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라는 괴물과 더불어 살기
박태일(시인 ․ 경남대 교수)
1.
시 계간지 『시안』이 문을 닫았다. 펴낸이 오탁번 시인은 종간호 편집 후기에 썼다. “내 이렇게 될 줄 알았다. 어쩌자고 시 잡지를 장장 15년, 61권이나 냈던 말이냐.” 창간 뒤 열다섯 해,“ 『시안』이 드디어 꼴깍 넘어간 것이다.” 출판을 이어야 한다는 둘레 사람의 말도 들리지 않는다고 그는 말했다. “귀가 많이 어두워져서 그런지 아무 소리도 안 들린다.” 긴 세월 오 시인은 고투했다. 이미 1980년, 문단 평판이나 학계 통념과 달리 유치환 시에 대한 평가가 과대 포장되었음을 날카롭게 짚어 낸 비평가 가운데 한 사람이 그였다. 그런 기개와 혜안이 시안을 만들고 이끈 뱃심이었을까. 잘 버텼다. 그런데 하나를 닫으면 하나가 열린다. 앞으로 그는 그런 일을 더 자주 즐길 수 있으리라.
아무튼 근대시는 책에다 문자를 얹는 꼴이다. 근대시 역사란 문예지 역사와 다르지 않다. 편집진의 문화 수행력, 문학 권력의지와 둘레 연결망의 역사라고 해도 부풀림이 아닐 것이다. 담을 그릇인 문예지가 없다면 시는 글 나부랭이에 지나지 않는다. 그 그릇 하나가 시렁 위로 올라갔다. 근대 백 년에 얼마나 많은 문예지며 시 잡지가 나왔다 들어갔던가. 글쓴이 또한 아슴아슴하게 먼 일이 되어버린 청년기, 시 잡지며 문예지를 손에 잡히는 대로 읽은 적이 있었다. 문덕수 시인이 냈던 초기 『시문학』 과 전봉건 시인이 고투했던 『현대시학』은 청년기 추억이 어린 잡지다. 그리고 김재홍 교수가 내고 있는 『시와 시학』.
펴낸이 김재홍 교수를 알게 된 때는 1970년대 초기, 그가 낸 삼인 시집 『겨울 삼중주』를 읽었을 무렵이니 세월도 만만찮다. 그는 평론가가 아니라 처음 시인으로 글쓴이에게 들앉았다. 김 교수가 오늘날까지 시와 시학을 이끌고 있는 뒷심은 아마 시인으로서 지녔을 포부에 있는지 모른다. 글쓴이는 그가 시인에서 젊은 비평가로 몸을 바꾸고, 우리나라 처음으로 은유의 꼴을 고심하고 틀을 만든 사실을 예사롭지 않게 보았다. 비평가로서 첫 고심이 비유였다는 데서 그의 시인됨, 문학주의가 잘 드러나는 까닭이다. 1950년대 전후 황량 속에서 고석규 ․ 김우종과 같은 젊은 비평가가 비유와 문체에 매달렸던 것과 또 다른, 1970년대의 한 풍경을 그가 떠맡은 셈이다. 이제 그도 정년을 맞았다. 글쓴이 또한 예순 해 세월로 걸어 들고 있다. 어찌 시가, 문학이 괴물 같지 않으랴. 계간평 준비로 평소와 달리 이런저런 매체의 작품을 뒤적이면서 더 굳어진 생각은 시, 그놈 참으로 괴물 같다는 것이었다.
2.
시는 괴물 같다. 아니 시는 괴물이다. 보기 흉하다. 무섭다. 황당하다. 슬프다. 1990년대 중반 지역자치제가 명목상 이루어진 뒤로 크작은 지역마다 예술문화 경영이니진흥 이니 하며 적지 않은 문학관을 세웠다. 기명 문학상도 늘었다. 그런데 속살을 따지면 마땅치 않은 경우가 한둘 아니다. 입에 담기 어려운 패륜을 저질렀던 시인도 있다. 세상을 잘 만난 까닭인지 한쪽은 묻히고 다른 쪽은 마냥 부풀릴 기회를 탄 셈이다. 정도는 덜하지만 근대사 속에서 자신이 이룬 일과 다른 행운을 적지 않은 문인이 입었다. 제 한 몸 살리고자 겨레를 버린 이에게도 어처구니없이 겨레라는 이름 내세워 면류관을 씌워 준다.
