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 굴뚝의 꽃담 / 한재원
건축물을 세우고 꾸미는 데 사용되는 여러 재료 가운데 흙으로 모양을 빚은 뒤 높은 온도로 구워 만든 것이 전돌입니다. 전돌은 흙을 빚어 만드는 공예품이지만 건물을 세우는 데에 필요한 최소 단위이기도 하지요. 다시 말해서 건축의 기본 요소인 ‘구조’와 ‘장식’을 모두 드러낼 수 있는 미술품인 것입니다. 전돌은 처음부터 건축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건축과 따로 떨어뜨려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형태나 새겨진 무늬에 대해 따로 말할 수는 있겠지만 이것조차도 실제로는 독립된 감상을 위한 것이 아니라 건축물의 일부로 종사하기 위한 형태와 새김이기 때문입니다.
조선시대 궁궐의 꽃담[花紋墻] 역시 전돌 또는 벽돌로 이룩한 건축의장(建築意匠)입니다. 전돌 자체에 무늬를 새겨 길상(吉祥)과 벽사(?邪)의 뜻을 나타낸 예가 있는가 하면, 여러 전돌 모양과 색을 조합하여 담장이나 벽면을 꾸민 것도 있습니다. 궁궐에는 수많은 전각(殿閣)들이 있고, 그에 따르는 문과 담장들이 있습니다. 이 문이나 담에는 여러 가지 무늬들이 나타나고 있는데, 그 가운데 많은 수가 전돌로 이루어진 것들입니다. 용이나 봉황, 박쥐 등 상서로운 동물은 물론 대나무, 매화, 포도와 같은 식물무늬도 볼 수 있죠. 동식물 외에도 뇌문(雷紋)이나 만자문(卍字紋), 길상문자문(吉祥文字紋)의 보기도 아주 많습니다.
대체로 동식물무늬는 전돌 자체에 무늬를 조각해서 특정한 위치에 끼워 넣은 '새김형'이고, 문자나 기하학 무늬는 전돌을 적절하게 배치해서 형상을 구성한 '짜임형'입니다. 꽃담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보물로 지정된 경복궁 자경전의 꽃담과 십장생 굴뚝(도 1), 교태전의 아미산 굴뚝입니다(도 2). 그래서인지 경복궁 꽃담에 대한 연구는 비교적 쉽게 찾아볼 수 있고, 또 자세한 편이지만 창덕궁 꽃담에 대한 정보는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도 1> 경복궁 자경전 십장생 굴뚝 꽃담 <도 2> 경복궁 교태전 아미산 굴뚝
창덕궁 희정당(熙政堂) 앞뜰에 있는 굴뚝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굴뚝 4면에도 상?중?하 3단으로 전돌을 써서 만든 꽃담이 있습니다(도 3, 4, 5).
<도 3> 창덕궁 희정당 앞 굴뚝 <도 4> 희정당 굴뚝 동면 천마무늬 전돌 <도 5> 희정당 굴뚝 북면 코끼리무늬 전돌
한 면마다 상단과 하단에는 글자가, 중단에는 무늬전돌이 놓여 있어 꽃담은 모두 12개가 됩니다. 이 희정당 굴뚝 꽃담의 무늬들을 정리하면 <표 1>과 같습니다.
희정당 굴뚝 꽃담 무늬 | |||
방위 |
위치 |
내용 |
형태 |
東 |
상단 |
道 |
짜임형 |
중단 |
천마 |
새김형 | |
하단 |
眞 |
짜임형 | |
南 |
상단 |
永 |
짜임형 |
중단 |
사슴,소나무,영지 |
새김형 | |
하단 |
樂 |
짜임형 | |
西 |
상단 |
壽 |
짜임형 |
중단 |
쌍학, 복숭아 |
새김형 | |
하단 |
富 |
짜임형 | |
北 |
상단 |
康 |
짜임형 |
중단 |
코끼리, 구름 |
새김형 | |
하단 |
寧 |
짜임형 |
*짜임형 :전돌들을 배열하여 글자, 무늬를 구성한 형태
*새김형 : 전돌 한 개에 무늬를 새긴 형태
< 표 1 > 창덕궁 희정당 굴뚝 꽃담
희정당 굴뚝 북면의 상단과 하단 꽃담에 베푼 ‘강(康)’자와 ‘녕(寧)’자는 1920년 경복궁에서 왕의 침전인 강녕전을 이건하면서 그것을 표시한 것까지 함께 옮겨다 놓은 것으로 파악하기도 합니다(도 6).
