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와 醜의 경계
나호열
1.
누군가 美學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한 마디로 대답하기에 옹졸함을 느끼며 인터넷 검색창에 미학을 써넣는다.
여러 학문의 상위에 있는 미 그 자체의 학문을 제창한 플라톤을 대표로 하는 서양의 전통적 미학은 초월적 가치로서의 미를 고찰한다. 미학이라는 말을 오늘날과 같은 의미로 처음 사용한 사람은 라이프니츠볼프학파(Leibniz Wolffische Schule)의 A.G.바움가르텐이다. 그는 그때까지 이성적 인식에 비해 한 단계 낮게 평가되고 있던 감성적 인식에 독자적인 의의를 부여하여 이성적 인식의 학문인 논리학과 함께 감성적 인식의 학문도 철학의 한 부문으로 수립하고, 그것에 에스테티카(Aesthetica)라는 명칭을 부여하였다. 그리고 미(美)란 곧 감성적 인식의 완전한 것을 의미하므로 감성적 인식의 학문은 동시에 미의 학문이라고 생각하였다. 여기에 근대 미학의 방향이 개척된 것이다. 고전 미학은 어디까지나 미의 본질을 묻는 형이상학이어서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영원히 변하지 않는 초감각적 존재로서의 미의 이념을 추구하였다. 이에 반해서 근대 미학에서는 감성적 인식에 의하여 포착된 현상으로서의 미, 즉 ?미적인 것(das sthetische)?을 대상으로 한다. 이 ?미적인 것?은 이념으로서 추구되는 미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우리들의 의식에 비쳐지는 미이다. 그러므로 미적인 것을 추구하는 근대미학은 자연히 미의식론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I.칸트는 감성적 현상으로서의 미의식의 기초를 선험적(先驗的)인 데 두었지만, 의식에 비쳐지는 단순한 현상으로서의 미적인 것을 탐구하는 방향은 당연히 경험주의와 결부된다. 19세기 후반부터는 독일 관념론의 사변적(思辨的) 미학을 대신하여 경험적으로 관찰되는 사례를 근거로 하여 미이론(美理論)을 구축해 나가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페흐너는 ?아래로부터의 미학?을 제창하면서 심리학의 입장에서 미적 경험의 법칙을 탐구하려는 ?실험미학?을 주장하였다. 오늘날에는 또 미적 현상의 해명에 사회학적 방법을 적용시키려는 ?사회학적 미학?이나 분석철학의 언어분석 방법을 미학에 적용하려고 하는 ?분석미학? 등 다채로운 연구분야가 개척되고 있다.
몇 초도 되지 않아 튀어나온 설명문은 무척 衒學的이다. ‘미학’이라는 개념이 오히려 더 헝클어진 느낌을 받는다. 나는 누군가에게 다시 되묻는다. 어디에서 ‘미학’이라는 말을 찾게 되었느냐고.
지난 시절 시인들에게는 미학을 찾지 않아도 미학이 먼저 와 있었다. 식민지 시절에는 독립만으로도 미학이었고, 독재시절에는 민주만으로도 미학이었다. 절대 군중이 휩쓰는 세상에서 시인은 가난을 노래하는 것만으로도 미학을 구현하였다. 그것이 오늘날 시인들이 지난날 시인들을 행복하고 부러운 존재로 보는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궁핍은 시대와 사회가 주는 타율적 궁핍만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갈구하는 자율적 궁핍이어야 한다. 이 말을 자율적 미학과 타율적 미학으로 바꾸어도 좋다.
위의 글은 강동우의 「진정한 시의 죽음을 위하여」에 인용된 고운기의 글이다. 강동우는 이 글에 ‘새로운 미학의 건설을 위한 반성’ 이라는 부제를 달아 놓고 있는데. 이 글의 요지는 새 천 년을 맞이하는 우리의 문학(시)이(가) 어떤 목표를 향해가고 있는가, 또는 어떤 목표가 바람직한가를 점검해 보는 것이었다. 하여튼 그 누군가는 이 글을 읽으면서 적잖이 ‘마학’이라는 개념에 혼란을 느꼈던 것 같다. 그러나, 위의 ‘미학’에 대한 설명은 그 누구에게 적절한 이해를 줄 수 있는 답변은 아닌 것 같다.