나라 잃은 시대 말기인 1940년대 초기 이른바 ‘국어’였던 왜말을 독해할 수 있는 한국 사람은 20퍼센트를 넘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서 자랑스럽게 ‘국어시’를 떠벌리며 이른바 대동아공영권을 향한 ‘내선일체’와 ‘성전’에 감읍했던 이들이 있다. 그들은누가 읽으라고 그런 글을 발표했던던 것일까. 이른바 조선총독부에서 우리 문학 출판물 탄압과 검열에 나섰던 이도 존경을 받는 세상이다. 사상 탄압 전담 부서인 고등계 끄나풀 문인에게도 시대의 대표 문인으로 공경을 바친다. 문학관을 세우고 문학상을 만들어 기리는 일에 빠짐없다. 두고두고 거짓 명성을 강화하고 키워갈 바탕을 만들어 준 셈이다. 전향이니 현실 수리론이니 변호 논리는 객쩍을 따름이다. 제 한 몸 잘살고 잘되기 위해 그리 살았고 작품을 돌렸을 따름이다. 오늘날 그들을 공공적으로 기리고 있는 현실이 그 점을 극명하게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시가, 문학이 대단한 괴물이 아니라면 어처구니없는 그런 일이 일어날 수가 없다.
선택적인 소수 먹물의 허깨비 문학, 유흥문학에도 무거운 공공적 명망을 씌워 부풀리는 인습과 몽매가 대를 물린 세월을 우리는 산다. 그러다보니, 요즘에는 시인이 저잣거리에서 휘두르는 깃발이라도 되는 양 나도는 이까지 생겼다. 지역 관변 문화행정 마당을 들쑤시며 이익을 챙기는 문학 모리배다. 늙고 젊음에 관계없는 그들의 탐식과 모리에는 제동장치가 없어 보인다. 글쓴이 눈에만 괴물로 보이는 것일까. 시를 쓰는 일이 무엇이기에 사람을 괴물로 만드는지 모르겠다. 괴물 같은 시를 붙잡고 사는 괴물 같은 시인이라니. 그럼에도 그들은 나날이 는다.
출구 쪽 계단에 발 하나를 걸치고,
아찔한 체위로 시집을 읽던 날이 네게도 있었던가
나름으로는 용맹정진이었으나, 부끄럽구나
벼랑을 평지로 태평하게 피어나는 꽃이여
저 꽃벼랑 위에서 오늘도 누가 밥을 짓고 있나
칭얼대는 어린 것을 업고 옥상 위에 깃발처럼 빨래를 내다 말리고 있나
- 손택수, 「꽃벼랑」(『시와 사람』 여름호) 부분
한 사람이 전문 시인으로 나서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10년을 적공을 이룰 일이다. 제 목소리, 제 말씨는 하루아침에 갖춰질 일이 아닌 까닭이다. 이때 10년이란 단순히 물리적 시간이 아니다. 보상도 기대와 다르다. 시 쓰기가 쉬운 일이고 보상 큰 일이라면 누군들 대들지 않겠는가. 그래도 시 쓰기가 쉬워진 요즈음 세태가 다행이다. 매체가 다양해지고 취향도 갖가지, 노는 마당이 마구 커진 덕이다. 그런데 시인이 많아졌다고 좋은 시를 향한 세상의 기대 수준이 낮아진 것은 아니다. 좋은 시인이 되는 길은 더 힘들다. 시인은 특정 문학 영역의 전문가 행세를 하는 이다. 세상을 속이고 자신을 속이며 살 생각이 아니라면 길은 마냥 어렵고 괴롭다. 괴물 같다.
