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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나호열 시인/詩 창작 강의

[스크랩] 물의 시학

by 丹野 2013. 12. 9.

 

물의 시학

 

현대시에 구현된 물의 상징적 의미들

 

송 기 한

 

1. 현대시와 물

 

현대시의 가장 중요한 의장 가운데 하나는 상징이다. 보조관념을 통해서 원관념의 의미를 확정하는 것이 상징의 기본 원리인데, 그것이 특별히 은유와 구별되는 것은 관습성의 유무에서 찾아진다. 또한 상징은 그것이 지속적으로 반복되어 나타날 경우 원형의 문맥에서도 이해된다. 어떻든 하나의 사물이 상징이 되고 원형이 되는 것은 그것이 문맥화 되어 어떤 고유의 의미역으로 현상될 때 가능해진다.

 

현대시의 시적 의장인 상징은 서정시 본연의 장르적 특성이다. 그런데 상징이 시의 중요한 장치로 부각하게 된 것은 현대 사회의 특성인 감성적 영역의 복잡성에 그 원인이 있다. 어느 특정시대나 시인에게 패턴화되어 나타나는 물상들은 시대 혹은 그들만의 고유한 의미역이 있을 것이다. 따라서 어느 의미가 유형화되어 나타난다고 해도 그것이 고정된 채 의미의 다양성을 허용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사물이나 대상이 굳어진 의미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본의미를 바탕으로 해서 부챗살 모양으로 펼쳐져 나가는 것이 상징의 특색이기 때문이다.

 

현대시 속에서 흔히 산견되는 ‘물’의 상징도 이런 시대적 의미 혹은 장르적 특색에서 그 의미를 추출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시에 나타나는 물의 상징성이랄까 재생성은 몇 가지 유형으로 패턴화 되어 구현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바슐라르의 물질적 상상력에 의하면 물은 우선 생명의 근원으로 의미화 된다. 지구를 구성하는 중요 원소가운데 핵심이 바로 물이다. 그렇기에 그것은 생명을 떠받치는 근본 요인이 된다. 화성 탐사선 큐리오시티가 화성생명체의 실재여부를 증명하는데 있어서도 물의 존재가능성에 그 탐색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도 이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만큼 물은 생명과 등가관계에 있다.

 

한편 물은 재생의 이미지로도 구현된다. 여기에는 부정한 것들을 털어내는 단계인 세례의식이 포함된다. 혼탁하고 더러운 육신이나 사물을 새롭게 하는 매개는 물이 갖는 정화의 능력 때문이다.

 

물의 속성이 이런 원형적 이미지에 놓여 있다는 것은 그것이 패턴화 되어 있다는데 기인한다. 따라서 작품 속에 구현된 물의 이미지도 이런 틀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 여기의 현실은 물을 의미의 감옥 속에 갇혀 있게 하지 않는다. 근대성의 제반 원리들은 어떤 물상이나 속성이든 간에 그것을 하나의 고정된 틀 속에 놓아두지 않기 때문이다. 견고한 모든 것들이 근대의 휘발적 속성들에 의해 무너지고 날아가듯이 물의 이미지도 자신만의 고유한 영역을 갖고 있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경계가 무너지듯 물의 의미역도 겹겹이 쌓이게 되는데, 근대의 욕망들은 거기서 파생된 여러 실타래들을 물속으로 내재화시켜버렸다.

 

근대의 아우라는 물을 더 이상 수소와 산소의 결합이라는 화학적 정식 속에 갇혀 있게 하지 않았고, 또한 재생이나 원형과 같은 단일한 이미지로 고착시키지도 않았다. 물이 알콜과 결합하여 불이 되고, 피와 결합하여 생명이 되듯 물은 근대의 제반 요소들과 결합되면서 근대적인 물로 거듭 새로운 의미의 층위들을 만들어내었다. 그것은 근대라는 시장의 구석구석을 누비면서 다양한 형태로 의미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한 다양성들은 현대시의 여러 층위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2. 영원과 정화, 재생으로서의 물

 

 

한국 근대시에서 물의 이미지가 등장한 것은 근대 초기의 일이다. 어쩌면 근대의 출발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물은 중요한 시의 소재 혹은 상징으로 등장했다. 근대시의 출발을 알리는 「해에게서 소년에게」의 중요한 소재가 물(바다)이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물은 근대로 나아가는 길이자 세계성을 받아들이는 통로로 이미지화되었다. 근대의 형성과 더불어 부각된 것이 물이었기에 그것이 가지고 있는 상징적 의미 또한 다대한 것이었다. 그것은 인간의 생명을 보증하는 구경적인 것이면서 근대로 나아가게 하는 생존의 지렛대 역할을 한 것이다.

