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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소통이 문제인가 / 나호열
우리는 소통이 문제가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자연과 인간의 소통, 개인과 개인 간의 소통, 국가와 민족 간의 소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을 때 우리는 고통을 느끼고 절망을 하게 된다. 그런데 사실 따지고 보면 소통이 문제되지 않는 시대는 없었다. 자연과 인간의 불통은 신이나 무속을 매개로 할 때 외경과 공포의 극단을 오갔으며, 인간끼리의 불통은 애증의 방식으로, 국가와 민족 간의 불통은 전쟁의 광포함으로 소통을 꿈꾸어 왔다. 그러나 우리가 행해 왔던 소통의 방식은 이데아일 뿐이지 현실태는 아니었으므로 어떠한 이데올로기도, 종교도 완벽한 소통을 이루어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방식의 소통이 아니라 무언가 다른 경로를 탐색하여야만 하는 간절한 욕구가 일어났고, 그 욕구를 실현시켜 줄 존재로 우리는 '시인' 이라는 새로운 인간을 선택했다. '시인'은 모방자라는 폄훼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남아 사제가 아니면서도 사제의 역할을 다해 왔고, 동물의 범주에서 인간을 탈출시키는 미감의 전달자로서, 문학과 철학의 아슬아슬한 경계를 넘나들었다. 시인은 현자이면서 예언자이었고, 때로는 선동가 煽動家의 역할까지도 기꺼이 감내해 내었다. 한 마디로 이 세상의 불협화음은 소통을 염원하는 외침인 까닭에 그 외침의 전달 뿐만 아니라 불협화음을 화음으로 치장하는 임무까지도 시인은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한 편으로 소통의 문제는 자연스럽게 소외의 영역으로 이행되어 간다. 소외는 소통의 부재뿐만 아니라 스스로 자기 자신을 폐쇄시킴으로서 소통의 부재를 극한으로 몰고 간다. 다시 말해서 오늘의 시인들은 타자의 소외를 위무하기 이전에 자신이 소외의 포위망을 헤쳐 나와야 하는 역경에 처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늘날의 시인들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 쌓아온 아우라를 잃고 자신의 역할에 대한 심각한 우울에 휩싸여 있다. 그 누구보다도 소통의 부재와 소외의 위해성을 절감하면서도 시인의 목소리를 경청 하는 사람들이 사라지는 것을 목도해야 하는 절망에 또 한 번 좌절하는 것이다.
자신의 내면으로 깊숙이 침잠하여 우주의 본질적인 씨앗을 찾아내거나 아니면 광대무변한 우주 저 너머로 예지의 눈길을 던지거나 간에 시인의 궁극적인 목표는 시인 자신의 존재 증명에 다름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종합적 구성체로 인식하는 태도와 단자와 같은 낱개로 세분화된 것으로 이해하는 분석적 태도 사이에서 한없이 망설이고 있는 형국이 오늘날 시인이 처해 있는 현 주소 임에는 틀림 없다
한 마디로 오늘날의 시인은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과도 같다. 밤이 되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별은 그 별을 인식하고 그 의미를 되새기며 하늘을 우러르는 사람들에게만 별이 된다. 시인은 밤하늘의 별, 현현하면서도 숨어 있을 수밖에 없는 은자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시인이 자신에게 묻는 질문은 이런 것이다.
"나는 시인의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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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보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시인의 욕망은 세속적인 것과는 사뭇 다르다. 그것은 맑고 승화된 욕망이다. 나는 이를 이상적인 시정신으로 삼고자 한다. 이 시정신은 진.선.미를 추구하고 염결과 절조를 중요시 하는 선비정신과 상통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는 언어의 정련 못지않게 정신의 정련을 필요로 하고 시인은 언어를 다루는 기술자이기 이전에 정신을 다스리는 수행자가 되어야 한다는 또 다른 언명은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시각은 조경옥의 시를 읽어가면서 공감대가 확대되어 가는데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니리라.
우주의 숨소리를 음각 陰刻하는 隱者-'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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