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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나호열 시인/詩

나호열 / 천국에 관한 비망록

by 丹野 2009. 10. 20.

 

                                                                  p r a h a

 

 

 

천국에 관한 비망록 / 나호열
     - 42.195㎞



천국을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옥을 통과해야만 한다
비록 이 길이 지옥에서 지옥으로 가는 길이라 하더라도
이 길이 천국에서 지옥으로 가는 길이라 하더라도
태어난 곳으로 거꾸로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이 길이 죽음으로 완성되는 천국으로 가는 길이라고
너무 짧거나 아니면 너무 긴 이 삶을 이야기하고 싶어진다
동전 떨어지듯 상쾌한 햇빛을 밟으며  
헤엄쳐 가거나 날아가거나
짙어지는 안개 속을 헤쳐나가기 위해서는 
차라리 눈감고 뛰어가리라
지옥은 아름답다 그리고 풍요롭다
고통의 신음과 환희의 웃음소리가 
꿀물처럼 갈증을 일으킨다
아름다운 사람아, 이윽고 내가 너에게 닿을 때
풀린 다리와 가쁜 숨과 땀내 가득한 한 마디 말로
굳게 닫힌 천국의 문이 열리리라
기다림으로 황폐해진 정원, 그 가슴팍에
한 톨의 검은 씨앗으로 너의 가슴에  깊이 파묻히련다
산도 넘다 보면 강이 되더라
흘러가다 보면 강도 산이 되더라 





지난 3월 30일 마라톤대회에 참가했다. 예정된 코스가 바뀌어 상암동 월드컵 경기장에서 한강 북변 고수부지를 따라 성수대교를 돌아오는 시멘트 길이었다. 봄볕에 풀들은 연한 초록으로 빛나고 있었고, 강물은 가슴께로 알맞게 출렁거렸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새마을호가  달리는 그 시간 동안 천국과 지옥이 번갈아 가면서 머리속에 아른거렸다. 자꾸만 이 고통스런 현실이 천국일지 모른다는, 고통을 감내하며 도착한 골인지점이 천국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멈추지 않았다. 결국 상암동 월드컵 경기장을 출발하여 다시 같은 장소로 돌아오는 것... 生, 그 아득함....  

 

- 2003년 6월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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