 

육당에게 구현된 물은 근대라는 상징성과 분리하기 어려운 것이었고, 근대 초기의 아우라가 그러했듯이 그것은 계몽의 속성으로부터도 벗어나기 어려운 것이었다. 상승하는 부르주아의식과 더불어 시작된 조선의 근대는 계몽의 빛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이었기에 물의 상징성 역시 이 틀 속에 갇혀버렸다. 계몽이란 거대담론이다. 따라서 이때 형성된 물의 상징성 역시 그러한 보편적 문법과 밀접한 상관관계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근대와 더불어 시작된 물의 상징성은 계몽의 시기를 거치면서 보다 내밀화된 인간의 심층영역에 눈을 뜨게 된다. 대사회적인 거대 시선이 내부로 축소되면서 물의 의미역도 인간의 정신 영역과 밀접한 관련을 맺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내밀성들은 계몽이라는 거대담론의 분리와 정비례의 관계에서 형성되었다.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더 한번// 저 산에도 까마귀, 들에 까마귀,/ 서산에는 해진다고/ 지저귑니다.// 앞 강물 뒷 강물/ 흐르는 물은/ 어서 따라 오라고 따라 가자고/ 흘러도 연달아 흐릅디다려.

 

_김소월 「가는 길」 전문

 

인용시는 소월의 명작 「가는 길」이다. 소월의 시를 말할 경우에는 적어도 두 가지의 찬사가 그에게 따라붙는다. 하나는 근대시의 큰 과제 가운데 하나였던 리듬의 완성자였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한으로 표상되는 그리움의 정서를 매우 효과적으로 그려낸 시인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이 둘 사이의 상관관계는 분리적인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통합의 관점에서 고려해야할 사항이다. 형식과 내용이란 결국 유기적인 하나의 조직체로 현상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근대시를 잘 빚어진 유기체로 완성한 소월의 시에서 주목해야할 부분이 바로 물의 상징성이다. 「가는 길」은 시의 문맥대로 그리움의 정서를 표출한 작품이다. 전일적 자아로서는 완성하지 못한 완전성에 대한 그리움, 이성적 님에 대한 끊임없는 그리움의 정서를 「가는 길」은 전통적 리듬인 7.5조에 실어서 유장하게 표현해내고 있다. 이때 그러한 그리움의 정서를 웅숭깊게 표현해준 매개가 바로 물의 이미지이다. 물의 일차적인 속성은 흐름과 정지, 정지와 흐름과 같은 반복의 연속으로 구현된다.

 

그러한 연속이 영원의 감각에 닿아 있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일인데, 「가는 길」이 말하고자 하는 것도 그 연장선에 놓인다. 님에 대한 그리움, 절대에 대한 향수는 단속적인 것이 아니라 항상적인 것일 때, 그 진정성이 담보된다. 그 감수성을 매개하는 것은 아마 지속의 정서일 것이다. 그러한 연속성이 그리움의 정서에 덧씌워져 나타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가는 길」은 그러한 지속성을 물의 항구성에서 인유해낸다. “앞강물과 뒷강물”이 “어서 따라 오라고 따라 가자”는 유연한 흐름이야말로 영원의 상징이 된다. 곧 시적 화자의 그리움에 대한 감수성이 일회적 순간이나 우연이 아니라 영원의 감각 속에 내재해있다는 것, 그것을 물의 영속적 흐름 속에서 읽어낸 것이 이 작품의 특색이다.

