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바람의 궁전
丹野의 깃털펜/시집『내가붉었던것처럼당신도붉다』

늙은 집

by 丹野 2019. 8. 12.



늙은 집

 

김경성

 

 


슬픔도 오래 묵히면 붉은 꽃으로 피어날 수 있는가

달팽이관으로부터 시작된 실금이 문 쪽으로 흘러가더니

문턱에서 멈추었다

이내 싸르락 소리를 내며 뜨거운 물이 아래층 천장을 타고 흘러갔다

밤의 정적을 깨는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내 속에서 나온 뜨거운 숨도 순식간에 틈으로 스며들어서

벽을 타고 같이 내려갔다

 

먹구름으로 달빛을 찍어가며 비가 내릴 때

사라진 달빛을 찾아서 찰진 바람이 몇 차례나 뒤척이다가 갔다  

한쪽 눈이 먼 형광등은 빛을 좇아 껌벅거리고

늙은 애자를 감고 있는 전깃줄에서는 퍼드득 불꽃이 일며

집의 안과 밖이 순식간에 요동쳤다 

 

늙은 집이 하혈을 했다  

제 속에 고여있는 꽃물을 터트렸다

오래 익어서 검붉은, 그 꽃을 보여주려고

밤새도록 뒤척거렸다

미처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는 붉은 꽃물을 퍼내며

그 속에 가라앉은 것들을 손으로 읽고 눈에 들였다 

 

비 내리는 밤,  

참을 수 없었던 아주 오래된 말을 읊조리는

늙은 집의 뱃구레에서 피어나는 꽃을 보았다

 

 

  - 계간 시와산문2016년 봄호





'丹野의 깃털펜 > 시집『내가붉었던것처럼당신도붉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따뜻한 황홀  (0) 2019.08.12
시위를 당기다  (0) 2019.08.12
빈방 / 김경성  (0) 2019.08.12
적산가옥  (0) 2019.08.12
적멸의 방  (0) 2019.0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