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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호열 시인/詩 창작 강의

[스크랩] 자끄 라깡[Jacques Marie Emile Lacan

by 丹野 2013. 1. 26.

 

자끄 라깡[Jacques Marie Emile Lacan, 1901 ~ 1981]

 

- 욕망과 성의 철학자

 

 

[Jacques Marie Emile Lacan, 1901 ~ 1981],

 

1901년 프랑스의 파리 시에서 태어났다. 고등사범학교에서 처음으로 철학을 접하였다, 1920년에 대학에서 의학공부를 시작하여 1926년에는 정신의학으로 자신의 전공을 결정한다. 이 시기에 그의 진취적인 정신은 의학에만 머물렀던 것이 아니라 초현실주의에 심취하기도 한다. 1930년대에는 본격적으로 초현실주의의 출판물들에 자신의 글을 기고하기도 한다. 그는 1928년 경찰청 소속 정신이상자 특별의무실에서 인턴의사로 근무하게 되는데 이때 라캉은 편집증에 관한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되고 이를 연구하게 된다. 그리고 라캉은 정신의학에만 관심을 가졌던 것이 아니라 철학에도 관심을 갖고 있었다. 당시에 그를 사로잡았던 철학 저술들은 헤겔, 야스퍼스, 하이데거와 같은 독일 철학자이다.

 

1932년에 의학 학위를 취득하였다. 1934년에는 친구이자 의사인 실뱅 블롱댕의 여동생인 누이 마리 루이즈 블롱댕과 결혼하여 1남2녀의 자식을 두게 된다. 그리고 1936년 그는 마리엔바트에서 열리는 국제 정신분석 협회의 연례 총회에서 유명한 “거울 단계”에 관한 논문을 발표한다. 이 논문을 발표했을 때, 어네스트 존스에 의해서 논문발표가 중단되는 헤프닝이 벌어진다. 그것은 라캉의 이론이 당시의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에 비판과 거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그는 1930년대 초현실주의 화가, 작가들의 무의식에 대한 탐구와 표출에 영향을 받아 무의식의 정신세계를 언어학적으로 탐구하는 데에 일찍이 관심을 보였다. 1936년 파리 정신분석학회에 가입하였다. 그는 그의 '프로이트로의 회귀'라는 명분에 의한 기존 정신학에 대한 비판으로 인하여 다른 정신분석학자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다.

 

세계 제 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고 독일은 프랑스를 점령하게 된다. 이 때 라캉은 프랑스 육군에 소집되어 군 병원에 배치된다. 이 시기는 라캉에게 또 다른 열애의 시기가 된다. 조르주 바타유의 부인인 실비아 바타유와 불륜적인 사랑을 지속하여 딸 주디스 바타유가 태어나고, 마리 루이즈 블롱댕과 헤어진다. 라캉이 전적으로 학문적인 연구를 시작한 것은 1951년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주간 세미나를 열고 “프로이트로 귀환”을 역설하는데, 당시에 그가 귀환하고자 했던 프로이트는 성숙기의 프로이트로 무의식의 구조를 언급하던 시기의 프로이트이다.

 

1953년 그는 파리정신분석학회(프랑스어: Société Parisienne de Psychoanalyse)의 회장이 되었으나, 6개월 만에 교육 방식으로 인한 갈등으로 그와 그의 추종자들은 파리정신분석학회를 탈퇴하여 프랑스정신분석학회(프랑스어: Société Française de Psychanalyse)를 조직하였다. 같은해 그는 파리 대학교에서 세미나를 시작하였는데 이 세미나는 정신분석학자들 뿐만 아니라 장 이폴리트와 폴 리쾨르와 같은 철학자들에게서도 많은 관심을 끌었다. 이 세미나는 1979년까지 계속되었다.

 

라캉은 무의식이 언어와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비정통적인 분석법을 사용하였고 치료가 정신분석학의 목표라는 생각을 거부하였는데, 이로 인해서 많은 동료학자들과 멀어지게 되었다. 1963년 국제정신분석학회가 프랑스정신분석학회의 가입을 위해서 학회에서 라캉을 교육분석가 목록에서 제외할 것을 요구하자 그는 프랑스정신분석학회를 탈퇴하였다.

 

1964년 파리프로이트학회를 창설하였는데, 이 단체는 1980년 라캉 스스로에 의해서 프로이트의 이론을 충분히 추종하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해산되었다. 1966년 논문집 Écrits의 간행으로 유명해져 구조주의의 대표적인 학자로 떠올랐다. 1981년 파리 시에서 사망하였다.

 

거울 단계 이론

 

1936년 8월 3일 오후 3시 40분. 라캉은 마리엔바트에서 개최된 제 14차 국제정신분석학회에서 『"거울단계"』(Stade du miroir)라는 자신의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의 중요성은 결코 소홀히 평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논문을 통해 라캉은 정신분석 운동에 공식적으로 가입했을 뿐만 아니라, 그 후 여러 해 동안 정신분석계에서 논의될 인간의 자아라는 개념을 제안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개념은 새로운 형태로 또는 변화된 형태로 평생 그를 따라 다니는 사상적 모티프가 되었다.

 

 

 

"거울단계"는 단순히 개인 성장사한 점을 차지하는 시기가 아니라 하나의 경기장(stade), 인간 주체의 싸움이 영원히 치러지는 그런 경기장인 것이다. 경기장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라캉의 말장난과 비유적 재담은 처음 보기에는 장난스럽고, 자의식적인 문장 형식이라는 순간적인 효과를 발휘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 말장난은 그 뒤에 더 거대한 야망을 감추고 있다. 그것은 개인의 인생 주기에서 개인의 인성위태로운 상태에 놓이게 되는 최초의 순간을 찾아보자는 것이며, 나아가 정신분석이라는 도덕적 드라마의 새로운 시작을 찾아보자는 것이다. '거울의' 순간에 대한 라캉의 설명은 자아의 탄생 신화와 자아의 타락 신화를 동시에 마련해 준다.

 

이러한 새로운 자아 설밑받침이 된 경험적 관측 사실은 생후 6개월에서 18개월 된 유아의 행동에 바탕을 둔 것이다. 이 시기의 유아는 거울에 비친 자기 이미지를 보거나 어른 혹은 다른 아이의 모방적 동작에서 자신과 유사한 동작을 볼 때, 하나의 특징적 반응을 보인다. 유아가 이처럼 바라보는 순간은 극적인 발견을 하게 되는 순간이고, 막연하게나마 '나는 저거(거울에 비친 이미지)야' 혹은 '저게(다른아이의 동작) 나야.'라는 명제를 구성하게 된다. 라캉은 아이의 기뻐하는 모습과 그 이미지에 매혹되는 태도 그리고 그러한 반응의 장난스러움을 주목한다. 이런 모든 점에서 유아는 같은 나이의 침팬지와는 다르게 행동하기 때문이다.