 

물이 영원의 맥락과 연결될 수 있는 것은 이처럼 유형화된 패턴 때문에 가능해진다. 시대와 시인을 초월해서 똑같은 의미역으로 현상되는 것이 패턴이다. 원형 상징이 형성되는 것도 이러한 원리 때문인데, 「가는 길」에서의 물 이미지가 재생의 문맥으로 이해되는 것 또한 동일한 맥락에서이다. 이렇듯 물은 재생의 이미지, 곧 원형상징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그리고 물의 그러한 이미지와 관련하여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이 정화로서의 물이미지이다. 물에는 오염된 것을 씻어내리는 속성이 있다. 그러한 세례적 성격으로서의 물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할 정도로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노아의 방주에서 엿볼 수 있는 성서적 신화가 바로 그러하다. 이 신화가 주는 상징적 의미는 물에 의한 정화이다. 지상의 오염된 모든 것들은 물에 의해 씻겨나감으로써 신의 기대치에 부응하는 새로운 물상으로 거듭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성서에 의해 예비된 물의 세례적 이미지는 인간의 삶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가령, 어떤 의식을 진행하기 전에 목욕을 하는 행위나 손을 씻는 행위 등이 그러하다. 이런 맥락에서 물은 세례이전과 이후를 구분하는 중요 구분점이 되며, 새로운 인식의 단위가 된다. 즉 물은 어떤 주체로 하여금 새로운 인식 주체나 환경으로 추동케 하는 주요 매개가 되는 것이다.

 

첫 窓門 아래 와 섰을 때에는/ 피어린 牡丹의 꽃밭이었지만// 둘째 窓 아래 당도했을 땐/ 피가 아니라 피가 아니라/ 흘러내리는 물줄기더니,/ 바다가 되었다.// 별아, 별아, 해, 달아, 별아, 별들아,/ 바다들이 닳아서 하늘 가며는/ 차돌같이 닳아서 하늘 가며는/ 해와 달이 되는가. 별이 되는가.

 

_서정주 「旅愁」 부분

 

이 작품은 서정주의 중기시에 속하는 「여수」이다. 이 시의 특징은 부정不淨의 상징인 피가 화학적으로 전이되는 과정에서 찾아진다. 그것은 부정적인 피가 정화淨化되어 물이 되는 과정으로 상징된다. 서정주에게 있어 피는 욕망의 상징 혹은 관능의 상징으로 기능했다. 그의 초기 시세계를 이끈 것은 피에 의해 추동하는 육체적 관능의 세계였다. 윤리적 자의식이 무감각한 세계, 그리하여 욕망의 거침없는 발산이 그의 초기 시를 이끌어간 동력이었다. 그러나 중기 이후에 오면 그의 시들은 새로운 단계를 맞이하게 된다. 욕망에 의해 이끌려지는 육체, 일시성의 감각에 황홀되는 육체가 아니라 보다 근원적인 어떤 세계를 지향하는 정신의 세계로 바뀌게 된다. 그것이 시인의 작품세계에서 흔히 운위되는 영원의 감각이다.

 

그러한 도정으로 나아가는 길목에 놓여 있는 것이 물이다. 물은 그 속성상 생명의 근원이기도 하지만 더러운 것에 대한 정화의 능력 역시 가지고 있다. 그러한 기능이 이 시에서는 피가 물로 전환되는 형이상학적인 과정으로 구현되고 있는 것이다. 부정不淨이 정淨으로 되는 과정은 인용시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시적 자아가 첫 번째의 창문을 거치고 두 번째 창 아래 당도했을 때부터 시작된다. 이러한 과정의 상징이 ‘창문’이다. 이 문은 시인이 오랜 방황을 끝내고 돌아 왔을 때의 자기 성찰적 인식의 지표로서, 그것은 곧 피가 물로 정화되는 과정을 매개한다. 그것은 정신적인 면에서 볼 때, 질적으로 다른 삶으로의 정화나 이행의 과정이다.

