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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나호열 시인/詩

나호열 시집 『바람과 놀다』 ㆍ 나호열 시선집

by 丹野 2022. 12. 23.

 
 

 

나호열 시선집 『바람과 놀다』


#나호열 시집

 

한국대표서정시 100인선 100   시선사 2022.12
 
 
 
 

시인의 말
 
 
  시선집 『바람과 놀다』는 그동안 간행되었던 여러 시집에서
주제별로 뽑은 시들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사랑에 대한
여러 생각들을 표출한 시들이고 2부는 생활의 주변에서 
쉽게 마주치게 되는 동물들을 삶의 양태와 빗댄 시들을
가려 뽑았으며, 3부는 그동안 간행되었던 시집들의 표제시를
모아 보았다. 마지막 4부는 주마간산 여행의 편린들이다. 
그동안 펴낸 20여 권의 시집에서 난삽하지 않고 삶의 현장에서
부딪친 소회를 담은 무겁지 않은 시들을 골랐다. 어느덧 종심(從心)에
이르러 그동안 시업(業)을 정리하는 의미를 부여하면서 살펴보았으나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정신의 미숙함이 드러나듯 하여 얼굴이 붉어진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계기로 삼을 수 있을 것도 같아
분발심이 일어나는 것도 사실이다. 문여기인(文如其人)의 화두를 가슴에
품었으나 아직도 갈 길은 아득하게 멀다.
 
2022년 12월
 
나 호 열

 
 

 
 
 
 
바람과 놀다
 
나호열
 
산 사람보다 죽은 사람들이 더 많이 살고 있는
고향으로 갑니다
어느 사람은 서쪽으로 흘러가는 강이냐 묻고
어느 사람은 죽어서 날아가는 먼 서쪽하늘을 그리워합디다만
서천은 에둘러 굽이굽이 마음 적시고
꿈을 입힌 비단 강이
어머니의 품속 같은 바다로 잦아드는 곳
느리게 닿던 역은 멀리 사라지고
역 앞 허름한 여인숙 어린 종씨는
어디서 늙고 있는지
누구에게 닿아도 내력을 묻지 않는 바람이 되어
혼자 울다가 옵니다
 
 
 
 
 
 
 
봄비
 
나호열
 
 
알몸으로 오는 이여
맨발로 달려오는 이여
굳게 닫힌 문고리를 가만 만져보고 돌아가는 이여
돌아가기 아쉬워
영영 돌아가지 않는 이여
발자국 소리 따라
하염없이 걸어가면
 
문득
 
뒤돌아 초록 웃음을 보여주는 이여
 
 
 
 
 
 

 
 
 
 
당신에게 말 걸기
 
 
나호열
 
 
이 세상에 못난 꽃은 없다

화난 꽃도 없다

향기는 향기대로

모양새는 모양새대로

다, 이쁜 꽃

허리 굽히고

무릎도 꿇고

흙 속에 마음을 묻은

다, 이쁜 꽃

그걸 모르는 것 같아서

네게로 다가간다

당신은 참, 예쁜 꽃
 
 
 
 
 
 
 
사랑은
 
 
나호열
 
 
 
사랑은 
꽃이 아니다
꽃 지고 난 후의 그 무엇
 
사랑은 열매가 아니다
열매 맺히고 난 후의 그 무엇
 
그 무엇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애
우리는 사랑한다
 
이 지상에 처음으로 피어나는 꽃
이 지상에 마지막으로 맺히는 열매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한다
 
 
 
 
 
 
밤에 쓰는 편지
 
나호열
 
먹을 갈아 정갈해진 정적 몇 방울로 편지를 쓴다
어둠에 묻어나는 글자들이 문장을 이루어
한줄기 기러기 떼로 날아가고
그가 좋아하는 바이올렛 한 묶음으로 동여맨
그가 좋아하는 커피 향을 올려 드리면
내 가슴에는 외출중의 팻말이 말뚝으로 박힌다
내가 묻고 내가 대답하는 그의 먼 안부
동이 트기 전에 편지는 끝나야 한다
신데렐라가 벗어놓고 간 유리구두처럼
발자국을 남겨서는 안 된다
밤에 쓰는 편지는 알코올 성분으로 가득 차고
휘발성이 강해야 한다는 사실을 나는 안다
그가 깨어나 창문을 열 때
새벽 하늘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푸르러야 한다
맑은 또 하나의 창이어야 한다
오늘도 나는 기다린다
어둠을 갈아 편지를 쓰기 위하여
적막한 그대를 호명하기 위하여
 