 

이 행위(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바라보는 것)는, 원숭이의 경우엔 거울 이미지의 허상 파악되면 더 이상 원숭이의 흥미를 끌지 못한다. 그러나 원숭이와는 달리, 실제 아이에게서는 일련의 몸짓을 만들어 내게 된다. 이 과정에서 아이는 거울 속에 비친 자기의 이미지가 만들어 내는 움직임과 그 움직임 주변의 환경, 그 자신의 육체나 그 옆에 있는 사람이나 사물, 말하자면 아이가 모방하는 현실 사이의 관계를 경험한다.

 

그러나 아이의 즐거움과 유희는 좋은 뉴스가 별로 없는 라캉의 서술에서 사실상 사소한 역할만 할뿐이다. 거울 단계의 시기에 난생 처음으로 아이의 세계에 뭔가가 가물거린다. 아이는 이 때 음식, 안전, 안락 등을 얻으려면 여전히 어른에게 의존해야 하며, 또 자기 자신의 몸뚱이도 부분적으로밖에는 놀리지 못한다. 그러나 여기 거울 앞에, 비록 조잡한 형태이긴 하지만 하나의 자율성 또는 개인의 통제력이 희미하게 어른거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거울 이미지는 이제 막 태어나기 시작하는 자아의 아주 자그마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작은 관측 자료를 바탕으로 하여 아이는 자아의 나중 모습이나 저 멀리 아득한 지평선 너머에 있는 '성숙된' 자기, 자수성가한 어른, 그리고 사회적 성공의 희망 등을 내다볼 수 있는 것이다. 아이의 즐거운 유희는 장난을 잘 치고 방황하기 좋아하는 어른의 지능을 미리 말해 주는 예고편이라고 볼 수도 있다.

 

"아이와 거울만 있는 그 현장은, 비록 책임 있는 행위자(어머니, 유모, 아버지 등)로 생각될 만한 존재가 없더라도, 형성중인 아이의 자아에 거짓과 기만을 주입시킨다." 이런 주장이 라캉의 초기 논문에는 하나의 후렴구처럼 일관되게 흐르고 있다. 이러한 주장을 말하는 어조는 자신에 넘치는 권고의 어조이다. 라캉 이전의 정신분석학자들은 '겉으로만 정직해 보이는 것에 불과한 자아를 정직하다고 생각해 왔다.' 그래서 이런 잘못된 생각을 폭로해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이다. 인간은 그 거울에 비친 이미지(또는 이미지에 매혹되는 것)가 실제로는 비현실적인 것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인간이 진리를 향해 진보하려고 한다면, '아무것도 비춰지지 않는 표면만을 제공하는 빛이 없는 거울'을 넘어서야 한다.

 

무의식과 억압을 가장 핵심적인 프로이트의 용어라고 생각해 왔던 독자는, 이런 용어들이 라캉의 저작에서는 말석에 위치해 있는 것을 보고 어리둥절할 것이다. 그 대신 라캉 이전에는 정신분석학에서 별 의미가 없던 소외(alienation)라는 용어가 핵심어로 떠오르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라캉은 거울에 사로잡힌 아이는 망상적인 자아 형성의 길에 오르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정신병원의 광기에 노출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니까 라캉은 아이에게 이런 가혹한 시련이 뒤따른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헤겔과 마르크스의 소외(Entfremdung)는 비록 프랑스어 alienation으로 번역되기는 하지만, 아이의 시련에 철학적 위엄을 부여하고 있다. 또한 법적인 의미에서의 소외(재산권과 관련된)도, 희미하기는 하지만 법적인 절차를 연상시킨다.

 

그런데 라캉이 소외와 그 유사어를 다루는 방식은 그 개념적 실체보다 '수사학적 표면'을 더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바꾸어 말하면 alienation에 너무 다양한 의미가 부여되어 있어서 그 의미들이 서로 갈등하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으며, 그래서 소외가 가리키는 조건으로부터 빠져나올 길이 없고 또 탈소외의 처방이 아예 없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소외라는 용어가 쓸모 있는 것이 되려면, 그것이 어떤 구체적인 사실을 적시해야만 한다. 그러나 라캉은 이와는 달리, 미묘한 변용(이렇게도 해석될 수 있고 저렇게도 해석될 수 있는 것)에만 매달리고 있는 인상을 주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1884년 「경제학-철학 수고」나 「그룬트리세」에서 소외의 뜻을 분명히 규정하고 있다. 개인은 자신의 노동으로부터 소외되고 또 그 노동의 결과물(제품)에서도 소외되는데, 이것이 모든 소외 관계(인간과 자연, 개인과 사회, 개인과 그의 신체)의 원형이 된다고 마르크스는 주장했다. 그리고 이런 소외 개념을 제시한 다음, 그 소외를 극복하는 재통합의 과정을 제시하고 있다. 이처럼 마르크스의 경우에는, 소외라는 용어가 각 단계를 거쳐 나가면서 인간사회의 폭넓은 지형도 논리적인 정치 메시지를 제시해 주었다.

 

이에 비해 라캉의 소외는 마르크스와는 극명한 대조를 보이고 있다. 우선 거울 단계에서 발생한 원형적 소외가 사회에 침투되는 방식은 산만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라캉의 가설에는, 소외가 조직적인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임상적 자료가 결여되어 있다. 그래서 아무런 지형도나 메시지를 만들어 내지 못하고 만다.

 

라캉의 주장은 인간은 적정 시기보다 일찍 태어난다. 그래서 인간이 운동신경을 완전히 장악하고 또 자발적인 행동을 할 수 있기까지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린다. 거울 이미지는 '나'의 신기루이며, 아이가 나중에 획득하게 될 통합 조정의 잠재적 능력이 언젠가는 실현될 것임을 예고한다. 실제로 거울 이미지는 이런 능력의 발달을 촉진시킨다. 여기까지는 라캉의 설명을 따라갈 수 있다. 그러나 '나'의 '소외적 방향'은 도대체 어떤 것인가? 그것은 개인(아이)이 영구히 자기 자신과 불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나'는 동결(고정)시킬 수 없는 주체의 과정을 끊임없이 동결시키려-즉, 늘 움직이는 장인간의 욕망을 고정시키려-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이라는 종이런 소외시킬 수 없는 소외가 있다. 그러나 이 소외는 잡종의 철학적 언어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괴기 소설을 연상시키는 어조로 설명되고 있다.