3. 욕망과 근원, 이율배반성으로서의 물

 

물은 낙차성을 생리적 특성으로 갖고 있다. 이는 물리적 사실이면서 움직일 수 없는 진실이다. 그러한 사실성 혹은 진정성에 기대게 되면, 어떤 형이상학적 의미를 산출해내는 것이 가능해진다. 이법이라는 것, 섭리라는 것들은 모두 이 영역에서 잉태된다. 영원의 감각 또한 그러하다. 소월은 그러한 영원을 지속의 감각에서 찾았고, 미당은 세례라는 통과의례에서 찾았다.

 

물에 의해 형성된 이런 형이상학적 의미들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생리적 속성에서 얻어진 것이다. 속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원리이자 보편이며 또한 법칙이다. 그러한 장치가 견고한 철학적 의미틀을 갖기 위해서는 어떤 정식이 필요하다. 그것만이 보지保持하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랄까 그것만의 고유의 속성이랄까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수소와 산소가 만나 물이 된 이후/ 물은 원래의 성분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화학적 방법이 아니라면 물은/ 영원히 물이다//(중략)// 중심에 스며들어, 찬란하게 박혀/ 다른 이름으로 살아보고자 몸부림쳐 보는 날이 있다/ 뒷걸음질쳐 다다른 숲에게/ 물고기를 낚게 해준 그 강에게/ 종일 세상을 말리다가 지는 태양에게// 그러나 건너가 박히고자 하는 것들을 통째 삼키며/ 물렁해지기를, 숨어 흐를 수 있기를 바라지만/ 쓸쓸하게도 나는 흠집이 나있거나 부서진 자리로/ 매번 환원 한다// 되돌아가지 않고 분리되지도 않는 단단한 물/ 그 무엇으로도 해부되지 않는 고집이/ 어느 날은 꽝꽝 얼어/ 세상 모든 것을 철썩, 달라붙게 한다.

 

_이향란 「물의 해부학」 부분

 

이 시인이 주목하는 물의 속성은 결합성에 있다. 물의 주된 특성이 유동성이고, 이를 바탕으로 물의 의미들은 생성되어 왔다. 그러나 인용시는 물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그것의 속성에 주목했다. 결합성, 곧 접착적 성질에서 물의 특성을 찾아낸다. 물이란 “수소와 산소가 만나서” 만들어진 것이고, 또 그렇게 형성된 물은 “원래의 성분으로 되돌아가지 않는다”는 그 결합성에 대해 시인은 착목한다. 즉 “화학적 방법이 아니라면 물은 영원히 물”이라는 불가역성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물에 대한 이러한 분리불가능성은 매우 예외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물이 영원의 감각이나 세례의식과 같은 전환의 매개로 인유되는 것과는 전연 다른 경우이기 때문이다.

 

상황에 따른 변화를 인정하지 않거나 속성이 바뀌지 않는 것은 견고한 자의식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 작품에서 물은 변함없는 물리적 특성으로, 가령 “숨어 흐를 수 있기를 바라지만/ 쓸쓸하게도 나는 흠집이 나 있거나 부서진 자리로/ 매번 환원”하는 고집성, “되돌아가지 않고 분리되지도 않는” 견고성 등으로 현상된다. 이런 상상력은 자연의 법칙이나 우주의 이법으로 인유되던 것과는 전연 다른 경우에 속한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물리적 특성들은 “그 무엇으로도 해부되지 않는 고집이/ 어느 날은 꽝꽝 얼어/ 세상 모든 것을 철썩, 달라붙게 한다”에 오면 그것의 정점, 그 본색을 드러내게 된다.

 

물의 고착성에 주목하는 이런 시각은 실상 물의 유동성에 대한 시각과 동일한 차원에 놓이는 것이 아닐 수 없다. 결합하는 성질이나 유동하는 성질 역시 궁극적으로는 물의 근본 속성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물의 해부학」에서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물의 그러한 생리적 속성이라는 일차원성에 머물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런 생리성은 인간의 본성과 밀접히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물의 응고성, 결빙성 속에서 새로운 의미의 자장이 태어난다. 물은 우주의 진리나 이법과 같은 긍정성에서가 아니라 인간의 덫인 욕망이라는 부정성으로 새롭게 의미화되는 것이다.