위에 옮긴 「꽃벼랑」의 시인은 말한다. 허물어져 내린 벼랑 같은 세월을 견디며 시에 골몰했고 시를 향해 온 몸 내맡겼음을. 그런데 오늘 시인은 “나름으로는 용맹정진”했던 그 시절이 부끄럽다고 말한다. 정말 그러랴. 용맹정진의 끝이 “칭얼대는 어린 것”에게 충분한 생활을 마련해 주지 못할 어버이의 길이 되리라는 예감이 쓰라릴 따름이다. 남은 것은 ‘깃발처럼’ 걸린 구차함. 생활은 시인을 나직하게 꼬인다. 괴물 되라, 괴물처럼 살라고. 그러나 벼랑 끝에서 흔들리더라도 그럴 수 없다. 그 ‘벼랑’을 “평지로 태평하게” 피지는 못할지언정 시를 짊어진 용맹정진은 포기하지 않으리라. 괴물처럼 살지 않으리라 단호하게 말하는 듯하다. 시인의 아픈 자존이 잔잔하게 얼비치는 작품이다.
시를 쓰기 위하여
직장을 관둔 이래로
나는 시인의 길을 걸어왔다
한 시인이자 지방대학 교수인
여자에게 고소를 당하여, 나는 박사이고
교수인데 저 사람은 도대체 뭐란 말이에요?
라는 소리를 들어보기도 했었다.
(옆에서는 한 돼지 같은 노가리 따위가
‘악랄하게’를 외쳐대고 있기도 했었다.)
신용불량자가 되어 집사람과 이혼을
하기도 했었고,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도
가난한 맏아들인 나는 그 장례식에
초대되지도 못했었다.
자발적 빈곤의 이 길,
눈물 방울방울의 이 길, 슬픔이
비처럼 썯아져 내리기도 하는 이 길,
작년에는 거의 6개월씩이나
자살 충동에 시달리기도 했었다.
-박남철, 「시인의 길」( 『문학의 오늘』 가을호 부분)
박남철은 아예 시 제목을 「시인의 길」이라 내세웠다. 「꽃벼랑」의 시인과는 견주기 힘든 정황을 속속들이 드러냈다. 생업을 버리고 이혼을 겪었다. 만성 자살 유혹에 시달리면서 그는 시를 썼다. 오늘도 시인은 어두운 담벼락에 기대 취한 오줌발을 시처럼 날리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어머니 상례에도 참석하지 못한 참혹은 시라는 괴물이 이끈 것인가. 시인 스스로 시밖에 매달릴 데가 없는 괴물 같은, 위악적인 삶을 선택한 것일까. 어느 경우든 그가 오늘도 시를 쓰고 있다는 엄연함이 중요하다. 시는 괴물이다. 시를 사랑하고 시에 투신하는 이를 괴물로 만든다. 1980년대 우리 시의 한 경향을 온 몸에 새겼던 시인의 자책과 회고가 담긴 작품이 위에 든 시인의 길이다. 그는 너무 젊은 나이부터, 괴물 같은 시에 들려 스스로 괴물이 된 대표적인 본보기다.
3.
시인을 세상의 괴물 같은 존재로 만드니, 시는 괴물임에 틀림없다. 어떤 이는 괴물의 유혹을 버티기도 하지만, 어떤 이는 아예 위악을 저질러 괴물을 자처한다. 그런데 시인만 괴물 같은 존재가 아니다. 돌아보라. 시 쓰는 일 자체가 괴물 같지 않은가. 긴장과 괴로움은 나날이 커져 간다. 시라는 괴물 앞에, 어찌 할 바 모를 당혹과 혼란에 내던져진다. 불치다. 깊은 지네굴 속에서 떨고 있는 지네장터 옛 이야기 속 처녀 같다. 허우적거리며 안간힘 써 보지만 벗어날 가망이 없어 보인다. 핏줄이 마르고 뼈가 꺾인다. 거듭 아프다. 힘들다. 적어도 시 쓰는 일은 세 가지 점에서 그렇다. 시어와 제대로 다투기, 자신의 경험을 읽는 이의 체험으로 되돌려 놓기, 시 갈래의 구속에서 버텨 내기가 그것이다.
요건 찔레고 죠건 아카시아야
잘 봐, 꽃은 예쁘지만 가시가 있지?