 

프로이트의 이론은 벌써 오래 전에 자아의 '구성성'을 설명해 놓았다. 자아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서로 갈등하는 힘이 작용하는 장, 자아가 그 본령을 지키기 위해 동원하는 방어장치 등을 프로이트는 자세히 설명해 놓았다. 그런데 라캉은 이런 자아 형성의 과정을 프랑켄슈타인 박사를 연상시키는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저런 부품들을 끌어모아 인간 주체의 내부에 단단히 무장시킨 기계적 인간을 만들어 내고, 그 인간에게 바람직하지 않은 습관과 파괴적인 욕구를 부여한 것이다. 이러한 주체의 자기분열은 프로이트의 꿈 연구로 처음 드러나게 되었는데, 이것은 라캉에 의해 하나의 악몽으로 다시 언급되고 있다.

 

여기에 라캉은 '파편화된 신체'의 개념을 제시한다. 이것은 정신분석학의 공식 용어로부터 과감하게 일탈한 경우라고 할 수 있는데, 이 환상은 자아의 '소외하는 동일성'과 구조적 관계를 맺고 있다. 왜냐하면 이런 환상을 통해 개인은 아주 어릴 적의 신체적 불안정성에 대한 기억을 보유하기 때문이다. 아이는 어릴 적에 신체가 전반적으로 파편화되어 있는 것처럼 느낀다. 이런 기억과 관련된 불안이 안전한 몸을 가진 '나'의 소유자가 되고 싶다는 욕망을 촉진시킨다. 그런데 자아를 향한 이러한 투사는 파편화로 되돌아가고 싶어하는 인력의해 끊임없이 위협을 당한다. 그리고 자아의 단단한 무장 오히려 개인에게 하나의 폭력을 가하여 또다시 그의 파편(disjecta membra)을 흩뿌리게 한다.

프로이트와 마찬가지로 라캉에게도 동일시는 정신적인 장치의 주요 동기이다. 동일시는 활력의 원천이며, 개인과 다른 사람들 사이에 벌어지는 끊임없는 극적인 상호관계의 촉진제이다. 그러나 라캉은, 동일시라는 기제가 막강한 설명력을 가지려면 아주 초창기의 원형 상태에서부터 관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프로이트와 의견을 달리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시작될 즈음에는 아이가 이미 너무 커 버렸고, 또 아이의 동일시의 범위가 너무 넓어져, 동일시의 원칙에만 바탕을 둔 설명은 어색하거나 불분명한 것이 된다는 주장이다. 라캉은 오이디푸스 단계가 촉발하는 경쟁의식과 별명짓기 놀이를 넘어서서 그보다 앞 단계를 주목할 것을 요구한다. 즉 어린아이가 단 하나의 욕망 대상, 단 하나의 별명인 자기 자신만을 갖고 있는 그 전의 세계를 주목하라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오이디푸스적 동일시를 최초의 근원적 순간-남자아이나 여자아이나 어른으로 성장하면서 가장 끔찍한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르는 순간-으로 파악했으나, 라캉은 오이디푸스가 2차적 순간이며, 자아를 진정시키고 정상화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오히려 라캉은 파괴적이고 문제적인 최초의 동일시가 거울 단계에서 일어난다고 주장했다.

 

라캉은, 거울 단계에서 주체의 내부에 동일시 기제가 진행되면 이것이 나중에 시각적 지각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주장을 하고 싶어한다. 그의 논지는 바로 자기동일시의 원초적인 충동이 거울 너머의 세계에서도 무한히 영향을 주게 된다는 것이다. "거울의 이미지는 가시적 세계의 문턱이 될 것이다" '거울'과 '장관'은 나중에 라캉이 상상계라고 명명하는 세계의 구역을 확정짓는 양대 기둥이 된다.

 

자아 형성과 '인간 지식의 일반적 구조' 사이의 관계는 계속 진행되면서 변화하게 된다. 예를 들면 '영원성'과 '정지'는 자아의 영역에서 볼 때 경험의 유동성으로부터의 일방적 후퇴 혹은 유동하는 욕망을 고의적으로 거부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들이 다른 데에서는 사색의 필수적인 도구가 된다. 가령 조금이라도 정지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올바른 의미의 세계인 '상징적 다음성'에 접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자아와 지식의 평행 관계는 엄격하게 규정되어 있다. 즉 자아의 구조와 지식의 구조가 소외의 의지 혹은 추구된 광기의 의지에 의해 전형화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구조는 외견상 대답할 수 없고 처리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 시기에 라캉이 드러낸 거대한 규모에 비해 볼 때, 프로이트의 이론을 재해석한 그의 논지는 너무 빈약했고, 라캉이 나중에 정신분석의 '근본'이라고 지명했던 두 가지 개념(무의식과 전이)이 별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도 특히 눈에 띈다.

 

그리고 프로이트에게는 물론이고 후기의 라캉에게도 아주 중요한 구조적 개념이면서 영원히 이론적 추론을 촉발시키는 개념인 무의식은, 이 단계에서 아직 '활성화되어 있지도 않은데다가 생각할 가치도 없는 것'에 불과하다. 바꾸어 말하면, 이 시기의 라캉은 정신분석이 곧 자아와 상상계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어린아이가 처음 거울을 보고 그 속의 나를 자아로 인식하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그 사람을 내 속에 그려진 모습으로 보고자 하는 것과 참 많이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즉 내가 바라본 나의 거울 이미지는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눈에 비친 이미지와 같다. 내가 나 자신을 직접 보지 못하고 거울을 통해 바라보듯이 우리는 타인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없다. 항상 우리 마음속에 그려진 즉 거울에 비친 타인을 바라볼 뿐이다. 자아가 타인에 의해 형성되듯이 타인은 우리(나)에 의해 형성된다.

 

내가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고 했을 때, 나는 그 사람 그대로를 볼 수 없기 때문에 내 마음에 그려진 그 사람의 이미지를 사랑하게 된다. 그 이미지는 조금은 과장되어 있을 수도 있고, 내가 좋아하는 이상형을 그렸을 수도 있고, 그 사람과 전혀 다른 모습일 수도 있다. 나는 그 이미지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끝까지 내 속에 그려진 이미지를 사랑한다. 그와 이미지가 다른 부분을 발견했을 때 나는 내 마음속 그 사람 이미지를 수정할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내 마음속 이미지에 맞출려고 한다. 자아가 타인에 의해 형성되지만 끊임없이 주체적 일려고 하듯 내 속의 이미지 또한 주체적이길 원한다.

 

그렇다면, 거울 이미지의 허상을 알게 되면 흥미를 잃는다는 원숭이는 허상을 깨고, 실체를 바라볼 수 있는 것일까? 의문이다.

 

우리는 거울처럼 깨어질 수 있는 자아를 가지고 있다.

 

 

사유하는 자아의 절대성

 

흔히 서양 철학의 근본주의적 전통을 뒤흔든 세 사람의 사상가로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를 꼽는다. 서양 철학은 고대 희랍의 소크라테스 이래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의 다양한 사조들의 각축장이었고 이것들은 서로 비판과 수정을 통해 발전적으로 전개되어 왔음에 틀림없다.