 

신성의 영역을 넘나들기 이전이라면 인간의 욕망은 지극히 견고한 것으로 인식된다. 욕망을 제어한 삶이란 거의 불가능한 까닭이다. 어떻든 그러한 욕망이 인간에게 고착될수록 인간은 더욱 그것의 노예가 되어버린다. 이 작품의 매력은 물에 대한 물리적 통찰과 그로부터 얻어진 냉철한 인식으로부터 물이 갖고 있는 분리 불가능한 속성, 그리고 그 견고성 속에서 근대적 인간형들이 갖고 있는 욕망의 지형도를 이해한 데서 찾아진다. 근대적 인간형이 갖고 있는 한계를 물의 물리적 속성에서 도출해내고 있다는 것, 그것이 이 작품이 갖는 의의일 것이다.

 

「물의 해부학」은 근대의 사유 속에 편입된 물의 자장을 새롭게 인식한 시이다. 자연물 속에서 근대적 인간형을 읽어내는 것이 낯선 경우는 아님에도 불구하고 물의 속성을 통해 인간의 욕망을 인식한 상상력은 지극히 참신해 보인다. 더구나 순기능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던 관습적 의미를 전복시켜버리는 그러한 돌발적 사유는 인식의 깊이 없이는 불가능한 경우이다.

 

산을 오르지 않는다// 남고개 작은 언덕 너머/ 낮은 골짜기 따라/ 작은 물 큰 물과 만나는/ 강으로 간다// 계곡 웅덩이 버들치 가재 소금쟁이 보면서/ 비알진 언덕빼기 놀라 달아나는/ 참다람쥐 토끼 꿩들 보면서 강으로 간다// 강 저편 아낙들이 올뱅이를 줍는다/ 오늘따라 알이 실하다며/ 히득이는 웃음 속에는/ 산과 산이/ 이마를 맞대고 마을 이루는/ 알토란 꿈이 펼쳐진다// 산중에 들어 살면서 산 오르지 않는다

 

_양문규 「강으로 간다」 전문

 

욕망에 몰입된 자아가 근대적 인간형이라면 그 저편에 놓인 자아도 똑같은 경우이다. 「물의 해부학」이 욕망의 절대성을 말한 것이라면, 「강으로 간다」는 그 반대편에 놓인다. 근대는 긍정과 부정 사이에서 끊임없는 길항작용을 한다. 하나의 결락은 다른 쪽의 보충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욕망을 요구하는 근대가 있다면, 그것을 초월하고자 하는 근대도 있다.

 

양문규는 똑같은 대상을 두고 이향란의 경우와는 전연 다른 시각에서 물의 상상력을 펼쳐보인다. 그에게 물이란 어떤 근원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시인의 시들이 귀소본능성을 그 기본 특성으로 하고 있거니와 그런 지향들은 어떤 사물들을 근원과 곧바로 연결시키는 특성을 보여주었다. 그가 걷는 근원에의 도정들이 모두 원점회귀 단위들과 분리하기 어려운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러한 근원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만난 것 가운데 하나가 물의 상상력이다.

 

이 시인의 작품에서 물은 「물의 해부학」과 달리 섬세한 시선과 날카로운 관찰력으로 여과되지 않는다. 근원으로 돌아가는 길은 그저 단순하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물의 결빙성과 응고성, 분리 불가능성 등 물에 결부된 잡다한 상상력은 더 이상 요구되지 않는다. 근대가 주는 정신의 혼란이나 이해 불가능성, 그리고 복합성의 사유들은 강으로 흘러가는 물속에 모두 익사해 버린다. 그리하여 남는 것은 “낮은 골짜기 따라/ 작은 물 큰 물이 만나”는 자연의 순일한 법칙뿐이다. 이런 섭리에 순응할 때 분열된 자의식이나 근대의 암흑이 던져준 굴레로부터 자연스럽게 해방될 것이다.

