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기 (외 2편)
박미란
온기라는 말은
나무 밑으로 지나가는 한 사람을 바라보는 일
한참 바라보다가 잊어버렸으나
비 오고 난 뒤 다시 그를 생각하는 일
오래전 공터에 봄은 왔는데
사무친다는 말은
막 꽃 피우려는 노란 민들레에게
내년 꽃을 기억하라고, 기억해보라고
억지 쓰는 일
조각전
물고기 눈과 새의 날개가 가슴에 박힌 날
그때는 아무것도 몰랐다
물고기 눈은
저녁이 되려 하거나
전생을 떠올리지 않았고
새의 날개는
우레를 그리워하거나
지하세계로 날아가는 법을 잊어버렸다
한번 떠나오면 돌아갈 수 없다고
누가 말했을까
새들은 어느 방향으로 날아가는지
물고기는 어떻게 물살을 갈라야 하는지
물고기 눈과
새의 날개가
서로 가야 할 곳도 돌아올 곳도 잃어버린 채
심장에 나란히 박혀 있다
당신의 자리
뜨거운 냄비를 놓쳐 발등을 데인 후에야
멀리 가려는 너를 더 멀리 보내고
네가 앉았던 나무 그늘에 우두커니 앉아본다
절뚝거리며 걷다가 뒤돌아보는 사람처럼
내 어둠 들여다보는 동안
아픈 것은 저희들끼리 머물다가 떠나간다
뿌리가 깊어지는 소원을 가진 나무가 제 울음으로
잎사귀를 푸르게 물들이고 있다
그곳이 아픈 발등의 자리, 너의 자리다
—시집『그때는 아무것도 몰랐다』(2014)에서
박미란 / 1964년 강원도 황지 출생. 계명대학교 간호학과 졸업, 계명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1995년 〈조선일보〉신춘문예 당선. 시집『그때는 아무것도 몰랐다』. 이메일 miran336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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