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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향기로 말을거는 詩

온기 外 / 박미란

by 丹野 2014. 10. 13.

 

 

 

 

온기 (외 2편)

 

박미란

 

온기라는 말은

나무 밑으로 지나가는 한 사람을 바라보는 일

한참 바라보다가 잊어버렸으나

비 오고 난 뒤 다시 그를 생각하는 일

 

오래전 공터에 봄은 왔는데

 

사무친다는 말은

막 꽃 피우려는 노란 민들레에게

내년 꽃을 기억하라고, 기억해보라고

억지 쓰는 일

 

 

 

조각전

 

 

물고기 눈과 새의 날개가 가슴에 박힌 날

그때는 아무것도 몰랐다

 

물고기 눈은

저녁이 되려 하거나

전생을 떠올리지 않았고

 

새의 날개는

우레를 그리워하거나

지하세계로 날아가는 법을 잊어버렸다

 

한번 떠나오면 돌아갈 수 없다고

누가 말했을까

 

새들은 어느 방향으로 날아가는지

물고기는 어떻게 물살을 갈라야 하는지

 

물고기 눈과

새의 날개가

서로 가야 할 곳도 돌아올 곳도 잃어버린 채

심장에 나란히 박혀 있다

 

 

 

당신의 자리

 

 

뜨거운 냄비를 놓쳐 발등을 데인 후에야

멀리 가려는 너를 더 멀리 보내고

 

네가 앉았던 나무 그늘에 우두커니 앉아본다

절뚝거리며 걷다가 뒤돌아보는 사람처럼

내 어둠 들여다보는 동안

 

아픈 것은 저희들끼리 머물다가 떠나간다

 

뿌리가 깊어지는 소원을 가진 나무가 제 울음으로

잎사귀를 푸르게 물들이고 있다

 

그곳이 아픈 발등의 자리, 너의 자리다

 

 

 

 —시집『그때는 아무것도 몰랐다』(2014)에서

 

 

박미란 / 1964년 강원도 황지 출생. 계명대학교 간호학과 졸업, 계명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1995년 〈조선일보〉신춘문예 당선. 시집『그때는 아무것도 몰랐다』. 이메일 miran3366@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