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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나호열 시인/詩 창작 강의

‘잘 쓴’과 ‘좋은’ 사이의 시 / 나호열

by 丹野 2014. 3. 26.

 

 

 

 

 

‘잘 쓴’과 ‘좋은’ 사이의 시

 

나호열

 

 

 

1

파레이돌리아Pareidolia 현상이라는 것이 있다. 1899년 조세프 재스트로우 Joseph Jastrow는 재미있는 한 장의 그림을 통해 우리의 감각적 기능(시각)이 편향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한 장의 간단한 그림, 왼쪽을 향해 보면 오리인데, 오른쪽으로 보면 토끼로 보이는 이 현상은 우리의 인식 이전에 자리집고 있는 총체적 경험이 바로 지금의 시각적 판단을 결정하는 것이라는 의미를 내포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우리는 우리가 본 것을 완벽하게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이 과학과 예술이 갈라서게 되는 출발점이 된다. 본질에 대한 믿음을 추구하는 점에서는 과학과 예술이 친구가 되지만 본질을 향해가는 방법에 있어서는 사뭇 다르다. 엄밀하게 작동하고 있는 규칙을 찾아가는 행위와 현상을 현상이겠끔하게 하는 에너지를 찾아가는 행위은 진술과 표현이라는 형식으로 차별화된다. 진술이 사실에 대한 기록이라면 표현은 사실에 대한 왜곡이거나 파레이돌리아의 정당화에 있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까닭에 다양한 목소리로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드러내는 표현은 넓게 보아서 시간적으로는 과거의 재현再現인 것이고 공간적으로는 마음 속에 들어온 관념의 재현이다. 그 재현은 개별적인 삶의 에너지를 확인하고 자기화하는 일차적 즐거움을 추구하는 한편, 타자와의 공유 共有를 염원하는 목표를 향해간다.

 

 

 

 

 

2

 

재현의 주체인 시인이 누리는 일차적 즐거움은 스스로 ‘잘 썼다’는 확인에서 비롯된다. 배설 排泄 또는 정화 淨化의 성취는 작품에 드러난 정조 情調와는 다르다. 그 정조가 희노애락 그 무엇이든 상관없이 재현의 대상에 대한 묘사만으로도 즐거움은 배가될 수 있다. 그러나 ‘잘 씀’의 문제는 대상의 묘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인식에 있다. 상식화된 인식, 축자적인 언어의 운용은 표현에 가닿지 못하고 진술에 그칠 우려가 많기 때문이다. 잘 된 표현은 의식의 공감 共感을 향해 가지만 사실적 진술은 동감 同感을 향해 간다. 그래서 대상에 대한 기계적 인식은 동감의 영역에 머무르게 되고 상상의 영역을 넘어간 추론이 불가능한 추상적 인식은 공감은 커녕 동감에도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게 된다. ‘잘 씀’의 대상이 사물이든 어떤 현상이든, 아니면 마음속에 들어와 있는 어떤 관념이든 간에 그 대상에 대한 묘사에 앞서 관찰과 숙고의 과정은 ‘잘 씀’의 필수적인 요건이 된다. 앞서 간략하게 파레이돌리아Pareidolia 현상을 언급한 바 있지만 지금, 이 순간의 인식은 선행한 체험의 심리적 각인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요점은 이런 것이다. 대상의 시적 묘사에 앞서서 꼼꼼이 따져보고 먼저 해야 할 일은 대상을 바라보는 인식의 눈을 맑게 닦고 초점의 새로움을 장착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시인 각자에게 주어진 인식의 한계 안에서 묘사하고자 하는 대상에게 이끌렸던 그 지점으로부터 회귀하여 이끌림의 원인을 추적하여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잘 쓴’ 시의 전범 典範이 될 것이다. 이렇게 간단하지 않은 과정을 겪어내고 난 후의 작품은 민들레 홀씨처럼 바람을 기다리게 된다. 멀리 가지 못하고 시인 자신의 발밑에 머무르게 될 지, 아니면 아주 먼 곳으로 날아가 미지의 독자를 통하여 또 하나의 생명을 잉태하게 될 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3

 

