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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丹野의 깃털펜/시집『내가붉었던것처럼당신도붉다』

산당화 옆 느티나무

by 丹野 2019. 8. 12.

 

 

 

 

 

 

 

 

  산당화 옆 느티나무

  

  김경성

 

 

 

  단지 예감할 뿐, 어디로

  흘러가는지 나는 모르겠다

  얼마나 오래 허공의 지문을 읽고 있었는지 한쪽 어깨가 저리다

 

  알맞은 햇빛과 물과 바람 그리고 한 줌의 마음이면 괜찮다고 했지만, 움푹 팬 옆구리를 치고 들어오는

  견딜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실낱같은 어떤 기류를 예감하지 못한 채 전부를 다 드러내놓고 비에 젖은 그림자를 말리거나 눈송이를 모닥모닥 모아서 길을 이어갔다

 

  가지 끝에 닿을 듯 닿을 듯 피어있는 산당화 입속으로 드나들며 한쪽으로만 자꾸 기울어지는 것이 붉음 때문이었다고 말해도 될까

 

  긴 손가락에 걸리는 말들은 모두 몸속 우물이 되었다

  일렁이는 우물은 해마다 한 켜씩 제 몸을 늘려가고 깊어질수록 우물 담장은 낡아갔다, 고여서 발효된 것들은

  봄이면 일억만 장의 푸른 말이 되었다

 

  새들이 이마에 집을 들이고, 나비는 눈썹 끝에 더듬이를 올려놓으며 미늘 같은 그림자를 내려주었다

  

  수백 년 동안 한 자리에 서 있는 나는

  산당화 붉은 꽃 필 때 가장 빛이 난다, 꽃으로 피어나는 시간이다

 

 

<시산맥> 2015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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