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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향기로 말을거는 詩

밥이나 먹자, 꽃아 / 권현영

by 丹野 2009. 3. 3.

 

 

 

밥이나 먹자, 꽃아

 

 권현영

 

 

 

나무가 몸을 여는 순간

뜨거운 핏덩이가 뭉클 쏟아지듯

희고 붉은 꽃떨기들이

허공을 찢으며 흘러나온다

 

봄 뜨락에 서서 나무와 함께

어질머리를 앓고 있는데 꽃잎 하나가

어깨를 툭 치며 중심을 흔들어 놓는다

누군가의 부음을 만개한 꽃 속에서 듣는다

 

오래 전 자본론을 함께 뒤적거리던

모임의 뒷자리에 말없이 앉아 있던

 

그 큰 키가 어떻게 베어졌을까

 

촘촘히 매달려 있는 꽃술들이 갑자기

물기없는 밥알처럼 푸석푸석해 보인다

입안이 깔깔하다

 

한 번도 밥을 먹은 적 없이

혼자 정신을 앓던 사람아 꽃아

 

모를 일이다 누가 아픈지

어느 나무가 뿌리를 앓고 있는지

꽃아,  일 없이 밥이나 먹자

밥이나 한 끼 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