 
 
 
 
 

                                                                                                  건봉사
 
 
 
건봉사, 그 폐허
 
나호열
 
   온몸으로 무너진 자에게 또 한번 무너지라고  
  넓은 가슴 송두리째 내어주는 그 사람  
  봄이면 이름 모를 풀꽃들에게 넉넉하게 자리 내어주고  
  여름에는 우중첩첩 내리쏟는 장대비 꼿꼿이 세워주더니  
  가을에는 이 세상 슬픔은 이렇게 우는 것이라고 풀무치, 쓰르레미, 귀뚜라미  
  목청껏 울게 하더니  
  겨울에는 그 모든 것 쓸어담아 흰 눈으로 태우는  
  건봉사, 그 폐허  
  나도 그에게로 가서  
  그대의 폐허가 되고 싶다  
  아무렇게 읽어도 사랑이 되는  
  사랑을 몰라도 눈물이 되는  
  바람의 집  
  그대의 종이 되고 싶다
 
 
 
 
 
 
 
 
눈물이 시킨 일
 
나호열
   
 
 
한 구절씩 읽어가는 경전은 어디에서 끝날까
경전이 끝날 때쯤이면 무엇을 얻을까
하루가 지나면 하루가 지워지고
꿈을 세우면 또 하루를 못 견디게
허물어 버리는,
그러나
저 산을 억 만 년 끄떡없이 세우는 힘
바다를 하염없이 살아 요동치게 하는 힘
경전은 완성이 아니라
생의 시작을 알리는 새벽의 푸르름처럼
언제나 내 머리맡에 놓여져 있다 
나는 다시 경전을 거꾸로 읽기 시작한다
사랑이 내게 시킨 일이다
 
 
 
 
 
 
 
 
감포 가는 길
 
 
나호열
 
누구나 한 번은 이렇게 아름다운 길을 걸어보게 된다
나비의 날갯짓처럼 이리저리 굽이치는
길의 끝을 보았던 기억이 있다
그 길의 끝에는 마음을 다하여
기쁨으로 치면 기쁨으로
슬픔으로 다가서면 슬픔으로 울리는 바다가 있음을
꿈꾸듯 살아왔음을
누구나 기억하고 있다
 
때아닌 나비 떼
눈 한 번 크게 뜨니 성성한 눈발이더니
다시 한 번 눈감았다 보니 너울대는 재들
바다 쪽으로 불어가는 바람을 따라
아름답게 사라져 버리는 추억을
데리고 가는 길
 
 
 
 
 
 
 

 
 
 
낙타에 관한 질문
 
나호열


낙타를 보면 슬프다
사막을 건너가며 
입 안 가득 피 흘리며
거친 풀을 먹는다는 것이
사막에서 태어나서
사막에서 죽는다는 것이
며칠이고 사막을 건너가며
제 몸 속에 무거운 물을 지고
목마름을 이기는 것이
낙타를 보면 못 생겨서 슬프고
등 위로 솟은 혹을 보면 슬프다
낙타가 나를 본다
낙타가 이상한 낙타를 보고 웃는다
내장된 그리움으로
삶의 사막을 건너가는 것이
얼마나 기쁘냐
갈증을 견뎌내는 
오아시스를 향한 눈빛이
얼마나 맑으냐

그래서 나는
낙타의 낙타가 되었다
 
 
 
 
 
 
 
봉선사 종이 울리면
 
 
나호열
 
봄밤 아득하게 피어나 홀로 얼굴 붉히는 꽃처럼
여름 한낮 울컥 울음 쏟아내고 가는 소나기처럼
가을이 와서 가을이 깊어서
제 몸을 스스로 벗는 나뭇잎처럼
잊지 않으려고 되내이다 하얗게 삭아버린 이름
한 겨울의 눈처럼
 
쿵과 두우ㅇ 사이
 
나는 빈 찻잔에
소리의 그림자를 담는다
눈으로 
적막의 눈으로 소리를 마신다
 
 
 
 
 
 
 

 
나호열
 

북은 소리친다

속을 가득 비우고서

가슴을 친다

한 마디 말 밖에 배우지 않았다

한 마디 말로도 가슴이

벅차다

그 한 마디 말을 배우려고

북채를 드는 사람이 있다

북은 오직 그 사람에게

말을 건다

한 마디 말로

평생을 노래한다
 
 
 
 
 