 

근대는 인간에게 두 가지 양면성을 남겨 두었다. 분열과 파괴적인 속성이 그 하나이고, 통합과 복구적 속성이 다른 하나이다. 이는 계몽의 명암과 곧바로 맞아떨어지는 것이기도 한데, 그만큼 근대는 개발과 보존이라는, 이질적인 야누스의 얼굴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분열과 통합의 상상력은 그러한 근대가 주는 명암과 정확히 대응된다. 동일한 물을 두고 가졌던 두시인의 편차 역시 근대의 양면적 모습과 닮아 있다. 하나는 욕망을, 다른 하나는 근원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까닭이다.

 

4. 고발과 실천으로서의 물

 

근대의 제반 사유는 현존하는 지상의 사물과 결합하여 다양한 스펙트럼을 만들어내었다. 근대성이 인간적 삶의 조건을 어떻게 개선시킬 것인가에 모아진다고 할 때, 생명의 근원을 상징하는 물의 이미지가 주요한 매개로 등장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다. 근대가 위기의 관점에서 인식될 때, 그에 비례해서 반담론의 미학 또한 새롭게 인식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과정에서 기존에 덧씌워졌던 이미지들은 새로운 옷을 입고 등장하기 시작했다. 산업화가 정점에 이른 시기에 현상하기 시작한 물의 상징적 의미들이 근대의 사유 속에서 걸러지기 시작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물은 더 이상 생명의 근원이나 영원과 같은 재생의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되었다. 물은 긍정성이 아니라 부정성에서 사유되고 근대에 대한 안티 담론적 경향이 더욱 강하게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관광객들이 잔잔한 호수를 건너갈 때// 水夫는 시체를 건지려/ 호수 밑바닥으로 내려가/ 호수 밑바닥에 소리 없이 점점 불어나는/ 배때기가 뚱뚱해진 쓰레기들의 엄청난 무덤을,/ 버려진 태아와 애벌레와/ 더러는 고양이도 개도 반죽된/ 개흙투성이 흙탕물 속에/ 신발짝, 깨진 플라스틱통, 비닐조각 따위를 먹고 배때기가/ 뚱뚱해진 쓰레기들의 엄청난 무덤을,/ 갈수록 시체처럼 몸집이 불어나는 무덤을/ 본다 폐수의 독에 중독된 채/ 창자가 곪아가는 우울한 쇠우렁이를/ 물가에 발상했던 문명이/ 처리되지 않은 뒷구멍의 온갖 배설물과 함께/ 곪아가는 증거를// 호수를 둘러싼 호텔과 산들의 경관에/ 취하면서 유원지를 향해/ 관광객들이 잔잔한 호수를 건너갈 때

 

_최승호 「물 위에 물 아래」 전문

 

근대의 비판적 현실에 착목하게 할 때, 서정적 자아의 시선이 어떤 모호한 형이상학보다 현실 바깥의 구체적 대상으로 향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욕망과 같은 실존의 문제보다는 환경과 같은 외부적 요건이 중요해진 것인데, 그러한 면에서 최승호의 「물 위에 물 아래」는 근대의 불온한 현실에 대해 시인이 무엇을 사유해야 하는지를 잘 일러주는 작품이라 할 것이다. 이 작품의 핵심 이미지 역시 물이다. 그러나 여기서 그것은 생명의 근원도 아니고 세례와 같은 재생적 이미지로도 구현되지 않는다. 물은 근대의 사유 속에 편입됨으로써 더 이상의 긍정적 기능을 잃고 용도 폐기되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의 물은 근대의 어둠이 뿌려놓은 온갖 부정한 것들의 백화점으로 의미화 되고 있다. 문명의 발상지이고 인간의 삶을 추동했던 물은 이제 그 긍정적 동력을 잃어버리고 만다. 바이러스적으로 팽창하기만 하는 인간의 욕망에 의해 그것은 이제 죽음의 상징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물은 자연이라는 거대 서사의 상징이었다. 근대의 사유 속으로 들어오기 전에 물은 생명의 원형이었다. 그러나 근대 산업사회는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공존을 허락하지 않았다. 자연은 인간의 기술적 욕망에 의해 그저 개발의 대상으로만 존재하게 되었다. 그러나 무한 증식하던 인간의 욕망은 그 승리를 보장받지 못했다. 생명의 근원인 물이 더 이상 그 긍정적 역할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_정희성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전문

 

인용시는 유연한 리듬과 복합적 인간상들이 한데 어울려 빼어난 시적 구성을 보이고 있는 「저문 강에 삽을 씻고」이다. 이 작품을 이끌어가는 소재 역시 물이다. 근대의 사유 속에 편입된 최승호의 물처럼 이 작품의 물도 긍정적 함의로 읽히지 않는다.

