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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젝의 라캉 읽기―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을 중심으로

by 丹野 2013. 1. 23.

 

 

 

지젝의 라캉 읽기―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을 중심으로


“존재적 차원에서는 아주 허약한 것이라고 내가 여러분에게 설명한 바 있는 무의식의 지위는 윤리적이다”


홍준기



라캉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혹은 병행해서 반드시 읽어야 할 라캉주의 이론가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아마도 (적어도 국내에 소개된 학자 중에서는) 슬라보이 지젝을 가장 먼저 떠올릴 것이다. 지젝은 라캉 이론에 대한 체계적인 설명을 제공해줄 뿐만 아니라, 영화, 대중문화에 대한 해박하고 흥미로운 해석으로 독자를 사로잡기 때문에, 일단 지젝의 글을 읽기 시작하면 지젝의 관점에 따라 영화, 대중문화, 철학사, 사회를 해석하는 ‘재미’에 흠뻑 빠지게 된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고 난 후에야 비로소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라캉-지젝주의자’가 되었다는 ‘유쾌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하지만 ‘라캉-지젝주의자’가 되는 길도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은 것 같다. 지젝이 언급하는 수많은 영화, 대중소설, 정신분석학 이론, 철학 사상에 매료되어 그의 책을 손에 잡지만 라캉을 이해하기 위한 ‘전 단계’로서의 지젝을 공부하기 위해서도 ‘사전에’ 이미 알고 있어야 할 지식의 양이 많아야 한다는 사실 앞에서 좌절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젝의 글은 우리의 호기심과 지적 욕망를 항상 다시 자극해, 비록 ‘화는 나지만’ 다시 한번 그의 책을 잡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글의 제목에 언급한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은 지젝이 영어로 출간한 최초의 책이다. 그 이전에 그는 "가장 숭고한 히스테리 환자―헤겔이 통과하다"라는 저서와 "감히 히치콕에게 질문하지는 못했지만 라캉에 관해 당신이 항상 알고 싶었던 모든 것"이라는 편저서를 프랑스어로 발표했으나, 그 이후 지젝은 자신의 모든 저서와 편저서를 영어로 출간함으로써 세계적으로 보다 넓은 독자층을 확보할 수 있었다.

지젝은 구 사회주의 지역이었던 슬로베니아의 철학자이며 정신분석학자이다. 그는 구 사회주의 국가 출신의 학자답게 처음에는 알튀세르 등 진보적인 맑스주의 이론가들에 관심을 가졌으나, 연구분야를 라캉 정신분석학으로 옮겨갔다. 초기 저서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에서 잘 드러나듯이 지젝의 출발점은 ‘전체주의 비판’이었으며, 그의 귀착점도 그러할 것이다. ‘전체주의 비판’이라는 테마는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이후의 저작들에서도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지젝의 이론을 한마디로 요약하라고 할 때, ‘보수적 이데올로기 비판’이라고 말한다해도 큰 잘못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잘 알려져 있듯이 그의 관심은 좁은 의미의 정치 혹은 사회철학에 국한되지 않는다. 지젝은 자신의 연구 영역을 철학, 영화, 대중문화에 대한 보다 광범위한 분야로 확대했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독특한 라캉론을 전개했다.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이라는 책으로 국내에도 잘 알려져 있는 라클라우가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의 서문을 써 주었는데, 그는 이 서문에서 지젝이 창설한 ‘슬로베니아 라캉 학파’의 라캉 해석은 “철학적”이고 “정치적” 특징을 갖는다고 평가한다. 지젝의 라캉 해석에서는 임상적 차원은 완전히 빠져 있으며, 이점에서 슬로베니아의 라캉 해석은 프랑스와 남유럽, 앵글로-색슨 국가, 그리고 독일어권 지역의 라캉 해석론과 확연히 구분된다는 것이다. 즉 프랑스와 남유럽 지역에서 라캉은 정신분석 임상가로, 독일에서는 해석학자로, 그리고 영미권에서는 문학이론가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나 지젝은 라캉을 ‘철학자’ 혹은 ‘사회철학자’로 수용하고 있다고 라클라우는 말한다.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이 출간된 지 벌써 십여 년이 지난 지금, 라클라우의 이러한 도식적 구분은 마땅히 타당성을 상실했다고 하겠지만―적어도 프랑스 내부에 몇몇 선구적인 작업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지젝이 라캉을 “철학적”, “정치적” 차원에서 ‘독창적으로’ 재해석한 학문적 업적을 이루어냈다는 라클라우의 지적은 여전히 타당하다고 하겠다.

필자가 지젝의 여러 저서 중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을 논의의 주제로 삼은 것은 이 책이 향후 전개될 지젝의 작업에 대한 일종의 청사진과도 같은 책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서론에서 지젝은 이 책의 목표를 세 가지로 정리한다.

① ‘후기구조주의’라는 라캉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를 정정하면서 라캉 정신분석학의 기본개념을 소개하고, 더 나아가 비합리주의자로 오인된 왜곡된 라캉의 이미지에 반대해 계몽주의적 전통 속에 라캉을 자리 매긴다.

