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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나호열 시인/세상과 세상 사이

좋은 시는 존재하는가? / 나호열

by 丹野 2009. 8. 17.





 

 

 

 

                         좋은 시는 존재하는가?

                                                                                           나 호 열

 

 



좋은 시와 나쁜 시의 구분이 있는가? 이 질문 자체가 우문이지만, 그러면서도 이 질문은 여전히 우리의 뇌리 속에 맴도는 나쁜 악령과도 같다. 시를 쓰려고 펜을 드는 순간부터 이 악령은 끈질기게 우리에게 속삭인다. "너는 좋은 시를 써야 해"

그런데 우리는 좋은 시와 나쁜 시의 평가기준을 도대체 헤아릴 수가 없다. '좋음'과 '나쁨'의 경계가 모호하고, 시의 정의가 애매하다. 그래서 우리는 문학전문가와 그들의 평론이라는 심판관이 헤아려 준 길을 따라서, 즐기고 느끼는 감상의 즐거움을 놓쳐버리고서 풍문과 위족에 함몰되는 경우가 많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 좋은 시는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좋은 시의 전형이 존재한다면, 예술은 그 순간에 소멸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세상에는 수많은 나쁜 시가 존재한다. 과연 '좋은 시'는 끊임없이 원형의 텍스트를 복제하는 자기증식의 길인가? 하나의 원형에, 이데아에서 파생되는 시들은 그렇다면 다 나쁜 시라는 사생아들인가?

그러므로 좋은 시를 읽고 쓰려는 욕망은 행위에 앞서고 목적에 우선한다. '시'라는 관념 속에는 이미 '좋은', '훌륭한'등의 가치가 포함되어 있다. 시를 쓰겠다는 열망에 휩싸이는 자는 자기를 '쓰는' 것이고, 자기를 '읽는' 것이다. 자기에게 쓰여지고 읽혀지는 것이 시인이라는 존재이다. 시인은 평판이나 풍문과 맞서면서 소멸의 흔적을 남기려는 존재에 다름 아니다.

3월이다. 만물이 소생한다는 상투적이고 기계적인 의식 속에서 권두시와 더불어 몇 편의 시를 읽는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문학상 수상작'이라는 꼬리표가 붙은 시와 여타의 시를 비교해 보면서 앞서의 우문을 다시금 떠올린다. 「피어라, 석유」는 요즘 한참 주목을 받는 여성 시인의, 여성성의 꽃핌과 운명적 좌절을 노래한 시이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여성성과 어느 먼 나라의 추악한 전쟁과 파괴에 잇대어 놓음으로써 시인과 세계의 몸섞음을 보여준다. 개별적이면서도 총체적인 것, 이것이 앞서 말한 '쓰고' '쓰임을 당하는' 시인의 예기치 않은 전략이다. 상상력은 예기되고 계획된 것이 아니라, 섬광처럼 스치고 지나가는 순간의 번쩍임이고, 시인은 그것을 포획하여 언어의 그물 속에 배열한다. 呪文처럼 시는 쓰여지는 것이다. 그래서 기존의 시적 전략과 형식을 자연스럽게 파괴하고, 복제의 마술을 거부한다.

이 글에서는 회원 시에 대한 개별적인 언급은 피하려고 한다. 시인들 각자가 체험한 내용들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 것이냐 하는 것은 별반 중요하지 않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개개인의 사소한 체험들이 사실은 세상이라는 괴물과 은밀히 내통하고 있으며, 그럼으로써 몸서리쳐지는 그 내통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을 수 없다는 절실함이 배어 있느냐의 여부에 있다.
절실함은 '아픔'과 치환되고. '아픔'은' 언어의 옷에 입혀져 '아름다움'으로 탈바꿈한다. 처연한 아름다움이라면 적절한 표현일까? 못된 아름다움이라면 또 어떨까?
이번 호에 게제된 시들의 전체적인 느낌은 그런 것이었다. 개별적인 체험이 세계의 원융 속에 몰입되는 작품이 드물었다는 것이 3월과 수상한 봄의 수선거림과 분주함의 탓은 아닌지 모르겠다. 비유는 배워지는 것이 아니라 사고의 방식과 밀접한 관계성을 갖는다. 세상과 사물을 인식하는 방식에 따라서 상상력에 의존하여 덧붙여 나오는 것이 기교이고 기술이다.

그에 앞서서 중요한 것은 체험의 밀도를 어떻게 절실함으로 이끌어 가는 것일 것이다.
어떤 사람이 교통사고를 당해 길 위에서 죽었다고 하자. 그것이 극적인 죽음이 아닌 한, 그 사람이 인구에 회자되는 사람이 아닌 한 신문이나 방송에서 취급되지 않는다. 한마디로 뉴스거리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그 광경을 목격한 시인은 그 한가지 체험으로 다양한 세계를 구성할 수 있다. 죽음 그 자체, 자동차라는 기계, 존재의 순간적 소멸, 문명에 대한 성찰, 과거의 기억 등...무수한 상상들이 일어나고 그 중에서 가장 절실한, 아픔으로 다가오는, 그러면서도 그것이 개인적 체험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공공의 사유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통로를 보여주는 것이 시인의 임무이기도 하다.

너무나 당연하고 필연적인 요구지만 시인은 자나깨나 시인이어야 한다, 권두시로 올려진 김선우 시인의 또 다른 시 한편을 봄의 발밑에 내려 놓는다.

완경(完經)


수련 열리다
닫히다
열리다
닫히다
닷새를 진분홍 꽃잎 열고 닫은 후
초록 연잎 위에 아주 누워 일어나지 않는다
선정에 든 와불 같다

수련의 하루를 당신의 십 년이라고 할까
엄마는 쉰 살부터 더는 꽃이 비치지 않았다 했다

피고 지던 팽팽한
적의(赤衣)의 화두마저 걷어버린
당신의 중심에 고인 허공

나는 꽃을 거둔 수련에게 속삭인다
폐경이라니, 엄마.
완경이야, 완경!


소요문학 2004년 3월호 시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