 

그 가운데서도 서양의 독특한 지적 전통을 형성하는 주요한 요소 중 하나는 합리적이고 자율적인 주체의 개념이다.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 사유하는 자아의 절대성을 주장하는 데카르트를 비롯해서 개인의 무한한 자유와 책임을 강조하는 실존주의자 사르트르에 이르기까지 서양 철학의 인간 이해는 합리적 본성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 이해에 쐐기를 박고 인간의 비합리적인 본성을 전면적으로 드러낸 사람들이 있다.

 

마르크스는 인간의 삶에 있어서 경제적 하부구조가 차지하는 무게를 강조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율적 정신을 가정하는 철학들의 이데올로기적 특성을 가차없이 비판한 바 있다. 니체는 인간 내부의 비이성적인 욕구와 의지를 찬미하며, 합리적 인간의 기만적 특성을 폭로하는 데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독설가이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자아 이면에 있는 강렬한 무의식적 성본능의 작용을 드러내고 이를 심리치료에 의해 증명함으로써 인간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박살낸 사람이다. 이들 중 가장 현대적인 의미에서 영향력있는 사람은 아무래도 프로이트가 아닐까 한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내밀한 성을 수면 위로 끌어올려 공적, 이론적 용어로 자리매김한 장본인이다. 20세기 이후부터 한 세기를 풍미한 그의 이론의 혁명적 영향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다른 한편 정신분석학이 하나의 문화현상으로 확산되어 가는 오늘날 프로이트를 독창적인 방법으로 재해석하고 그의 철학적·문화적 의미를 부각시킨 것은 라깡(1901~1981)의 공적이다.

 

서구사회에서 정신분석학은 라깡과 더불어 정신과 의사의 심리치료실에서 나와 일반인들의 삶에 필수불가결한 지적 양분이 되었다. 라깡은 1930년대 이후 파리의 세미나에서 자신의 논문들을 발표하면서 프랑스 지성계에 꾸준히 영향력을 행사해 왔고 68혁명 이후에는 가히 사회현상이라고 할만한 열풍을 일으켰다.

 

맑시즘과, 변증법적 유물론을 통합한 실존주의가 주류였던 당시 프랑스 지성계는 정신분석학이 개인을 너무 강조하고 사회, 경제, 정치적 맥락을 무시한다는 비판 아래 라깡에 덜 호의적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학생들과 일반인들까지 참가한 68문화혁명은 진정한 인간 해방이 정치적인 것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이것은 기존의 제도와 관습의 경직성을 타파하려 할 뿐 아니라 냉전으로 얼어붙은 개인의 상상력과 의식을 해방하고 자유로운 자기표현을 통한 새로운 인간관계를 모색하려는 점에 있어서 너무나 인간적인 요구라 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라깡의 이론은 개인으로 다시 돌아와 사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을 연결하는 새로운 사고틀을 제시함으로써 혁명 이후 세대에 걸맞는 인간 이해를 제공했다고 평가된다.

 

 

인간은 욕망의 존재

 

1926년 라깡은 신경학회에서 첫 발표를 하였으며 1932년에는 의학박사 학위논문인 「인성과 관련된 편집증적 정신이상」을 제출하고 책으로 출판했다. 이 때부터 정신분석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해 1933년부터 무수히 많은 기고, 강연, 발표회 등의 활동을 했다.

 

1936년 마리엔바트에서 개최된 국제 정신분석학회에서 ‘거울 단계’에 관한 글을 발표하고 1951년 유명한 ‘도라에 관한 세미나’를 개최하였으며 이런 식의 세미나를 자신의 집에서 29년 동안 계속했다. 1953년 파리 정신분석학회를 탈퇴하고 프랑스 정신분석학회를 창립하였다.

 

라깡은 전통적으로 인간을 합리적이며 주체적인 존재로 본 데 반발하면서 인간이 욕망의 존재임을 부각시킨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어디까지나 프로이트주의자로 남아 있다. 그러나 프로이트에 있어서 무의식을 지배하는 성적 에너지인 리비도(libido)는 일종의 물리적 에너지로서 인간의 이성으로 파악할 수 없는 비합리적인 힘으로 간주되는 반면, 라깡은 무의식의 구조와 그것이 나타나는 양상을 소쉬르의 구조주의 언어학을 도입하여 인간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해명하고자 한다. 이미 프로이트도 정신치료에 있어서 언어적 표현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을 뿐만 아니라 정상인에 있어서도 농담이나 말실수 등에서 무의식의 작용이 있음을 관찰하였다. 라깡은 이러한 면을 단지 부각시키는데 그치지 않고 무의식을 전적으로 언어적 질서에 의해 재조명한다.

 

무의식은 고정적인 것이 아니고 끊임없이 발산할 출구를 찾는데 그 방식이 언어학의 법칙에 따른다. 언어기호는 소쉬르가 말한 것처럼 기표와 기의의 관계 즉 음성 표현(또는 시각적 이미지)과 그것이 함축하는 개념과의 관계에서 그 의미가 드러난다.

 

그러나 이 두 요소는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말을 할 때 기표의 내용에 충실하고자 해도 본의 아니게 표현 자체에 이끌려 다른 내용이 되는 수가 종종 있다. 이것은 사실상 우리의 의도와 무관하게 무의식이 그 안에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르면 아마도 우리는 운명적으로 거짓말쟁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은 말이란 전적으로 무의식의 표현이며 무의식은 언어로 나타날 경우 자신의 본 의도를 부정하고 속이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대화시 나타나는 겉보기의 논리와 합리성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무의식적 욕망에 이끌려 간다. 이처럼 기표는 필연적으로 기의와 분리되어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규칙에 의해 작용한다.

예를 들면 부모의 성교를 목격한 어린아이에게 그 행위가 의미하는 바는 명확치 않으나 그것은 시각적 이미지 즉 기표로 아이의 뇌리에 각인되어 그 아이가 성인이 된 후 그것 자체의 운동 방식에 의해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처럼 기표가 기의를 온전히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진실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더구나 그것을 인식하는 통합된 자아는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언어는 기본적으로 은유적

 

이와 같은 사실은 라깡의 언어관에 의해 분명해진다. 라깡은 언어가 기본적으로 은유적이라고 본다. 은유는 그것이 의미하고자 하는 복잡한 내용을 하나의 단어로 압축시킴으로써 내용의 다양성과 풍부함을 억압한다. 언어화의 과정은 바로 이러한 은유적 압축과정을 거친다. 언어는 실재를 있는 그대로 반영할 수 없는 까닭에 상징적 기능에 머물 수밖에 없으며, 이로 인해 적나라한 체험의 세계는 무의식으로 침잠한다.

 

라깡은 아이가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언어의 상징기능 자체에 의해 무의식의 내용이 형성된다고 보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아이의 인성발달을 특징짓는 단계들인 실재계, 상상계, 상징계가 구분된다. 이것들은 각각 프로이트의 이드, 자아, 초자아처럼 한 개인의 내부에서 작용하는 세 종류의 힘이기도 하다.

