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딴집
이승희
여름은 찬란했고 비로소 폐허가 되었다
이제 어디론가 가지 않아도 된다
진화는 그런 것일 수도 있다
다리가 모두 사라질 때까지
두 팔이 어디까지 사라지는지 보려고
사라지는 것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보려고
여름이 외롭고 슬픈 얼굴로 자꾸 돌아보았지만
내 것이 아닌 것들이
자꾸 무언가 되는 걸 보고 있었다
구름 같기도 한
나를 낳은 것들 같기도 한
돌아보면 아무도 없고
쓸쓸하다는 말
그런 말은 미래가 될 수 없었다
무언가가 시작된다면
여기서부터여야 했다
화분을 들이고
온종일 화분에 심어져 있거나
화단에 물고기를 풀어주고
온종일 물고기를 따라다녔다
밤이면 물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꿈을 꾸었고
새로운 것은 없지만
새롭지 않은 것도 없어서
여기와 저기가 국경을 걸어서 지나던 밤처럼
어루만질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슬픔밖에 가진 게 없다는 말은 하는 게 아냐
반쯤 사라진 것들은 또 반쯤 생겨난 것들
진화는 그런 것이 아닐 수도 있지만
마음이 잠시 따뜻해지기도 하니까
그건 너무 쉬운 일이기도 하니까
—계간 《시사사》 2022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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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희 / 1965년 경북 상주 출생. 1997년에 《시와 사람》신인상으로, 1999년에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저녁을 굶은 달을 본 적이 있다』 『거짓말처럼 맨드라미가』 『여름이 나에게 시킨 일』.
출처 / 푸른 시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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