 

이 작품의 물 이미지는 매우 다층화되어 나타난다. 우선 그 가운데 하나가 속성이다. 1연에서 보듯 그것은 흐름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러한 지속성이 어떤 긍정적 맥락으로 곧바로 대응되지 않는다. 오히려 서정 주체의 빈곤한 처지와 결부되면서, 그러한 열악성이 쉽게 해소될 수 없는 것임을 암시하는 상징으로 구현된다. 두 번째는 그럼으로써 표출되는 탄식이랄까 한의 의미이다. “슬픔을 퍼다 버린 강”,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통해서 보듯 자아의 고단한 삶이 뿌리 깊은 것임을 말해주고 있으며, 또 그러한 삶이 “샛강 바닥 썩은 물”로 전화함으로써 현실의 궁벽성과 더욱 굳건히 결합시키는 역할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물이 다시 흘러감으로써, 아니 영원히 지속됨으로써 시적 자아의 설움이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 곧 한으로 맺히게 되었음을 일러주고 있다.

 

이처럼, 「저문 강에 삽을 씻고」에서의 물의 의미는 복합적으로 나타난다. “삽을 씻는” 세례로서의 물이 있는가 하면, “쭈그려 앉아” 보는 응시의 대상으로서의 물이 있고, ‘달빛’에 반사되는 물도 있다. 뿐만 아니라 ‘슬픔’을 안는 물, 그러한 부정성들이 모여서 만든 ‘썩은’ 물도 있다. 이렇듯 물의 온갖 기능적 속성이 모여서 만든 작품이 「저문 강에 삽을 씻고」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속성과 이미지로 결합되더라도 이 작품에서의 물의 의미는 가난과 같은 소외된 자들의 잔영이라는 측면과 분리하기 어렵다. 그러한 물이 가난한 자의 삶과 동일시된다는 것, 곧 “우리가 저와 같다”는 데에서 이 작품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5. 현대시에서의 물의 의미

 

물은 생명의 근원으로 사유된다. 그러한 속성은 실상 일상생활의 한 편린에서만 중요시되었던 것은 아니고 문학의 경우에도 똑같은 무게로 다가왔다. 물은 흔히 정지와 반복과 같은 영원의 이미지나 상징, 세례와 같은 재생의 의미로 구현되어 왔다. 그러나 그것의 보편적 의미들은 근대의 제반 양상에 따라 다양하게 굴절되어 여러 의미역을 갖기 시작했다.

 

한국 현대시에서 물이 작품의 소재로 처음 등장한 것은 「해에게서 소년에게」이다. 이후 1920년대의 소월을 거치면서 그것은 많은 시인들이 즐겨 사용하는 소재가 되었다. 그 대강의 의의들은 물이 보지하고 있던 상징의 테두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근대화가 진행되고 산업화가 심화되면서 물의 의미는 많은 변화를 겪게 된다. 서정적 자아의 처지나 세계관에 따라 그것은 욕망의 상징이나 근원의 의미가 되기도 했고, 현대 사회의 병리적인 양상을 대변하는 것이 되기도 했다. 근대가 심화되면서부터 시작 주체의 시선은 자아 내부보다는 외부로 향하게 되었다. 이제 물은 어떤 보편화된 틀이나 규격화된 의미보다는 근대 사회의 요구에 부응하면서 그 나름의 비판적 구실을 충실히 수행하는 근대적 소재로 거듭 태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만큼 물도 근대의 사유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물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송기한

 

1991년 『시와시학』 비평 등단

저서 『한국시의 근대성과 반근대성』 『서정주 연구』 외

현 대전대 국문과 교수

 

계간 『시와 표현』 1993년 가을호 기획특집

출처 : 세상과 세상 사이
글쓴이 : 장자의 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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