 

실재계(the real)는 출생과 더불어 시작되며 생물학적 욕구를 포함하는 경험세계 전체를 가리킨다. 그러나 인간은 성장하면서 사회 속에서 이미 의미를 가지는 체험, 상상, 언어를 통해 세계와 접하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의 세계는 미지의 세계로 남는다. 따라서 실재는 언제나 우리에게 환상이나 신기루처럼 다가갈 수 없는 느낌, 일종의 결핍감을 준다. 유아는 어머니와의 접촉을 통해 성감대를 발달시키는데 그것은 인간의 욕망이 드러나는 구조를 형성한다.

 

상상계(the imaginary)는 거울 단계라고도 하며 유아시절에 자아가 형성되는 단계이다. 대략 생후 6~18개월 사이에 일어난다. 아이는 거울 속의 이미지를 통해 자신이 하나의 통일체라는 것을 인식하고 나르시시즘적인 만족에 빠진다. 그러나 거울 속의 자기동일성은 주체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영상을 매개로 하기 때문에 상상적인 것이며 그 속에서 진정한 자아는 소외되어 있다. 진정한 자기동일성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생겨난다.

 

상징계(the symbolic)는 언어 활동을 통해 타인과의 소통이 가능해지는 시기이다. 정상인은 언어사용을 통해 타인을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또 타인에 의해 인정받음으로써 자신을 정립한다. 즉, 자기 자신 속에 타자의 위치를 마련해야 하며 이 타자가 바로 구조이고 또한 나의 다른 모습이기도 한 것이다. 언어적 질서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사회 구조 안에 자신의 위치를 등록하는 것이다. 사회적 자아는 상상계적 자아를 끊임없이 억압함으로써 견고하게 된다.

 

라깡은 상징계로 진입한 인간의 내부에서도 이 세 질서간의 갈등은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을 폭로한다. 실재계는 인간이 정면으로 마주할 수 없으며 돌아갈 수도 없는 불가능의 세계이다. 상상계는 인간의 자아의식이 허구와 기만에 기초해 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상징계는 실재계와 상상계를 억압함으로써 인간의 욕망이 결코 충족될 수 없음을 보여 준다.

 

불가능, 기만, 부재(不在)는 각각 실재계, 상상계, 상징계가 가진 본질적 특성들이다. 이 음울한 단어들은 자신의 의지대로 사고하고 행동하며 욕망을 충족시키는 하나의 통합된 주체가 있지 않다는 것을 시적으로 그려 준다. 라깡이 비록 프로이트와 달리 무의식의 구조를 탐구하고 그것을 언어적 규칙에 의해 해명하고자 하였지만 무의식은 우리가 상징계로 들어오면서 멀어진 실재계와 관계하기 때문에 그것의 의미는 근원적으로 불가해한 것이다.

 

그것은 루소가 잘 보여준 것처럼 인간의 삶이 자연에서 문화로 이행하면서 상실한 것들과 관계된다. 프로이트는 문명은 억압의 역사라 하지 않았던가. 라깡은 이들과 더불어 사회적 삶이 상실과 결핍에 의해 수행된다는 것을 역설한다. 라깡에서 이미 후기구조주의가 보여 주는 인간과 진리에 대한 회의주의의 일면이 드러난다고 할 수 있겠다.

 

자끄 라깡의 정신분석학

 

오늘날의 문화에서 중요한 것은 더 이상 의미나 욕망이 아니라 신체의 적나라함과 도착적인 쾌락인 듯하다. 라깡을 비롯한 후기구조주의적 이론이 한계를 가진다는 주장 역시 이런 문화적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다. 무의식과 욕망마저 언어로 구성되어 있다는 라깡 이론의 '구조주의적' 한계는 신체와 쾌락의 영역을 분석하기에는 너무나 결정론적이고 비역사적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그러나 현대문화를 읽어내는 도구로서의 정신분석학이 포기할 수 없는 매력을 가진 것도 사실인데, 이러한 딜레마에 직면한 몇몇 이론가들은 라깡 대신 프로이트로―혹은 페미니즘의 맥락에서는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나 멜라니 클라인(Melanie Klein)으로― 돌아가려는 태도를 보인다. 더 정확히 말하면 라깡적으로 해석되지 않은 프로이트를 재발견하자는 것이다. 이 경우 중요한 것은 언어에 의해 세계를 해석하는 구조주의적 미련을 버리고, 즉 상징계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입장을 버리고 신체와 쾌락이라는 '생생한' 문제로, 또한 구조주의의 경직된 공시성 대신 유동적이고 역사적인 세계관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그러나 라깡이 프로이트를 다시 읽었듯이 라깡을 다시 읽어서 그의 다른 면을 강조하는 이론가들은 이것이 오류라고 말한다. 대표적인 이론가가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과 조안 콥젝(Joan Copjec)이다. 이들은 라깡 이론의 한계가 언어의 우월성에 대한 그의 강조에 있다는 비판자들의 주장을 반박한다. 이들은 비판자들이 라깡 이론의 상징계적 측면만을 문제시 삼는다고 말하면서 실재계로 관심의 초점을 돌린 라깡의 후기 이론을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라깡의 독자성은 상징계보다는 바로 이 실재계 개념에 있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쟝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나 미셀 푸코(Michel Foucault) 등 상대주의적 입장을 가진 이론가들과는 달리 라깡은 사회적 관계로 환원될 수 없는 그 어떤 '저편'의 존재, 즉 실재계를 강조한다. 이곳은 사회와 언어의 세계가 더 이상 갈 수 없는 한계 지점이다. 언어가 존재를 화석화시킨다고 라깡은 주장하고 있는데, 라깡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실재계는 언어의 그물망에 걸러지지 않은 존재의 공간, 살아있는 신체의 공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살아있는 공간은 결코 있는 그대로 경험될 수 없다. 왜냐하면 실재계는 상징계의 한계지점에서만 경험되기 때문이다. 실재계는 항상 부정적인 형태로만 경험되는 우리 존재의 '핵'이다.8)

 

그러나 콥젝이나 지젝에 의하면, 라깡이 후기 이론에서 실재계를 강조한 것은 결코 초기이론의 관점을 포기한 것이 아니다. 다만 위상학적 위치변경이 이루어진 것뿐이라는 것이다. 이들에 따르면, 실재계를 강조하는 것은 상징계의 우월성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실재계는 상징계에 의해서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상징계의 우월성은 여전히 존재한다.

 

다만 상징계를 강조할 때 라깡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 기표가 세계를 구조화하는 근거라는 것이었다면, 그래서 인간중심적 세계관을 깨뜨리고 싶었다면, 실재계를 강조할 때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기표의 세계가 결정론적으로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불안하고 유동적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상징계는 항상 실재계에 의해 침범되며 기표는 그 사이에 난 틈에 의해서 단절되기 때문이다. 실재계는 말하자면 언어 사이에 드러나는 침묵이다.

