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눈망울 外 / 나호열
어떤 눈망울 外 / 나호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은
천 길인 듯 만 길인 듯
제 마음을 들여다보는 눈입니다
그 끝간데 없는
깊은 우물 속에서 길어 올린
눈물 한 방울로
이 세상을 바라보는,
이 세상 가장 아름다운 꽃은
새로운 아침을 맞이하는
우리들의 눈입니다
거울은 벽에 등을 대고 있다 / 나호열
내 가슴에 있는데
그대에게 편지를 쓴다
그대에게 전화를 건다
내 가슴에 있는데
멀리 숲을 돌아서 가고
가을 건너서 간다
한번도 나는 내 가슴에 닿은 적이 없다
너무 깊거나 어두워서
혹은 너무 뜨거울 것 같아서
나는 손을 가슴에 넣지 못한다
완강히
거울은 벽에 등을 대고 있다
하루 / 나호열
그 편지는, 어김없이, 내 앞에 놓여져 있다. 발신인이 없는 편
지는 수상하다. 나는 한번도 그 내용을 들여다 본 적이 없다. 되
돌려 보낼 주소가 없으므로 투덜대다가 아예 그것을 잊어버리
기로 한다. 집요하게 달려드는 흡혈귀처럼 날카로운 송곳니가
밀봉의 틈새로 언뜻 비치기도 한다. 장독대 정한수에 내려앉은
시린 그믐달 같기도 하다. 손을 집어넣으면 금세 바스라져 없
어져버릴 것 같아 뜯지 못하는 편지, 보고 싶은 유년의 거울이
깊은 우물 속에 담겨져 있을 것 같은 출렁거림.
나의 생애는 헤아릴 수 없는 낙엽과 햇살로 가득 찬다. 수없
이 피고 졌던 꽃들과 새들의 지저귐. 내가 버렸던 편지는 눈
보라가 되어 나보다 먼저 눈물을 밤길에 밝힌다. 어차피 해독
할 수 없는 것이라면 더 잊어야 할까 먼 길을 더욱 멀리 돌아
가라는 튼실한 신발 한 켤레 일까 평발인 나는 오래 걸을 수가
없다
2월의 시 / 나호열
새 살이 돋아 오르나 보다
따갑고 아린 상처 위로
새 순이 올라 뽀죡한 느낌
그럴수록 바람을 빼고
이렇게 낮은 자세로 하루를 보내면
몇 개의 못들이 더 깊이 박히거나
떨어져 버린다
조금씩 삐걱거리며 헐거워져 가는
마른 몸매의 시간이
화장 고치듯 상처의 흔적을 지워가도
옹골찬 돌멩이
비난하며 던진 말의 뼈들은
온전히 체중으로 남아 있다
더 멀리,
헤어지지 않으면 바라볼 수 없는
별빛,
함께 있으므로 불편해 하며
단식과 눈물로 아프게 주고 받는
초와
불처럼
비가 오고 비가 가네 / 나호열
걸어가는 비를 보았나
늙어가는 비를 보았나
잊혀지는 비를 보았나
걸어서 늙어가고 늙어서 잊혀지는
원문은 보이지 않고
주석만 달려 있는 생
살아서 비석이 되고 싶다
돌밭 한 가운데 서서
몰매 맞고 싶다
죽은 채로 살아 있는 비석이 아니라
썩어가며 사라지는
사라지며 잊혀지는
보라 저 울울한 숲의 장엄한 비석들
말을 버리고도
경전 한 말씀으로도
우뚝한 저 나무들
달팽이의 꿈 / 나호열
오늘도 느릿느릿 걸었다
느릿느릿 뛰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느릿느릿 걸었다
성급하게 인생을 걸었던 사랑은
온몸을 부벼댈 수 밖에 없었던
세월 앞에 무릎을 꺾었고
나에게는 어차피 도달해야 할
집이 없다
나는 요가 수행자
잔뜩 몸을 웅크리고 잠을 집어 넣는다
언제나 노숙자인 채로
나는 꿈을 꾼다
내 집이 2인용 슬리핑 백이었으면 좋겠다
그리운 옛집 / 나호열
나는
나의 옛집이다
이른
봄나무
얼굴에
꽃 피지 않고
잎 올리지 않고
펄럭이는 그것
견인이동통지서
나를 끌고 가겠다는 그를
기다리고 있다
오십 년 째
별에게 돌을 던지다 / 나호열
표적도 가늠하지 않고
허공을 향한 돌팔매질에
고양이처럼 웅크린 어둠이
꿈틀거린다
소리도 내지 않고 잠시 아픔을 참는지
별 몇 개가 깨지는 밤
아픈 사람들이 모여 사는 집에서
그들의 숨소리를 가슴에 넣는다
모자라고 어리석다고 내가 던진 돌들이
가슴으로 돌아와 반짝거린다
그들에게 돌려받은 눈물
내일의 양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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