아빠 근데, 찔레랑 아카시아는
이름에도 가시가 있는 것 같아
- 박성우, 「가시」 (『시와 시학』 가을호) 부분
여기 시 같아 보이지 않는 작품이 있다. 아이 말을 그냥 옮겨 놓은 듯 쉽다. 어찌 시라 하랴. 그런데 사실을 그렇지 않다. 이 작품에서 시는 말결에서 ‘가시’을 읽어낸, 아이의 예사로운 말을 낚아 올리는 언어 감각에 깃들어 있다. 그 솜씨야말로 박성우를 시인으로 만드는 힘이다. ㅉ, ㅋ에서 아이가 느끼는 ‘가시’ 같은 말맛. 시를 쓸 때는 이러한 꼼꼼한 언어 감각을 요구한다. 돈도 밥도 아무 것도 되지 않을 사소한 낱말 하나, 소릿결 하나에 매달리고 요모조모 따져 드는 허황한 짓거리에 빠져드는게 시다. 그것도 스물네 사간 온 세상을 무차별적으로 뒤덮는 대중매체 대언어의 폭포수 아래서. 시 쓰기가 괴물 같은 일이 아니라면 달리 무어란 말인가.
가창 지나 이서 지나다 본 화양
엄마 몰래 알사탕 훔쳐 먹다 들킨 것처럼
목메고 화들짝 브레이크에 발이 가던
엄마가 거기 있기나 한 듯
자꾸 뒤돌아보게 하던 화양
- 박지영, 「화양」( 『시산맥』 가을호)부분
시 쓰기는 시인의 언어 감각에서 더 나아간 시적 표현력을 필수로 요구한다. 삶을 밀고 나가는 각별한 경험이 시 쓰는 모태다. 그런데 그것을 읽는 이의 체험으로 되돌려 놓는 표현력은 다른 차원의 것이다. 시인이 겪는 경험의 치열성과 작품이 지닌 표현의 적절성이 맞물리지는 않는다. 옮겨놓은 박지영의 작품이 그 점을 되씹게 한다. ‘화양’, 환한 장소의 소릿결이 품은 어릴 적 추억을 새삼스럽게 담아낸 시다. “목 메고 화들짝 브레이크에 발이” 가도록 이끄는 ‘엄마’의 추억이란 어떤 것일까. 시는 그 속성을 의뭉스럽게 숨겨둔 채 읽는 이에게 손을 내민다. 꿈꾸라, 생각하고 느껴 보라고.
시는 다름 아닌 표현 가치에 깃들어 있다. 시를 끄적이는 일과 시로 완성해 내놓는 일은 다르다는 뜻이다. 마치 뇌생리학에서 자유로운 오른뇌가 하는 일과 냉철한 왼뇌가 하는 일이 다른 것과 같은 이치다. 그 둘이 마련하는 통합적․ 상승적 작업이 시 쓰기며 시 다듬기다. 어느 한쪽에 치우쳐서는 좋은 결실을 맺기 힘들다. 말하고 싶고 강조하고 싶은, 처음 내 것이었던 경험은 어느새 내 것이 아니다. 시인은 시 쓰기 안쪽에서 일어나는 그러한 변화와 이율배반을 감당해야 한다. 자신의 경험 가치를 어떻게 작품의 표현 가치로 되돌려 놓을 것인가. 그러한 가치 정향력이야말로 시 쓰는 이를 다시 소박한 시 호사가와 전문 시인, 둘로 나뉘게 하는 갈림길이다. 전문 시인 자리는 쉽게 이를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어찌 시 쓰기가 괴물에 맞닥뜨린 듯이 어려운 일이 아니라 할 것인가.