 

이 침묵은 언어로 인해 생겨났지만 언어의 단일성을 위협하는 공백인 것이다. 상징계의 불안정성과 유동성을 강조함으로써 이들은 라깡의 비판자들이 보내는 의혹, 즉 라깡 시각이 역사적 시각을 결여하고 있다거나 결정론적이라는 의혹을 반박한다.9)

라깡의 세 단계

 

자끄 라깡은 프랑스의 대표적인 구조주의적 정신분석학자이다. 코기토(Cogito)의 철학원리를 부정하는 라깡의 인식이론은 사유하는 나와 존재하는 나의 균열, 의식과 무의식의 균열을 일으키는 자아의 틈새에서부터 시작된다. 그의 대작인「에크리 Ecrits」에 소개된 '거울 단계'는 자아의 틈새가 생겨나는 최초의 국면으로, 주체에게 남을 배제하는 나르시시즘적 정체성(상상계)을 정립케 한다. 그것은 또한 거울 속 이미지가 자기 자신의 반영에 불과함을 깨닫게 될 때 자기 소외의 첫 단계의 계기로도 설명된다.11)

 

자끄 라깡은 구조주의에 의해 발전된 방법론으로 프로이드를 재해석하였다. 그는 프로이드의 발달 구조를 후기구조주의 심리분석으로 만들기 위해 구조주의에 대한 비판적 읽기를 재천명하였다. 라깡에 의하면 우리는 '결핍'의 상태에서 태어나며, 따라서 이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나머지 인생을 소비한다. 결핍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그리고 다른 형태로 경험되지만, 이는 결코 결핍의 본질적 상태는 나타낼 수 없는 경험이다.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수록 이 상태를 극복하고자 하는 욕구에 밀리게 되고, 뒤돌아보면 볼수록 결핍으로 떨어지기 이전의 어머니와의 결합이 완전함의 순간이었음을 믿게 된다. 그 결과는 상상적인 완전함의 순간을 찾기 위한 끝없는 추구이다. 라깡은 이를 오브제 쁘띠 아(l'objet petit a)에 대한 추구, 즉 부재하는 대상에 대한 끝없는 추구라고 명명하였는데, 이는 시간 속의 상상적 순간을 의미한다. 즉 대체를 위하여 일련의 대체된 것들로 스스로를 위로할 뿐이다.

 

라깡에 의하면 발달은 세 가지 단계를 거친다. 첫단계는 '거울단계'이며, 두 번째는 '실당기기(독.fort-da)' 게임이고, 세 번째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이다. 완전함의 신화적 순간에는 주관과 객관 사이에 뚜렷한 구별이 없다. 어머니와의 결합은 완벽하며 결핍이 없다. 그러나 이는 곧 '분리(fragmentation)'를 겪는 시기로 이어지며, 이때에는 자궁내의 지속적인 만족 대신 젖가슴의 간헐적 만족에 의존하게 된다. 이 분리의 경험에 도전하며 자신의 욕구(needs)를 통제하는 자아에 대한 인식이 라깡이 말하는 '거울 단계'에서 일어난다. 실제의 거울이건 상상의 거울이건 거울을 보며 우리는 자아에 대한 인식을 만들기 시작한다. 거울단계는 우리가 스스로를 거울에서 처음 알아보는 순간이다. 이 인식, 더 정확히 말하면 잘못된 인식―왜냐하면 자아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자아의 이미지에 대한 인식이므로―을 바탕으로 우리는 스스로를 독립된 개체로 보기 시작하며, 결국 실제적인 육체적 발달보다 더욱 통일된 완전한 모습으로 자신을 보게 되는 것이다. 거울단계는 라깡이 상상적이라고 부르는 주체성의 질서로 진입하는 순간을 알려준다.

 

다시 말해서 생후 6개월에서 18개월까지의 유아들이 체험하는 거울 단계는 유아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영상, 즉 자신의 복사판을 통해 자기동일화의 경험을 겪는 과정이다. 이전에 자신을 형태 없는 애매모호한 덩어리로 느꼈던 단계에서 벗어나 자신을 명확하고 통일된 개인- '나'와 '너'의 개체화된 사용으로 상징될 수 있는- 으로 간주하게 된 유아는 마침내 거울 속 영상에 의해 스스로를 독립된 객체라고 인식하게 된다. 하지만 이 단계에서 유아의 자아는 실제로는 단지 거울 속 영상에 불과하고 자기가 아닌 타인임을 깨달을 때, 이 체험 안에서 최초의 자기소외가 생겨나게 된다. 정체성(identity)은 본래 동일화와 결부되어 있는 것이다.

 

거울 단계에서 유아의 정체성은 이미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정립되는 동일화 과정을 운명적으로 예정하고 있으며, 상상계(the Imaginary)는 바로 이러한 자기소외의 상황―육체적으로 거리가 먼 거울 속 자아에 가까이 다가가려고 하는 불가능한 노력―안에 뿌리를 내린다. 라깡의 말로 표현하자면, 이 상상계는 역사적 상황과 미처 관계가 설정되지 못한 단계이므로 시간과도 무관한 환상의 영역이다. 어린아이가 역사를 인식하는 것은, 아이 자신의 역사이든 아이와 전혀 무관한 다른 사람들의 역사이든 상관없이 언어의 충분한 습득과 더불어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어린아이는 자기 자신과 언어를 연결시키는 과정을 통하여 그 때까지 참여하지 못했던 관계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게 되기 때문이다. 언어는 이런 어린아이에게 아이의 존재 이전에 선재(先在)하던 역사의 하부구조(frame work)를 전해준다. 상징(symbol)이라 불리우는 이러한 종류의 기호로 구성된 구어(langue parlee:口語)와 문어(langue ecrite:文語)의 의미에 따라 라깡은 이 발전단계를 상징계(the symbolic)라 명명하였고 이를 상상계와는 대비되는 것으로 규정했다.

 

라깡에게 상상적인 것이란 정확히 말하면 스스로를 확인하는 이미지의 영역이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행위 자체가 자신을 잘못 인식하고 잘못 알도록 만든다. 어린아이는 자라면서 대상에 대한 상상적 인식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며 이를 통해 자아가 성장한다. 라깡에게 자아란 것은 단지, 이 세상에서 우리가 동일시할 수 있는 어떤 것을 찾아 한 개인의 허구적 인식을 고양시키는 나르시스적 과정일 뿐이다. 새로운 이미지를 통해서 우리는 결핍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려고 노력하며 자신이 아닌 것에서 자신을 발견하려고 노력한다.

