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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丹野의 깃털펜/풍경이 되고싶은 詩

존재의 인식, 그 허무와 자유 / 이충이

by 丹野 2015. 5. 30.

 

 

 

 

 

 

존재의 인식, 그 허무와 자유

이충이

 

 

 

 

김경성의 「추전역杻田驛」은 첫행 “꼬리지느러미 오른쪽에 앉았다”부터 시적 감수성과 상상력의 구체성이 강렬했다. 시의 전개는 일체의 대상이나 연상되는 사물을 상투적인 상황과 다르게 표출하며, 우리의 외롭고 쓸쓸한 삶을 제시하고 있다. 어딘가 외롭고 간절한 쓸쓸함이 잔물결처럼 밀려온다. ‘추전杻田’이라는 풍경 속의 풍경에서 슬픔이 힘이 되는 새벽처럼 담백하게 살아있다.

우리는 마지막 행 “당신의 옆줄에 기대어서 생도 저물어 간다”에 도달하기 전에 어떤 이야기나 어떤 감정에 휩쓸려서 지루한 일상을 아무렇지 않게 떠나고 싶어진다. 이런 감정이입은 나름대로 언어에 대한 간결성과 특유의 리듬을 가졌기 때문에 가능하며 존재의 들여다보기를 통해 깊은 외로움 속으로 터지는 김경성만의 어휘이다.

 

꼬리지느러미 오른쪽에 앉았다

한 번 몸을 비틀 때마다

오른쪽으로 기울어지는 아가미 속으로

산길 꾸러미가 흘러들어 갔다. 검은 길은

등지느러미 따라 들어가고 물박달나무는 제 몸의 비늘을 벗겨서

속 길을 그렸다

미처 다하지 못한 말들이 얼마나 많은지

연필심이 제 몸의 뼈대가 된

추전역, 이따금 밑줄을 긋고 가는 물고기가 없다면

문장은 이어나가지 못할 것이다

4B연필로 그어놓은 산길 위에 산란하는 물고기 떼

배지느러미에 말간 알을 가득 안고 바다 쪽으로 흘러갔다

당신의 옆줄*에 기대어서 생도 저물어 간다

 

 

*물고기의 옆줄(측선)은 물의 온도, 흐름, 수압, 진동을 감지한다

 

──「추전역」 전문

 

 

이 시는 사물이나 대상에 대한 관심과 진심이 없다. 내면의 실체를 볼 수 없다. 일상에 펼쳐진 대상이나 의미를 길어 올리는 일은 여전히 시인의 몫이다. 제대로 보고 투사했기 때문에 이 시의 의도가 잘 살아난다. 그래서 시작詩作의 행위는 인식의 그림으로 옮겨진다. 이것이 남과 다르게 이룬 자신의 삶을 변주해 더욱 신선하게 느껴진다.

「추전역杻田驛」은 하늘에 가까운 첫 번째 간이역이다. 처음과 끝이 공존하는 곳이다. 여기에 인간의 내면과 일상적 가치가 존재한다. 간이역을 익명으로 불러낸다. 석탄가루 내려 깔린 철길을 따라 “물고기”처럼 오르내리며 객차는 몸을 “오른 쪽”으로 틀었다. 아니 우리를 깨우기 위해 기우뚱거렸다. 이 시는 행을 조금씩 전이시키면서 신선한 자극을 준다. 어느 부분에서나 시어의 선택이 탁월하다. 이런 선택은 시뿐만 아니라 삶에서도 거듭되는 질문이다. 이런 것들이 삶의 고리를 연결하는 이야기가 된다. 특히 “지느러미”, “아가미”, “꾸러미”, “길”, “물박달나무”, “비늘”, “연필심”, “물고기” 등에서 연상과 환상이 간결하게 묘사되다가 마지막 행 “당신의 옆줄에 기대어 내 생도 저물어 간다”는 절정에 이르게 된다.

어쨌든 「추전역杻田驛」은 시어와 행과 연이 어우러진 이미지를 창출하는 기법이 탁월하다. 이러한 시는 감성과 이성이 빚어내는 언어를 습득한 다음에야 가능하다. 김경성은 시를 쓰고자 한 대상에 틀을 잡아가는 세심한 과정을 꿰뚫고 있다. 어딘가에 가서 어떤 풍경을 보는 집중력도 강렬하다. 짧은 순간이라 할지라도 강도 높은 집중력 때문에 오랫동안 숨겨진 채로 있을 대상의 특성을 식별해 표출시키는 능력이 돋보인다. 이렇게 표현하기까지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쳤을 것이다.

 

 

 

 -『시와산문』2012년 겨울호

 - <계간평- 존재의 인식, 그 허무와 자유 "부분" / 이충이>

 

 

이충이 / 1943년 목포에서 태어났으며 1984년 『월간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빛의 파종』 외 4권이 있고, 시선집 『달의 무게』가 있다. 윤동주문학상, 자유시인상, 녹색시인상, 한국기독교문학상을 수상했으며 현재 『시와산문』 발행인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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