‘잘 씀’의 편차가 큰 것 보다 ‘좋음’의 층위는 훨씬 복잡하고 다양하다. 그렇다고 해서 ‘좋은 시’의 조건을 느슨하게 설정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우선 ‘좋음’의 기본적인 요건인 공감의 영역이 넓다는 것이다. 많은 독자들에 의해 호응을 받고, 정서의 고양을 성취하는 일은 지난한 일이지만 그만큼 그 위력은 작자에게나 독자에게나 절대적이다. 둘 째, 지금껏 마주하지 못했던 전인미답의 새로운 형식과 사유를 통해 각성을 요청하는 경우를 들 수 있다. 환경문제, 빈곤의 문제와 같은 주제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그 하나가 될 것이고 주제를 담는 도구인 언어의 새로운 쓰임새를 시도하는 실험이 다른 하나가 될 것이다. 이는 모든 예술이 추구하는 아름다움의 영역을 확장하는 일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마지막으로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좋은 시’의 잣대는 주제와 형식의 새로움을 넘어 시가 시인의 사유의 과정을 일관되게 드러내고 있는가에 있다고 본다. 오늘날의 많은 시들이 범하고 있는 잘못은 ‘잘 씀'이 시인 자신의 내면에 대한 투시와 위로에 있음을 간과하고 독자들의 공감을 엿보는 시류에 휩쓸린다는 점이다. 시인 자신에게 복무하지 못하는 시, 즉 한 인간으로서의 정신적 성숙을 도외시한 채 교언영색 巧言令色에 치우치는 시는 차라리 쓰지 않은 것이 나을 것이다. 공자가 위대한 성인으로 추앙받는 이유는 『논어』를 통해 우리 모두가 지니고 있는 인간적 면모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데 있을 것이다. 애증과 과오를 가감 없이 드러내면서도 뻔히 안되는 일을 성취하려는 애씀이야말로 오늘의 시인들이 금과옥조로 삼아야 할 일이 아닌가!

 

 

 

4

 

한 마디로 ‘좋은 시’의 전제조건은 시인 스스로 ‘잘 씀’의 상태에 만족하는 것이다. 위에서 잠시 살펴본 ‘좋은 시’의 범주는 완벽하게 작품에서 구현될 수는 없다. 어느 한 면이 넘치거나 부족하다 하더라도 각 부분 부분이 조화를 이룰 수 있다면 우리는 ‘좋은 시’를 만나는 기쁨을 충분히 누릴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산림문학』은 시 읽기의 즐거움을 대중들이 누릴 수 있게 하는 유일한 문학지라고 볼 수 있다. 우리의 인식은 자연을 착취로부터 보호해야하는 대상이 아니라 서로 호흡하고 생명을 나누어야 하는 친구로 받아들이는 단계로까지 나아가게 되었다. 자연을 지배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연의 일부분인 인간임을 자각하는 데까지 이르기 위해서는 아직 갈 길이 먼 상태에서, 자연에 대한 예찬과 자연으로부터 받은 섭리를 체득하는 일은 끊임없이 수행해야 하는 과업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산림문학 (제 18호)』에 게제된 30 여 편에 이르는 시들이 자연을 소재로 하거나 자연으로부터 받은 정감을 노래하는 것은 말 그대로 자연스러운 일이다.

 

 

김창식의 「멸치의 추억」, 김귀녀의 「꽃다지」, 임송자의 「초가을밤」, 정호정의 「조릿대 사랑」은 눈길에서 벗어나 있는 마이너리티, 소외된 존재들에 대한 따스한 시선을 보여주고 있다. 꽃이라고 할 수 없는 ‘꽃다지’, 생선 축에 끼지 못하는 ‘멸치’, 제 철을 지나 핀 ‘늦봉숭아’, 대나무가 될 수 없는 ‘조릿대’를 통해서 시인들은 정답이 없는 우리 삶의 편린을 위무한다. 벽돌 틈에 끼어 목하나 휘어진 꽃다지는 그러나 시인의 눈엔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고개를 떨구고/ 저녁 해를 바라보는/ 그녀는”으로 의인화되면서 삶의 질곡으로부터 희망을 버리지 않는 의지의 표명으로, 냉장고 통 속에 갇혀있는 멸치는 햇빛의 유혹을 떨치지 못한 죄로 “고향에서 살다 죽는 행복을/ 잃어버린” 현대인의 자화상을 보여준다. 그런가 하면 별 쓸모가 없는 키 작은 조릿대가 거센 바람을 막는 힘을 가져 “조릿대가 사랑으로/ 대관령 휴게소 뒤편은 울창한 숲이다/잣나무, 전나무, 낙엽송들의 빽빽한 숲이다”와 같은 위력을 지녔음을 깨닫는 일은 시인의 밝은 눈이 아니면 찾아낼 수가 없다. 이와 같은 시인의 눈은 「초가을 밤」에 이르면 보잘 것 없어 보이는 늦봉숭아가 풀벌레 울음 위로 피는 초승달로, 늙은 어머니의 손톱의 꽃물로, 끝내는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붉은 가슴으로 전이되는 서정의 한가락을 휘어잡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무심히 지나쳐버리는 물상으로부터 시인은 삶의 의미를 깨닫고 자기치유의 즐거움을 누리기도 한다.