 

발달의 두 번째 단계는 '실당기기' 게임으로, 이는 프로이드가 자신의 손자가 실타래를 멀리 던졌다가(gone) 거기에 붙은 실로 다시 끌어당기는(here)것을 보고 붙인 이름이다. 프로이드는 이것을 아이가 엄마의 부재를 이해하는 방법으로 보았으며, 이때 실타래는 어머니를 상징하고 아이는 이를 지배하고 있다. 라깡은 이를 다시 재해석하여 어린아이가 언어와 접하는 것을 나타낸다고 보았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소위 라깡이 말하는 '상징'의 세계로 들어간다.

이것은 문화의 체계이며,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의 주관성을 획득한다. 언어는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을 도와주지만 동시에 결핍의 경험을 더 강화시킨다. 요구는 언어를 통해 분명해질 수 있지만 이를 통해 결핍의 경험이 나아질 수는 없으며, 다만 더 강해질 뿐이다. 언어 그리고 상징 속으로 들어가면서 최초의 완전함의 순간에 대한 본능적인 욕구와 언어를 통한 기대와 좌절, 이 둘 사이에 틈이 생기는 것을 볼 수 있으며 이 틈 속에서 욕망이 생겨난다. 언어 안에서 그리고 언어를 통해서만 주체는 주체가 된다. 즉 언어 속의, 언어의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언어에 대한 주체가 되는 것이다.

 

즉 나는 언어 안에서 그리고 언어를 통해서만 '내'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 때도 대가를 치러야 한다. 라깡은 발화주체와 말해진 주체를 구별한다. '내'가 말할 때 나는 항상 내가 말하고 있는 '나'와 다르며, 언제나 변하고 좌절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어디선가 주체가 의미로서 나타나면, 이 주체는 다른 곳에서는 '사라지는 것'으로 희미해진다." 따라서 주체성은 언어의 이러한 과정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러나 이처럼 주체는 언어의 형식과 그 명시화(articulation)안에서 생산되고 재생산될 뿐, '이성적' 설명을 통해 추측하는 것처럼 본질적으로 미리 주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 이전에 존재하는 어떤 것의 상징적 체계, 바로 이것이 우리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이미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이는 바로 우리의 주체성을 만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존재 인식 밖에 있으며, 우리에게 속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에게도 속한다. 나는 내가 당신에게 말할 때 '나'이고 당신이 내게 말할 때는 '당신'이다. 이것으로 보아 우리가 유일한 개인으로 존재한다는 인식은 상당 정도 깨지기 쉬운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본질적인 자아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우리가 의지하며 살아가는 허구일 뿐이다. 우리가 말하는 언어가 주체성을 구성할 뿐 아니라, 우리는 또 그 언어의 구조적 과정의 대상이다.

 

그러나 이 뿐 아니라 라깡은 우리의 무의식조차 언어와의 만남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주장한다. 다른 말로 하면 자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나 타자에 대한 인식도 우리가 말하는 언어와 매일의 생활 속에서 부딪치는 문화적 레퍼토리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을 주체로 생각하게 만드는 것은 언어이며, 결국 언어 없이는 자아에 대한 인식은 미끄러지며 깨지기 쉽고 조각나기 쉽게된다. 세 번째 발달의 단계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이는 성적 차이를 깨닫는 것이다. 고전적 구조주의의 방식으로 라깡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언어의 관점에서 재해석하였다.

 

무의식은 언어와 마찬가지로 구성된다, 라깡이 구조주의를 뛰어넘는 점은 욕망에 대한 설명에 있어서이다. 상상에서 상징으로 옮겨가는 오이디푸스적 행동은 어린이가 한 기표에서 다른 기표로 넘어가게 만든다. 욕망 자체는 고정된 기의(즉 '다른 것', '진짜')를 찾는 과정이나 추구이지만, 이 기의는 영원히 다른 기표로 변화하고, 이것은 '기표 아래에서 순간적으로 미끄러지는 기의'라고 할 수 있다. 욕망은 자아와 타자사이의 틈을 메울 수 없는 불가능성이며, 우리에게 결핍된 것을 보완하려는 것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주는 교훈은 어린아이는 이제 '실체'―특히 어머니의 금지된 몸―에의 접근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어린아이는 이 '충만한' 상상적 소유에서 추방되어 언어의 '공허한' 세계로 내쫓겼다. 거울의 '은유적' 세계는 언어의 '환유적' 세계로 바뀌었다... 한 기표로부터 다른 기표로의 끊임없는 잠재적 운동을 라깡은 욕망이라 불렀다. 모든 욕망은 결핍으로부터 발생되어 계속하여 채우려고 노력한다. 언어의 세계에 발을 내딛는다는 것은 '실재(the real)', 즉 항상 의미작용이 닿지 않는 곳에 있으며, 상징적 체계 밖에 존재하는 가까이 갈 수 없는 영역으로부터의 단절을 뜻한다. 특히 우리는 어머니의 몸으로부터 단절되며, 오이디푸스의 위기 후에는 이를 찾아 평생 헤매더라도 결코 이 소중한 것을 되찾지는 못한다...

 

우리는 그 대신 대체물들로 꾸려나가야 하며, 이들을 통해 우리 존재의 가장 중심에 놓인 틈을 메우기 위해 헛되이 노력한다. 우리는 상상 속에서 알았던 순수한 자아와 자족상태를 결코 찾지 못하며 대체물들 사이로, 은유에서 은유로 끊임없이 헤맨다. 라깡의 이론에서는 이 근원적 상실대상, 즉 어머니의 몸이 우리 인생의 이야기를 끌어나가고, 끝없는 환유 속에서 욕망의 실낙원을 대신할 대체물들을 찾도록 강요하며 우리 인생의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것이다. 2. 욕망과 충동 프랑스 이론가들이 흔히 그렇듯이 라깡은 미술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고, 자신의 세미나에 종종 미술작품을 예로 등장시켰다. 특히 그의 세미나 XI권은 시각경험과 미술에 대해 한 장을 할애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시선(l'oeil)'과 '응시(le regard)'의 변증법이라는 시각경험론을 펼친다. 그리고 이 이론은 미술이론과 곧바로 연결된다. 분량이 많지 않기는 하지만 라깡은 욕망의 관점에서 미술사를 다시 쓰기도 하고, 세잔느의 정물화에 대해 논하기도 한다.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도판5>을 예로 들어 미술에서 작용하는 시선의 기능에 대해 논한 것은 이미 유명하다. 이런 점을 참고하지 않더라도 라깡의 이론은 80년대부터 실제 미술비평가와 미술이론가에 의해 미술계에 활발히 도입되었다.

