬의 눈」이다. 이 텍스트 역시 「아침 풍경」처럼 아침의 숲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아침 숲속에서 시인이 발견한 것은 다름 아니라 “거미줄에 맑게 맺혀 있는 물방울들을” 하나씩 떨어트리고 있는 거미의 존재이다. 시인은 매우 놀란 듯이, 신기한 듯이 그 광경을 클로즈업하고 있다. 그저 자연 현상의 하나일 뿐인데 말이다. 하지만 시인의 시적 상상력이 발동하자 그 현상은 차츰 달라진다. ‘거미’와 ‘물방울’ 존재에 대한 비의적 모습이 감각적 이미지로 구체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거미에게 물방울은 불필요한 존재이다. 그래서 거미는 거미줄에 맺혀 있는 물방울들을 지상으로 떨어트릴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거미가 물방울의 존재를 전적으로 하찮게 여기는 것은 아니다. 물방울을 떨어트리는 거미의 모습을 보면 양의성兩義性을 보여준다. 예컨대 “꼭 마당으로 굴러들어 온 귀찮은 돌멩이를 치우는 것 같네”라는 언술은 물방울 존재에 대한 약간의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거미는 ‘돌멩이’를 매우 조심스럽게 치우듯이 “두 손바닥을 오므려 샘물을 뜨듯, 앞발을 모아 포옥 떠서” 아래로 떨어트리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부정적인 생각은 오래가지 않는다. 시인이 “씨알이 튼실히 영글도록 감자꽃밭에서/ 감자꽃을 따주는, 적화摘花의 손길 같네”라고 언술함으로써 그것을 강하게 긍정하는 의미를 부여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적화의 손길”은 쓸모없는 꽃을 솎아내는 작업이다. 거미의 물방울 떨어트리는 일이 “적화의 손길”이 됨으로 해서 이제 물방울은 ‘꽃’의 이미지로 변모된다. “영롱하게 핀 물방울꽃들”로써 말이다. 꽃을 솎아내면 그 꽃은 이내 사멸하고 만다. 그런데 거미가 물방울꽃들을 적화하면 이것들이 사멸하지 않고 오히려 “물의 본래의 얼굴로 되돌아” 간다. 요컨대 역설적인 현상인 셈이다. 이렇게 보면, 거미의 물방울 떨어트리는 작업은 무용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용한 것으로 드러난다. 물방울꽃을 녹여 물의 본래 얼굴인 “무정형” 상태로 환원해주고 있으니 말이다.

 

이 지점에서 시인이 순간적으로 포착한 것은 ‘물’의 존재에 대한 비의적 상상력이다. ‘꽃’의 이미지를 지닌 ‘물방울꽃’이 녹아내리면 물은 무정형 상태로써 하강하는 이미지가 된다. 물은 무수한 형상을 만들어낼 수 있다. 가령, 얼음조각으로 새, 꽃, 물고기 등 수많은 형상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가상에 지나지 않는다. 물의 본래 모습은 아닌 것이다. 그래서 물은 하강하여 흐름으로써 새, 꽃, 물고기 등의 모든 형상을 지우고 ‘무無’로 만든다. 이것이 예의 물의 본질이다. 시인은 거미의 행위를 통하여 그러한 것을 깨닫고 있다. 시인이 거미를 “이슬의 눈”으로 비유한 것도 이에 연유한다. 거미는 우주현상에 참여하는 유기적 존재로서 이미 그러한 비의적 세계를 체득하고 있기 때문이다. 

병풍산 골짜기 아직 눈꽃을 쓰고 서성거리는 나무들. 저 땅 속 깊은 곳에서 눈뜨는 핏발선 눈동자 하나 몸을 풀고 있다 수심 깊이 타오르는 숨소리에 맞춰 밀려오고 다시 또 오는 물고기 떼 화상 입은 언 살 언 뼈 손가락 끝까지 어루만진다 느닷없이 몸속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이 몸 밖으로 떨어지고 세상의 모든 시냇물이 넘쳐 흐른다 연동사 앞 봄나들이 차들이 배처럼 떠있다

──박순선, 「우수雨水」 전문(『시와산문』, 2008년 겨울호)