② 라캉 정신분석학의 기초 위에서 헤겔 변증법을 새로 읽는다. ‘관념론적 일원론’이라는 헤겔 해석은 전적으로 오해이며, 헤겔이 말하는 ‘절대적 지식’이란 상실, 혹은 결핍의 승인을 의미할 뿐이라는 것을 밝힌다.

③ 상품 물신성과 같은 잘 알려진 고전적 모티프에 대한 새로운 독해, 그리고 일견 이데올로기론과 아무 상관없어 보이는 ‘고정점’(point de capiton), ‘숭고한 대상’, ‘잉여향유’ 같은 라캉의 개념에 대한 새로운 독해를 통해 이데올로기론의 정립에 기여한다.


I. 라캉과 (독일)관념론 전통

지젝의 라캉 독해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라캉을 데카르트, 칸트, 헤겔로 이어지는 관념론과 계몽주의의 전통 속에서 다시 읽는다는 것이다. 지젝을 영화, 대중문화 등에 대한 ‘재미있는’ 분석을 제공하는 이야기꾼으로 생각하는 것도 꼭 틀린 것은 아니지만, 사실 지젝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더 잘 ‘향유’하기 위해서는 ‘재미없는’ 철학에 약간은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사실 이 점은 독자보다는 어떤 의미에서는 지젝 자신에게 더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겠는데, 라캉과 철학을 연결한 재미없는 바로 그 업적 때문에 지젝은 단순히 ‘문화평론가’가 아닌 사상가의 대열에 낄 수 있는 자격을 얻었던 것이다.

지젝은 특히 라캉적 관점에서 헤겔을 해석한 것이 자신의 가장 중요한 학문적 업적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그에게서 헤겔의 위치는 매우 중요하다. 지젝의 독특한 헤겔 해석은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에서 뿐만 아니라, 그 이전의 저서인 "가장 숭고한 히스테리 환자―헤겔이 통과하다"에 이미 모습을 드러냈으며, 특히 ‘칸트, 헤겔 그리고 이데올로기 비판’이라는 부재가 붙은 "부정성과 함께 머무르기" 등에서 다시 논의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헤겔은 일반적으로 ‘관념론적 일원론’, ‘닫힌 체계’, ‘절대적 지식’ 등을 주장한 대표적인 형이상학 철학자로 간주된다. 지젝은 라캉 정신분석학 이론의 기반 위에서 이러한 왜곡된 헤겔 해석을 비판하고 헤겔 철학의 ‘본래의 모습’을 복원하려고 노력한다. 여기에서 라캉과 헤겔을 연결하는 지젝의 광범위한 작업을 모두 설명하기란 불가능하므로 라캉과 헤겔을 연결하는 지젝의 몇 가지 기본적인 관점에 대해 언급하는 것으로 그칠 수밖에 없다.

지젝의 헤겔 해석은 한마디로, ‘헤겔의 절대적 지식이란 절대적 지식의 불가능성에 대한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잘 알려져 있듯이, 헤겔은 절대적 지식은 반드시 모순적으로만 표현될 수 있다고 보았다. 예컨대 헤겔은 "논리학"의 「존재론」에서 “존재는 무이다”, 그리고 「본질론」에서는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은 서로를 배제하면서 동시에 포함한다”라는 식으로 모순의 우위성을 주장했다. 아무리 형식적으로 모순 없는 명제라고 할지라도 그 ‘배후’에는 반드시 모순적인 명제가 (은폐되어) 놓여 있음을 입증한 것이다. 전체로서의 진리, 절대적 지식은 이런 의미에서 반드시 모순을 포함한 지식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모순을 포함한 지식은 ’무의미한‘ 지식일 뿐이다. 이렇듯 절대적 지식이 반드시 모순적으로밖에 표현될 수 없는 무의미한 지식이라면, 이는 절대적 지식이란 결국은 ‘모순 투성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절대적 지식이란 궁극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라캉에 따르면 주체는 필연적으로 상징계에 의한 소외를 겪는다. 내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상징계와 기표는 나를 이러 저러한 사람으로 미리 규정한다. 그리하여 주체는 대타자의 명령에 종속된 상상적 주체―소외된 주체―로 살아가게 된다. 이러한 상상적인 주체가 이제 진정한 주체로 다시 태어나기를 원한다면 분석―자기분석 혹은 정신분석가를 통한 분석―을 통해 상징계에 의한 소외를 극복하는 과정―라캉은 이를 분리라고 부른다―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라캉은 이러한 분리과정을 ‘두개의 결핍이 만나는 것’으로 설명한다. 나를 어떤 특정한 기표에 종속하게 만든 대타자도 나만큼이나 결핍된 존재임을 깨닫는 순간 분리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지젝은 "가장 숭고한 히스테리 환자―헤겔이 통과하다"에서 이렇게 말한다. “만일 주체가 타자에게서 결핍을 만나게 되면, 이에 대한 주체의 대답은 주체 자신의 결핍이다. 이러한 사실은 고대 이집트인의 비밀은 (당시 살고 있던―필자) 이집트인에게도 비밀이었다는 유명한 헤겔의 격언 격언에 정확히 상응한다.”