* 희정당 굴뚝 북면 상단 '康'자 무늬 꽃담 * 희정당 굴뚝 북면 하단 '寧'자 무늬 꽃담
< 도 6 > '康' '寧'
하지만 코끼리 무늬전돌(도 5)을 가운데 두고 위아래로 배치된 이 두 글자는, 바로 이 굴뚝 다른 면에 ‘영(永)’, ‘낙(樂)’, ‘수(壽)’, ‘부(富)’와 같은 다른 글자무늬 꽃담과 마찬가지로(도 7) 단순히 기복(祈福)을 위한 문자일 수도 있어서 경복궁 강녕전에서 옮겨온 증거로 삼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오히려 강녕전을 창덕궁으로 옮겨 지은 뒤에 온돌시설을 만들면서 굴뚝을 신축했다고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 희정당 굴뚝 남면 하단 '樂'자 무늬 꽃담 * 희정당 굴뚝 서면 하단 '富'자 무늬 꽃담
< 도 7 > '樂' '富'
그러면 과연 이 궁궐 꽃담과 무늬전돌은 누가 제작했을까요?
기록에 따르면 공조(工曹)에 소속된 와서(瓦署)에서 규칙적으로 왕실에 필요한 각종 기와와 함께 전돌을 만들어 공급했습니다. 1865년 제정된 <육전조례(六典條例)> 공조 조항에 와서에서 방전(方塼)과 대방전(大方塼)을 만들어 왕실에 바쳤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또 『대전회통(大典會通)』에 따르면 태조 원년(1392)에 와서를 설치하여 고종 19년(1882)에 폐지하였습니다. 그 관원으로는 종2품관에 해당하는 제조 두 명, 종6품관인 별제 세 명이 있었지만 한 명을 더 줄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만기요람(萬機要覽)』에도 태조 원년에 동요(東窯)와 서요(西窯)를 두었는데 나중에 이를 합하여 와서로 개칭하고, 별제 두 명, 서리 두 명, 고직 한 명, 사령 두 명으로 여러 관원들을 배치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와서에서 생산된 기와와 전돌은 대와(大瓦)?방초(防草)?상와(常瓦)?토수(吐首)?잡상(雜像)?용두(龍頭)?당와(唐瓦)?당방초(唐防草)?연가잡상(煙家雜像) 따위 기와와, 방전?대방전?반방전(半方塼) 따위 전돌들입니다. 이런 사실을 보면 와서는 필요에 따라 왕실의 꽃담용 전돌을 구워서 공급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더욱이 '연가잡상'이라는 말은 ‘굴뚝의 잡상’이라는 뜻인데, 아마도 굴뚝에 설치된 무늬전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전돌은 와서에서 만든다고 해도 궁궐의 꽃담을 기와공들이 직접 설치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전돌이나 벽돌을 쌓아 건물이나 담장을 이룩하는 일은 미장이[泥匠]들이 할 일이기 때문이죠. 또 전돌 자체에 무늬나 글자를 새기는 일은 와서에서 이루어졌을 수도 있지만 부조(浮彫)의 바탕이 되는 밑그림은 화원(畵員)이 작성했을 가능성도 큽니다.
이런 사실들을 바탕으로 꽃담을 만든 사람들에 대해 좀더 자세히 짐작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전돌을 빚거나 전돌에 무늬를 새기는 일은 와서에 소속된 와장(瓦匠)이 합니다. 흙을 능숙하게 다루어야 하기 때문이죠. 다만 무늬를 새길 전돌의 밑그림은 그림과 도안에 능한 화원에게 맡깁니다. 왕실의 계획대로 만들어진 전돌은 궁궐 공사현장에 공급되어 미장이들이 꽃담을 만들 수 있게 합니다. 미장이들은 삼화토(三華土: 진흙, 누런 모래, 강회를 같은 비율로 섞어 이겨 만든 흙)를 써서 전돌과 전돌 사이를 메꾸어 나갑니다. 무늬가 있는 전돌은 미리 정해진 자리에 끼워 맞추면 되지만, 전돌의 모양과 배치를 이용해 구성하는 꽃담은 미장이들이 가진 고도의 기술과 경험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꽃담이 완성되면 무늬전돌 표면에 색을 입히는 과정도 거치게 됩니다(도 8).
<도 8> 창덕궁 청향각 굴뚝 서면 화조무늬 전돌
아마 이때는 단청장이 동원되었을 가능성이 크지만 화원한테 직접 맡겼을 수도 있습니다. 이렇듯 벽돌공과 미장이, 단청장이나 화원이 모두 참여하여 만드는 꽃담은 여러 장인들의 공동 작품이기도 합니다.
▲ 문화재청 파주남북출입사무소 문화재감정관실 한재원 감정위원
출처 / 문화재청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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