고운기의 글을 살펴보면 ‘미학’은 시인들의 앞에 나타난(떠오른) 주제의식임을 알 수 있다. 시인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언어행위로서 표출해내고 싶어하는 그 어떤 것을 美라고 한다면 미학은 그 美를 美로서 존재하게 하는 구조라고 볼 수 있다. 어떤 시인이 자신만의 미학을 갖는다는 것은 시를 써야하는, 기필코 그래야만 하는 당위성을 확보하는 작업이며, 시인 자신이 또는 他者가 그 통로를 통하여 작품의 光輝를 느끼는 상태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美를 단순히 ‘아름다움’으로만 받아들이는 것을 경계하자. 이 말은 ‘아름다움’ 이라는 상태가 함의하고 있는 범위가 너무 넓어서 무수히 많은 다른 개념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 때문이다. 희생, 정의, 절제, 강건함 등등에서 비롯해서 슬픔, 고통, 광포 등의 개념에 이르기까지 ‘아름다움’에 포섭되는 개념이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시인(작가)이(가) 지니고 있는 미학은 자신의 개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면서도 이 세계의 핵심에 다다를 수 있는 새로운 경지를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漢詩의 미학과 하이꾸의 미학이 어떻게 다른 지 각자 생각해 보기로 하자.
2.
우리나라에만 있는 독특한 문학의 행태는 문단 등단제도이다. 예전의 과거시험처럼 작품을 응모하고 일정한 심사절차에 걸쳐 당선이 되면 기성문인으로 대접을 받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신춘문예는 문학으로 입신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도전의 실험대이다. 마침 올해의 신춘문예 당선작들이 수록되어 있어 읽어볼 기회가 생겼다.
디지털시대에 걸 맞게 작가들의 연령도 젊고 싱싱한데다 그 상상력과 발상이 무척 놀랍더라구요
게다가 당선 소감은 어찌나 멋지던지... 그야말로 新春입니다 .한 편 수필 같기도 합니다
작품들마다 불꽃튀기는 치열한 경쟁으로 목숨이라도 걸고 도전하고 있다는 듯한 느낌이 형광등 쵸크 전구 깜빡대듯 내 머릿속에서 스파크를 일으키며 전율이 온 몸으로 퍼집니다 참으로 무섭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신춘문예는 엄청난 도전 정신의 세계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소요문학 홈페이지에서 옮겨 본 위 글처럼, 신춘문예에 당선된 작품들은 한결같이 새롭고, 치열하고, 무서운 도전의식으로 무장되어 있다. 그러나 새롭고, 치열하고, 무서운 도전의식이라는 것을 뒤집어 놓고 보면, 작위성, 찰라적 감각, 숙성이 부족한 체험이라고 감히 생각해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궁핍은 시대와 사회가 주는 타율적 궁핍만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갈구하는 자율적 궁핍이어야 한다.
자율적 궁핍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타자나 이 세계의 간섭없이, 눈치봄도 없이 순수하게 자신의 영혼에서 끓어오르는 용암 같은, 그렇지만, 용암이면서도 차가운 눈물 같은 자신의 삶의 절실성이 아니던가?
비단 신춘문예 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발표되는 작품들도 새로움의 감각 없이는 조명을 받기 힘들다. 수록된 신춘문예 작품들을 눈여겨보면 전통적으로 우리가 받아들였던 시의 형식과 어법과는 매우 낯 선 풍경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저 마음으로 흘러가며 직조한 서정이 아니라 치밀한 계산과 구성력으로 작품을 만들어 갔음을 간파하게 된다.
