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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향기로 말을거는 詩

허밍은 거침없이 / 이병철

by 丹野 2022. 9. 6.

허밍은 거침없이


   이병철




잉어는 평화롭게 헤엄치지만
물을 벗어날 수 없고
물은 거침없이 흐르지만
보를 넘어갈 수 없네

물을 벗을 수 없는 잉어의 자유와
보를 넘을 수 없는 물의 질주는
악보 안에서 평생을 사는 바이올린처럼
아름답고 성실한 반복을 연습하는 중

잉어는 평화롭고 물은 거침없고
바이올린은 느릿느릿 헤엄치다 격렬히 달려가고
나는 그 반복 속을 걷다가
새로운 해석에 또 실패한다

물을 벗어날 수 없는 잉어가 머릿속으로 헤엄쳐 오고
보를 넘을 수 없는 물이 오후의 감정을 파랗게 적시고
악보 밖으로 나온 바이올린이 내 허밍을 연주해도
불가능한 것은 다 생각 안에만 있네
생각이라는 단어를 사랑으로 바꿀 수도 있겠지만

잉어와 물은 음악처럼 흐르고
강이 얼면 흐르는 것에서 음악이 분리되고
멈춰버린 반복은 또 다른 반복으로 흐른다는 내 생각이
비로소 풍경이라는 불가능을 자유롭게 풀어놓을 때
나는 천변에 살지 않으면서
천변을 벗어날 수 없는 귀신이 되었네

이제 생각은 평화롭고 허밍은 거침없고
바이올린은 같은 곡을 연주하지만
다르게 듣는 귀가 생겼다 얼음이 녹아
물이 흐르고 잉어가 헤엄치는 천변을 걷는다

해석이 막 시작되었다
해석이라는 단어를 사랑으로 바꿔도 좋다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계간 시 전문지 《애지愛知》 2021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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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 / 1984년 서울 출생. 2014년《시인수첩》시, 2014년《작가세계》문학평론 등단. 시집『오늘의 냄새』, 평론집 『원룸 속의 시인들』.

 

 

 

 

- 출처 / 푸른 시의 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