‘숲-거미-물방울’의 코드를 ‘산-눈꽃-나무’의 코드로 변환하면 시 텍스트의 전개 양상은 어떻게 될까. 이러한 코드에 해당하는 박순선의 「우수」를 보도록 하자. 알다시피 ‘우수’를 사전적인 의미로 보면, 24절기의 하나로써 눈이 비가 되어 내리고 얼음이 녹아서 물이 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날씨가 풀리고 새싹이 난다는 시기임을 이르는 뜻이다. 눈과 얼음이 녹아서 초목들의 새싹이 움트는 자연 현상, 곧 우주순환의 현상은 참으로 신비한 것이다. 우주순환의 원리는 인간이 살고 있는 지상의 시공간에 변화를 가져다준다. 이 시공간의 변화가 과학적 상상력의 대상이 된다면, 그 변화에 대한 어떤 원리나 법칙을 찾으려는 상상력이 전개될 것이다. 요컨대 객관적으로 보편타당한 하나의 진리를 밝혀내기 위한 언어적 상상력이 요구될 터이다. 하지만 이와 달리 시공간의 변화가 시적 상상력의 대상이 될 때에는 그 비의적 현상에 대한 감성적 반응을 형상화하려는 상상력이 전개된다.

이 텍스트에서 ‘우수’ 절기에 대한 시인의 감성적 반응은 매우 개성적이고 신선하다. 이 텍스트를 보면, 우수 절기인데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아직 ‘병풍산’ 골짜기에는 눈이 얼어붙어 있다. 그래서 “눈꽃을 쓰고 서성거리는 나무들”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의미상으로 보면, 병풍산의 공간은 오는 봄을 반기지 않는 듯이 ‘겨울(눈꽃)’을 움켜쥐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시인은 ‘눈꽃’을 통하여 겨울(죽음)을 상상하기보다는 이와 대립되는 봄(삶)을 상상하고 있다. 이러한 시인의 감성적 반응에 의하여 텍스트의 공간은 겨울에서 봄으로 전환한다. 예컨대 시인이 ‘눈꽃을 쓰고 있는 나무’를 보면서도 이와 달리 “저 땅 속 깊은 곳에서 눈뜨는 핏발선 눈동자 하나 몸을 풀고 있다”라고 한 언술이 그것을 밑받침 한다. 여기서 ‘핏발선 눈동자’는 아마도 수액을 빨아올리는 나무의 뿌리일 터이다. 이는 식물적 상상력으로써수직 상승의 의미작용을 산출한다. 

 

시인의 상상력은 여기에 멈추지 않는다. 수액의 흐름을 “수심 깊이 타오르는 숨소리”로 전환하면서 “물고기 떼”라는 동물적 상상력까지 창조해 내고 있다. 물론 이 “물고기 떼”는 후일 나뭇가지에 열릴 ‘꽃눈’의 비유일 것이다. “물고기 떼”가 나뭇가지로 비유된 “화상 입은 언살 언 뼈 손가락 끝까지 어루만진다”라는 언술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상력에 의하면 ‘눈꽃’의 이미지는 결국 ‘꽃눈’의 이미지로 변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물고기 떼를 내포한 나무는 “몸속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을 “몸 밖으로 떨어지”게 할 수 있다. 그 “눈물 한 방울”은 “세상의 모든 시냇물”을 넘쳐나게 할 정도로 확산의 마력을 지닌 신비한 이미지이다. 이에 따라 이 텍스트는 상승적인 봄의 공간이 된다. “봄나들이 차들이 배처럼 떠있”다는 물의 상상력도 그렇게 해서 가능해진다. ‘배처럼 떠 있는 차들’은 물 위의 꽃잎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차들’ 역시 나무의 ‘꽃눈’과 등가에 놓인다. 이처럼 ‘눈꽃’을 통해서 ‘우수’ 절기를 형상화한 시인의 상상력은 수직 상승하는 물의 이미지이다. 이것에 의해 온 세상은 겨울을 말끔히 지우고 새롭게 단장한 봄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자연적 현상, 곧 우주적 현상은 시인에게 무수한 시적 상상력을 제공해 주는 보고寶庫 역할을 한다. 시인은 그 현상적 존재들을 통해서 다채로운 이미지를 창조해낼 뿐만 아니라 세계에 대한 새로운 해석까지 해주고 있다. 물론 시인의 이러한 작업이 현실적인 삶에 유용한 것은 아니다. 달리 말하면 무용한 것이다. 그럼에도 시인이 시를 쓰는 것은 ‘무용한 행위’, 곧 ‘무상無償의 행위’를 통해서 감동과 쾌락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시에 독자들에게도 그것을 선사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정유화 / 경북 선산에서 태어났으며 1988년 『동서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떠도는 영혼의 집』, 『청산우체국 소인이 찍힌 편지』가 있고 중앙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다.

 

 


 

지폴리/오보에와 첼로, 오르간과 현을위한 아다지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