봄나물, 언 땅 속에서도 질긴 생명력으로 버티다 겨울이 지나면 귀한 손님처럼 세상에 얼굴 내미는 그 나물들과 빈가지 끝에서 소리 없이 움트는 새 순들 그리고 제 몸 열어줌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찾아오는 봄꽃들, 갖가지 벌레들과 아스팔트 위에서 춤추는 아지랑이 겨우내 침묵하던 강물이 녹아 내리며 나는 노래 소리 등 등 진정한 신춘문예 당선작품은 [자연]이라고 생각합니다 [봄]이라는 계절이라고 여깁니다
그렇다. 진실된 작품은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러한(自然) 것이다. 이러한 의식이 위의 글을 쓴 이의 미학이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다. 이 일관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사람들을 바라볼 수 있다면 그가 이루는 작품의 영토는 무한히 넓어질 수 있다.
3.
그렇다면 대답은 간단하다. 사진을 찍을 때 피사체가 흔들리거나 사진을 찍는 사람이 흔들린다면 그 사진은 실패하고 만다. 요즘의 사진기는 성능이 좋아서 피사체의 약간의 흔들림에 사진이 잘못 나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 문제는 어떤 경우에도 사진을 찍는 사람이 흔들려서는 결코 좋은 사진이 나올 수 없다는 사실이다, 글을 쓸 때에도 우리는 나의 관점이 일관된 흐름을 가지고 있는가를 늘 유의해야 한다. 나의 글쓰기를 자극한 대상(글감)이 하나의 미학으로 독자들에게 전달될 수 있을까를 놓쳐서는 안된다. 아름다움이라는 미각에 빠져서 수많은 아름다움의 요소를 간과하는 잘못을 저지르는 것은 아닌 지 따져보아야 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시와 산문을 구분해서 이야기 해보기로 하자. 시의 구성은 단어의 사전적 의미에 매달려서는 안된다. 관습적인 사전적 의미를 새로운 감각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어법 배열의 선택과 효과에 치밀함을 가져야 한다. 시의 구성은 일상적 담화 구조와는 다른 구조를 지닌다는 점을 유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 언어가 가지고 있는 섬세한 결을 버리지 않으면서 일상적인 언어구조를 바꾸는 능력이 시인에게 필요하다는 것이다. 지금 밥 익어가는 냄새가 퍼지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배가 부른 사람에게는 그저 밥이 익고 있는 상태로 인식되겠지만, 배가 고픈 사람에게 그 냄새는 강열한 식욕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이 강열한 식욕처럼 글을 읽는 독자에게 어떤 자극을 부여하는 것, 각성하게 하는 것이 시의 임무이고 미학이다.
산문의 경우를 간단히 언급해 보자. 대부분의 작품들은 어떤 사건의 전개에 무게를 둔다. 육하원칙에 맞추어 이야기를 전개한 다음 결론은 이래서 이렇다 라는 식으로 끝을 맺는다면 그것은 작품이 아니라 기사문이나 설명문에 가까워질 것이다. 산문을 쓰는 이들도 시인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문체를 갈고 닦는데 힘을 기울여야 한다. 사건의 나열이 아니라 사건의 핵심에 자리잡고 있는 삶의 구조나 의미를 꿰뚫어 볼 수 있는 사색의 힘을 키워나가야 할 것이다.
길을 가던 어떤 사람이 온 몸을 부르르 떨며 소리를 질렀다. ‘사람 살려!“ 그런데 주변에는 그 사람이 소리를 지를만한 위급한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 사람을 멀찌감치 돌아서 갔다. 그 사람은 갑자기 지구가 거꾸로 뒤집히는 느낌에 사로잡혀 소리를 질렀지만 이무도 그 사람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시인(작가)은(는) 그 사람처럼 예민하게 세상을 감각하는 존재이다. 지구가 거꾸로 뒤집히고 있다는 느낌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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