 

 
 
 
 
7번 국도
 
 
나호열
 
 
북행,
밀려 내려오는 바람을 피할 수는 없다
우리에게 밀려오는 외로움도 저와 같아서
저절로 눈시울 뜨거워지고 살이 에인다
남하하는 새떼들 묵묵히 하늘가를 스치고 난 후
한 마디 울음소리가 가슴에 서늘할 때
오른쪽 팔목을 잡는 바다
끝끝내 따라온다
줄 것도 없고 받을 것도 없는 공의 바다
옆구리 쪽으로 통증이 기운다
관동팔경의 몇 경을 지나왔나
절벽에서 꽃을 따던 신라 할배
백 보 바다로 나아가 보니
흩뿌리는 눈보라가 저홀로 마을을 지나고 있다
 
 
 
 
 
 
 
 
 
 
얼굴   
-봉감 모전 오층 석탑
                                       나호열

  아무도 호명하지 않았다. 까마득하게 오래 전부터 
어디로 흘러가는지 모를 맑은 물가에 나아가 홀로 
얼굴을 비춰보거나, 발목을 담궈보다가 그 길 마저 
부끄러워 얼른 바람에 지워버리는 나는 기댈 곳이 없다. 
그림자를 길게 뻗어 강 건너 숲의 가슴에 닿아보아도 
나무들의 노래를 배울 수가 없다
 
  나에게로 가는 길이 점점 멀어진다. 떨어질 낙엽 대신
굳은 마음의 균열이 노을을 받아들인다. 늘 그대 곁에
서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깨에 기댄 그대 때문에
잠깐 현기증이 일고 시간의 열매인 얼굴은 나그네만이 알아
본다. 흙바람을 맞으며 길을 버린 그대가 하염없이 작다
 
 
*봉감 모전 오층 석탑 : 경북 영양군 입압면 산해리봉감마을 밭 가운데 서 있는 模塼 석탑이다
 
 
 
 
 
 
 
눈부신 햇살
 
나호열


아침에 눈부신 햇살을 바라보는 일이 행복이다
눈뜨면 가장 먼저 달려오는
해맑은 얼굴을 바라보는 일이 행복이다
아무도 오지 않은
아무도 가지 않은
새벽길을 걸어가며
꽃송이로 떨어지는
햇살을 가슴에 담는 일이 행복이다
가슴에 담긴 것 모두 주고도
더 주지 못해 마음 아팠던
사랑을 기억하는 일이 행복이다
 
 
 
 
 
 
 
병산(屛山)을 지나며
 
 
나호열
 


어디서 오는지 묻는 이 없고
어디로 가는지 묻는 이 없는
인생은 저 푸른 물과 같은 것이다
높은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어리석음이
결국은 먼 길을 돌고 돌아
제 자리로 돌아오는 것임을
짧은 인생이 뉘우친다
쌓아올린 그 키만큼
탑은 속절없이 스러지고
낮게 기어가는 강의 등줄기에
세월은 잔 물결 몇 개를 그리다 만다
옛 사람 그러하듯이 나도
그 강을 건널 생각 버리고
저 편 병산의 바위를 물끄러미 쳐다보려니
몇 점 구름은 수줍은 듯 흩어지고
돌아갈 길을 줍는 황급한 마음이
강물에 텀벙거린다
병산에 와서 나는 병산을 잊어버리고
병산이 어디에 있느냐고 손사레를 치고 있다


* 병산屛山 : 경북 안동시 풍산 하회 낙동강변의 산. 산허리에 병풍처럼 바위가 띠로 둘러져 있어 병산이라 일컫는다. 서애 유성룡의 위패를 모신 사액서원 병산서원이 있다.
 
 
 
 
 
 
 
아침에 전해준 새 소리
 
 
나호열
 
 
죽지 않을 만큼만 잠을 잔다
죽지 않을 만큼만 먹고
죽지 않을 만큼만 꿈을 꾼다
죽지 않을 만큼만 말을 하고
죽지 않을 만큼만 걸어간다
그래야 될 것 같아서
누군가 외로울 때
웃는 것조차 죄가 되는 것 같아서
그래야 될 것 같아서
아, 그러나,
그러나
모든 경계를 머물지 않고
죽지 않을 만큼만 사랑 할 수는 없다
누구나 말하지 않는가
죽을 때까지 사랑한다고
나는 그 끝마저도
뛰어넘고 싶다
 
 
 
 
 
 
 
 
나호열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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