① 앞 산 산책길을 돌아 나오다 숲 속 모기떼에 맨살을 뜯겼다 급하게 수혈을 해 준 셈이었다
테니스장 네트를 훌쩍 뛰어넘은 연둣빛 바랜 공들이 어린 수국 주먹만 하였다 불두화가 피어나는 법당 안을 기웃거리며 엄마를 찾던 사월 초파일 같았다
나팔꽃 줄기가 빨랫줄처럼 늘어져 비좁은 보리밥집 울타리를 빠져나오고 있었다 이탈을 방조한 강낭꽃 꽃투리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메타세콰이어 나무 그늘에 앉아 문지방 가에 놓여 있던 외할머니 이빠진 참빗을 생각한다 맞은 편 공원에 가지런하게 빗살무늬 이파리를 모으고 있는 자귀나무와 이종사촌지간이 아닐까 했다
- 「모월모일」(『시안』 여름호) 부분
종간호 『시안』은 두 가지 특집을 마련했다. 『시안』 출신 시인의 신작시 특집과 일반 시인의 게재시다. 준비한 종간호로서 자연스런 기획이었다. 위에 옮긴 작품은 일반 시인의 게제시 마지막에 실렸다. 시단에 얼굴을 내민 순서가 가장 늦은 시인이라는 뜻이겠다. 그런데 위에 옮긴 「모월모일」은 시라기보다 산문, 곧 줄글이다. 줄글시로 올리기도 어려울 정도로 느슨한 진술로 한결같다. ‘모월모일’에 일어났던 일과 그에 따르는 상념을 시간 순서를 좆아 늘어놓았다. 그런데 신인답지 않게 부분적인 말다듬기에만 신경을 곤두 세웠다. 짧은 줄글 한 편을 보는 듯한 단계에 머물고 말았다. 따라서 이 작품은 금방 아래와 같은 상태로 손질이 가능하다.
② 앞 산 산책길을 돌다 모기떼에 맨살을 뜯겼다
테니스장 연둣빛 공들이 수국 주먹만 하였다 불두화가 엄마를 찾아 법당 안을 기웃거리던 초파일
나팔꽃 빨랫줄이 좁은 보리밥집 울타리를 빠져나오고 있었다
메타세콰이어 그늘에 앉아 문지방에 놓였던 외할머니 이 빠진 참빛을 생각한다 맞은 편 공원 자귀나무 빗살무늬 이파리와 이종사촌은 아닐까
어떤가? 글쓴이가 다듬어 놓은 ②가 본디 작품 ①보다 시로서 나아 보이거나 아니면 비슷한 정도 수준에는 머무는 듯한가. 그렇게 여겨진다면 ①은 잘 쓴 시에서 한참 모자라는 상태에 놓였다. 시인이 손수 더 다듬었어야 했을 자리를 적지 않게 남겨 두었다는 뜻이다. 잘 쓴 시가 지닌 중요한 자질 가운데 하나는 낱말에서 표현, 속살, 뜻에까지 다른 이나 다른 작품이 섞일 수 없을 정도로 오롯한 고유의 변경 불가능성이다. ①은 손볼 데가 너무 많이 남았다. 덕자덕지 군더더기다. 고친 ②가 가장 잘 된 상태라 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①에 조금만 손질을 기울인다면 ②와 같은 상태로 쉬 나아갈 수 있으리라는 사실에 시인은 크게 곤혹스러워야 한다.
시 쓰기는 언어에 대한 뛰어난 감각이나 뜻한 바를 제대로 담아내는 표현 역량에 그치지 않는다. 다른 인접 텍스트와 나뉘는 갈래의 정합성을 스스로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시는 다른 줄글 갈래와 나뉘는 오롯이 티나는 자리를 지녀야 한다. 이 괴물 같은 갈래, 밤새워 눈을 비비며 공들인 시가 시 같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는 평가로 내몰리다니, 분통 터질 일 아닌가. 그러나 이 점은 흔들림 없는 참이다. 손쉽게 쓰고자 하는 이에게 시는 즐거운 감정 언어놀이, 평균율을 거듭하는 유행 노래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시를 더 시답게 쓰고 마침내 그것을 가로질러 보고자 하는 이가 있다면, 그에게 시는 늘 맞서기 힘든 괴물, 괴물 갈래다. 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 없는 절벽, 시인은 미칠 일까지 꿈꾼다.