 

낮은 데로

더 낮은 데로

첩첩산중

산허리 휘감고 돌아돌아

밤새 내려오다

덫난 생채기 어루만지며

밤새 울어 예더니

황톳물에 엉망진창이 된 소류지에서

숨을 고르고 있다

 

- 이근배, 「발령지 연가」 첫 연

 

소류지는 산정으로부터 스멀스멀 스며든 물이 질척하게 고인 늪지대를 말한다. 시의 화자는 자신의 삶을 소류지에서 숨을 고르는, 소외되거나 힘을 잃은 대중들을 대변한다. 다수의 민중들은 소류지로 추방되어 그렇게 크게 소리내지 못하고 평생을 살아갈지 모른다. 그러나 영웅호걸이 스러지고, 권력은 무상해도 소류지와 같은 운명의 민중이 망한 적은 없다. “스스르/ 잠재운 수면 위로/ 파르스름한 하늘 받아 눕히고/ 살랑살랑/부채질을 해대고 있다.(「 발령지 연가」 마지막 연)”는 끈질긴 생명력이야말로 인간의 역사를 증명하는 힘찬 채찍질이 아니었던가!

 

이와 같은 자연을 비감 悲感의 시각으로 바라보지 않으면서도 오늘의 삶을 반추하는 기제로 삼는 시도 음미할 만하다. 박승미의 「황금열매」는 감나무가 서 있는 마당이 있는 삶, 감을 통하여 아파트로 대변되는 도시로부터의 유쾌한 탈출을 도모하는 상상력을 발동하는가 하면 박명자의 「은행나무가 금관을 쓰고 걸어 나온다」는 가을 은행나무를 천년 신라의 왕관으로 치환하면서 보기 드물게 웅대한 삶의 기개를 펼쳐보이고 있기도 하다. 이 두 편의 시는 ‘붉음’과 ‘노랑’의 시각적 이미지와 열매와 조락 凋落의 하강적 이미지의 본의를 뒤집어 사용하므로서 역설의 즐거움을 선사해 주고 있다. “까치밥으로 남긴 감/ 그 눈부신 황금열매를/ 푸른 창공에 달아두는 것도 괜찮겠지( 「황금열매」 부분 )”는 겨울로 가는 스산함의 정조를 관조의 여유로움으로 받아치는 소요유의 경지를 보여준다. 이제껏 많은 시인들이 노래했던 가을은 사라지고 “망각의 어둠 저편에서 촛불처럼 빛나는/ 왕관을 쓰고 한 그루 은행나무가 나에게 걸어온다/...중략 ... 황금빛 나뭇가지가 청명한 가을하늘로 뻗어/수천수만의 출(出)자 형을 이루고/ 순금빛 나비형 영락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은행나무가 금관을 쓰고 걸어 나온다」 부분)”와 같은 생명이 분수처럼 분출되는 가을로 받아들이는 공력은 이 시인들의 시력을 가늠케 해준다. 이제 마지막으로 좋은 시의 반열에 드는 조건 중의 하나인 실험적시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최민휴의 「어머니 살아오신 옛 이야기」는 형식면에서 있어서도 새롭고 주제를 다루는 어법의 신선함도 예사롭지 않다. 가난하고 신산했던 옛 시절의 소회를 눈물과 한이 아닌 익숙한 구어체로, 해학으로 탈바꿈시키고 있다. 울어야 하는데 웃음이 절로 나오는 4개의 에피소드는 울어도 즐겁고 웃어도 즐겁다. 삼종지도의 시대에 쌀밥이 먹고 싶어도 꽁보리밥을 먹어야 하는 어머니가 되내였다는 말! “ 쌀은 쥐약이여/ 내 입에 들어가면 죽는 기여(「어머니 살아오신 옛 이야기」1 부분)”, “ 오늘은 물 좀 끓이고 있느냐/ 예, 오빠 죽 쑤고 있어요 「어머니 살아오신 옛 이야기」2 부분)” 에 드러나는 끼니를 때우는 일의 지난함이 오늘의 이 풍족한 소비의 시대에 얼만큼 공감을 얻을 수 있겠느냐마는 인간지사 새옹지마,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불안의 시대를 건너가는 궁핍의 내성을 각인하는 금언으로서 더할 나위 없이 큰 위안이 될지도 모르겠다. 

 

 * 이 글은 반년간지 <<산림문학>>( 2014년 봄. 여름호 )시평으로 게제되었음.

 

 

출처 / 세상과 세상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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