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이나 먹자, 꽃아
권현영
나무가 몸을 여는 순간
뜨거운 핏덩이가 뭉클 쏟아지듯
희고 붉은 꽃떨기들이
허공을 찢으며 흘러나온다
봄 뜨락에 서서 나무와 함께
어질머리를 앓고 있는데 꽃잎 하나가
어깨를 툭 치며 중심을 흔들어 놓는다
누군가의 부음을 만개한 꽃 속에서 듣는다
오래 전 자본론을 함께 뒤적거리던
모임의 뒷자리에 말없이 앉아 있던
그 큰 키가 어떻게 베어졌을까
촘촘히 매달려 있는 꽃술들이 갑자기
물기없는 밥알처럼 푸석푸석해 보인다
입안이 깔깔하다
한 번도 밥을 먹은 적 없이
혼자 정신을 앓던 사람아 꽃아
모를 일이다 누가 아픈지
어느 나무가 뿌리를 앓고 있는지
꽃아, 일 없이 밥이나 먹자
밥이나 한 끼 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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