서서히 미쳐가는 저 해
네가 미치지 않았다면
왜 매일 아침 동쪽에서 나타난단 말인가
해를 보고 열렬히 고개 드는 해바라기들이여
너희들이 미치지 않았다면
왜 하고한 날
해만 바라보고 살아간단 말인가
살아야 한다는 한 가지 본능만으로
몰려드는 까마귀 떼
네 두 눈을 쪼아 먹으려 몰려든다
살고 싶어서 미쳐버린 누이야
죽을 수 없어 미치고 만 고흐여
오늘도 정오가 가까워오자
하늘 한 복판에서 해가 미쳐 날뛰고 있다
인간 세상을 보더니
해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제 몸에 등유를 끼얹었다
- 이승하, 「狂」 (『시인수첩』 가을호) 부분
「狂」의 시인은 자신의 시가 ‘인간세상’을 향해 ‘열렬’히 불타는 해와 같은 것임을 엄중하게 밝힌다. 외친다. “ 미치지 않았다면/왜 하고한 날” 해만 바라보는 ‘해바라기’로 “ 살아간단 말인가.” 그런데 글쓴이를 비롯한 많은 시인들은 그렇지 못하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제 몸에 등유를 끼얹”는 해와 같이 시를, 삶을 불지를 수 없었다. 등유는커녕 성냥을 가져다 놓을 용기마저 버렸다. 부끄러운 노릇이지만 사실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오늘 어느 곳에선가 적지 않은 좋은 시인은 단호하게 성냥을 그어 대고 있을 것이다. 시를 향해 활활 타는 해바라기 괴물.
4.
그런데 묻자. 시나 시인만 괴물인가. 확실한 사실은 우리를 둘러싼 세상이 괴물이라는 점이다. 훨씬 부조리하고 부당하다. 갖은 비리와 모리, 파렴치, 배임으로 뒤덮였다. 더럽고 무섭기로 치자면 시와 차원부터 다르다. 참담하지만 세상은 이미 통째 괴물이다. 그런 곳을 디디고 사니 괴물을 닮을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회복 불가능한 위해를 입거나 먹힌다. 삶은 괴물의 몫으로 넘어갔다. 반반한 사람 낯빛을 내놓고 떠들며 웃고 있지만, 깊숙이 괴물이 들앉았거나 괴물과 한 몸이 된 지 오래다.
이런 속에서 시 정도의 괴물은 아무 것도 아니다. 한참 하찮을 따름이다. 이 엄살, 여태껏 글쓴이는 시를 두고 너무 심한 엄살을 떨어온 셈이다. 그렇다. 시가 아무리 괴물 같고 허황한 자기도취의 난장이라 하더라도, 괴물 현실에 견준다면 이미 허물을 벗은 왕자 상태다. < 미녀와 야수>라는 서양 이야기의 행복은 시인에게 벌써 부어진 바다. 그러니 겁먹고 달아나거나 항복하고 말 일이 아니다. 악마 같은 세상 물정으로 보자면 시는 순하기 짝이 없는 새끼손톱 크기 정도 괴물에 지나지 않는다.
잊자고
잊어버리자고
눈을 씻으러
들어간다
- 김일영, 「석양」( 『시와 사람』 여름호 ) 부분
해는 날마다 자러 들어갔다 뜨기를 되풀이한다. 그와 달리 삶의 뒤는 죽음이다. 가까운 언젠가 예외 없이 우리는 지금과 달리 아득한 하늘, 아득한 강가를 서성일 것이다. 어차피 괴물 같은 시인이고 괴물 같은 시라면 길은 많지 않다. 더 힘센 괴물이 되어 괴물 시를 쓰러뜨리는 일이 으뜸이다. 그렇지 못하더라도 달래며 지낼 수는 있으리라. 야수의 허물을 벗게 해 줄 아름다운 미녀 도우미, 무서운 지네를 물리쳐 줄 두꺼비 따위는 잊는 게 좋다. 막막하고 어두운 동굴 속에서 그싯그싯 붙여 던지는 성냥불마냥 한 걸음 한 걸음 태울 일이다. 그리하여 더 많은 괴물 시인의 손에서, 더 많은 괴물 시가 쏟아지기를, 악마 같은 세상에 마구마구 깊은 똥침 놓아주기를..... . 각설.
*
계간『 시와 시학』 2013년 겨울호 「계간 시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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