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사 철당간*
김경성
하루에 한 번씩 철당간 꼭대기에서 쉬었다가 가는
달의 모서리에 녹꽃이 피었다, 잎보다 꽃잎 먼저 피는 녹꽃
시간이 흐를수록 속으로 파고들면서 무르익는다
그림자를 내려다보며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는 그는
몸 끝에서 펄럭이던 당幢**을 그리워하기도 하지만
땅 위에서 어룽거리는 그림자를 꿈의 색깔로 덧칠해보기도 한다
대숲에서 이는 바람이 가끔 허리를 감싼다, 조금씩 떨어져 내리는 몸의 비늘은 쌓여서 미끄러지는 빛의 고랑이 일렁인다
땅속으로 스며든 빛이 달에서 피는 녹꽃처럼 소리의 꽃으로 피어나기도 한다, 그 꽃을 보려고 날마다 우물을 파는 사람이 있다 허리가 꺾이고 손톱이 빠지도록 삽질을 하며 뿌리를 찾는 일이 일생의 전부라고…
깊고 깊은 곳에서 펄럭이는 먼 기억의 시간을 써나가는 철당간 근처, 잠을 깨는 씨앗들 몽올몽올거리고
녹꽃을 파먹은 초승달은 다시 몸 불린다
단단하고 부드러운 녹청빛 새싹들 막 숨 터 오르는 때, 두 손에 가득히 모두어지는 생멸의 흔적들, 깃발에 새겨서 철당간에 건다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던 등뼈 꼿꼿한 저 그림자에서도
꽃물결이 일고
일고
* 절에서 기도나 법회 등 의식이 있을 때, 깃발을 달아 세우는 쇠기둥
**절에서 기도나 법회 때 내건 깃발
-『미네르바』 2014년 가을호
갑사 철당간 / 2010년
Pieter Wispelwey, Cello
Dejan Lazic, Pia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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