 

[옥토버(October)]지를 중심으로 하는 포스트모더니즘 미술비평가들은 라깡을 주로 사진을 중심으로 하는 시각매체의 분석에 이용하였다. [옥토버]의 이론가들은 주로 포스트모더니즘을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차용, 복제, 혼성모방이라는 기법을 통해 현대 미디어문화를 비판하는 작가들을 분석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라깡을 비롯한 후기구조주의 이론가들을 도입했다, 사진이라는 매체가 후기구조주의 이론가중에서도 특히 라깡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즐겨 논해졌던 것은 라깡의 욕망이론이 이미지와 시각경험을 중요한 매개체로 다룬다는 점과도 관련이 있다.

 

물론 사진의 복제성과 혼성적 성격이 포스트모던 문화의 상징처럼 여겨졌으며 라깡의 주체이론이 가진 반데카르트적 측면이 포스트모던적으로 해석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바이다. 라깡의 충동 개념은 프로이트의 개념을 직접적으로 계승한 것 중의 하나이다. 프로이트는 충동이란 유기체를 그 목적으로 향하게 만드는 압력, 즉 에너지의 충전 속에 본질이 있는 역동적 과정으로 정의내린다. 충동의 목적은 근원에서 획득하는 긴장의 상태를 제거하는 것이다. 이때 긴장의 방출은 심적 장치에 만족을 주고 만족은 쾌락을 낳는다. 라깡은 심적 장치의 긴장 해소라는 프로이트의 경제적 관점 대신 기표와 신체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충동을 재해석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무의식의 차원에서는 심적 장치의 긴장을 최소화하여 만족을 얻으려는 쾌락원칙(Lustprinzipe/principe de plasir)이 인간을 지배한다. 반면 무의식을 언어의 영역과 동일시하는 라깡은 쾌락원칙을 곧 현실의 원칙으로 본다. 라깡에게서 쾌락원칙의 기능은 "심적 장치의 모든 기능을 조절하는 긴장을 최저수준으로 유지하는 데 필요한 양의 기표를 투입하는 가운데 주체를 기표에서 기표로 이동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긴장을 절대적으로 감소시킨다는 것은 곧 유기체의 죽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쾌락원칙은 어느 한계를 넘어가면 더 이상 쾌락원칙이 아니게 된다. 이 경계선은 오히려 쾌락원칙의 장애물이다. 경계선 너머는 "쾌락원칙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이 머무는 곳이다. 이곳은 곧 실재계이다. 실재계의 쾌락은 상징계 내에서는 단지 고통으로만 경험된다. 결국 극도의 쾌락을 원하는 것은 곧 고통을 원하는 것이라는 역설적인 결과가 나온다.

 

라깡은 단지 고통으로만 경험되는 이 모순된 쾌락을 "희열(jouissance)"이라고 이름 붙였다. 희열은 쾌락원칙 가운데 있는 견뎌내기가 불가능한, 또는 상징계 내에서 상상하기가 불가능한 영역에 존재하는 쾌락이다. 이 영역은 결국 죽음의 영역이다. 충동은 이 영역으로 들어가지 않기 위해서 항상 부분적으로 작동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라깡은 "모든 충동은 부분적 충동이다."라고 말한다.

 

라깡은 욕망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진실은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우리 자신이 모른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욕망의 공간 속에서 타자와의 진실한 의사소통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대타자를 향해 말하는 주체의 언어는 항상 목표를 빗나간다. 대타자는 자아가 존재하는 상상계의 벽 너머에 있고, 이 벽은 '언어의 벽'이라고 불리운다. 언어는 욕망을 왜곡시키고 인간은 자신이 무의식의 수준에서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하므로 투명한 의사소통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욕망의 공간은 어긋난 의사소통이라 할지라도 끊임없이 타자를 향한 요구, 라깡의 표현대로라면 사랑의 요구가 존재하는 공간이다. 항상 소외될 수밖에 없을지라도 자신의 상상계적 타자를 향한 나르시시즘적 사랑은 사회적 함의를 갖고 있다. 그러나 충동의 공간 속에서 인간은 더 이상 타자와의 변증법적이고 상호적인 관계 속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쾌락의 무조건적인 요구는 대타자의 희열을 위해 자신을 대상으로 환원시킬 것을 요구한다. 그 속에서 타자와의 상호관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다만 숭고한 '사물(la Chose)'과의 비상호적인 관계이다. 충동의 공간 속에서 인간은 자신을 공동체로부터 떼어놓는 희열을 물신화시킨다. 충동을 선택하는 사람들은 전적으로 사적인 공간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 침해를 받는 것은 사적인 공간이 아니라 오히려 공적인 공간이다.

 

라깡의 말로 번역하면 충동을 선택함으로써 우리는 더 이상 대타자로부터의 위안을 구할 수 없게 된다. 3. 라깡의 언어관 서구문명이 '말 중심주의(Logocentrism)'이었던 만큼, 언어를 통한 후기구조주의자들의 이의제기는 포스트모더니즘에 있어서 중심주제이기도 하다. 언어의 문제는 구조주의 언어학자 소쉬르(Saussure)로부터 연유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 뒤 쟈끄 데리다(J.Derrida)와 자끄 라깡(J.Lacan)과 더불어 심화된다. 소쉬르가 '기표'(상징·이미지)와 '기의'(의미·내용)의 관례가 임의적이라는 점과 기표는 다른 기표와의 차이에 의해 의미를 갖는다고 했을 때, 데리다는 소쉬르의 이러한 주장이 여전히 기의에 우선권을 준다고 생각하여, 기표가 기의의 재현이 아니라 기표의 차이의 연속일 뿐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것을 자신의 신조어 '차연(differance; 디페랑스의 랑이 'e'가 아니고 a, 이 a의 의미가 이분법에 지배받지 않는 비결정성의 속성이라고 함) 개념으로 설명한다. 그런데, 라깡은 언어의 이러한 불확정성을 '차이' 대신에 '억압'으로 설명한다. 즉 한 기표는 다른 것으로 대치되는 과정에서, 동시에 그 기표를 억압하게 되는데, 억압된 기표는 무의식적으로 침잠되면서 무수한 '소외'를 겪는다. 이러한 언어과정을 통해 인간은 자신의 고정된 주체성을 포착할 수가 없다.

 

주체의 정체성은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규정되는 하나의 재현일 뿐 실체가 아닌 것이다. 이것이 인간이 가지는 원천적인 소외감 혹은 상실감이라고 한다. '소외'를 골자로 하는 라깡의 주체성 이론은 프로이드의 성 심리이론을 언어적 영역으로 도출해냄으로써 심리를 언어적, 사회적 지평으로 확대시킨 것이다. 즉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신체적 성기(Penis)대신 상징적 남근(Phallus)으로 대치되는 주체성의 개념화, 혹은 언어화과정이며 언어의 세계인 '상징계'로 진입할 때 본능과 욕망이 억압되어 자아를 주체로부터 소외시키는 무의식이 형성되고, 이로부터 정신분석학적 '분리자아'를 경험한다고 한다.

출처 : 세상과 세상 사이
글쓴이 : 장자의 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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