상징계에 의해 소외된 주체는 자신의 삶을 결정지은 대타자가 ‘정답’을 갖고 있다고 믿고 끊임없이 대타자에게서 그것을 찾으려 할 것이 아니라, 대타자도 주체가 찾는 “숨겨진 보물”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경험을 함으로써만 소외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라캉에 따르면 헤겔은 끊임없이 ‘정답’을 찾는다는 점에서 히스테리 환자이지만, 그 정답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새로운 것을 찾았고, 궁극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무의미한’ 절대적 진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점에서 헤겔은 히스테리의 한계를 넘어선 사람, 가장 숭고한 히스테리 환자이다. 정신분석학이 모든 사람은 ‘궁극적으로’ 히스테리 환자라고 본다는 점을 고려하면 헤겔은 지젝의 표현대로 ‘통과’(passe)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정신분석가’, 혹은 소외를 극복한 숭고한 히스테리 환자, 거듭난 주체이다.

II. 라캉은 후기구조주의자인가?

지젝은 라캉은 후기구조주의자가 아니라고 본다. 후기구조주의란 무엇인가? 지젝에 따르면 그것은 “어떤 텍스트는 항상 그 (텍스트) 자신의 논평에 의해 ‘틀이 잡혀져 있다’(framed)라고 주장한다.” “어떤 문학 텍스트에 대한 해석은 그 텍스트의 ‘대상’과 같은 차원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해석적 요소, 그리고 직접적인 의미로부터 거리 두기를 하지 않는 ‘순수한’ 문학적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후기구조주의에서는 대상으로서의 텍스트와 그것의 외적인 해석적 독해라는 고전적인 이분법은, 항상 이미 자신 스스로의 독해인, 무한한 문학 텍스트, 즉 자기자신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무한한 문학 텍스트의 연속성에 의해 대체된다.” 보다 알기 쉽게 말하면, 후기구조주의는 텍스트(자체)와 이 텍스트에 부가되는 외적 해석의 구분을 없애며, 따라서 텍스트의 의미는 텍스트의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 존재한다고 본다. 그런데 텍스트란 경계를 정할 수 없는 무한한 것이므로 의미는 항상 새롭게 생겨나고, 따라서 텍스트의 의미는 항상 스스로로부터 거리를 취하게 된다. 따라서 후기구조주의자들은 이론적 텍스트와 문학 텍스트 사이의 경계도 모호한 것이라고 본다. ‘진리’란 텍스트의 유희에 의해 생산되는 것이므로, 진리가 아니라 ‘진리효과’라고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진리가 아니라 진리효과만이 존재한다면, 진리를 담지하고 있다고 옛부터 믿어왔던 ‘순수한 이론’이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버마스는 “후기구조주의에서 우리는 일종의 보편화된 미학화를 본다. 여기에서 ‘진리 그 자체’는 결국 담론의 접합이라는 양식효과들(style effects)로 축소되어 버린다”라고 후기구조주의를 비판했던 것이다.

지젝이 라캉을 후기구조주의로부터 분리하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하버마스적 라캉 비판에 대해서는 물론, 후기구조주의의 대표적 이론가인 데리다의 라캉 해석에 대해 논박하는 것에 있다. 잘 알려져 있듯이 데리다는 “라캉의 고정점, 결핍의 기표로서의 팔루스 기표에 관한 이론”을, 무한한 텍스트 과정, 즉 텍스트의 “‘흩어짐’(dissemination)을 지배하고 제약하려는 시도로 본다.“ 라캉이 비록 결핍을 상징하는 기표라고는 하지만 팔루스적 기표를, 모든 다른 요소들에 중심을 제공하는 지배 기표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라캉은 ‘현존의 형이상학’, ‘로고스 중심주의’, 혹은 ‘팔루스 중심주의’의 전통에 속한다고 데리다는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데리다의 라캉 비판은 타당한가? 라캉도 후기구조주의자들처럼 절대적 기표, 절대적‧객관적 진리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라캉과 후기구조주의자를 구분하는 점은 무엇인가. 라캉은 절대적 기표에 도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는 데리다와 일치하지만, 반면 그 절대적인 기표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데리다와 차이가 있다. 따라서 라캉의 이론 내에는 절대적 지식 혹은 지배자를 체현하는 지배 기표가 ‘적어도 하나는’ 등장하게 된다. 바로 이 지배기표가 분열된, ‘비전체로서의’(not-all) 상징적 질서를 완전한, 상상적 통일체 혹은 일자로 구성하는 핵심 요소로 기능하는 것이다.

지젝에 따르면 바로 ‘불가능한’ 이 지배기표의 위치로부터 말함으로써 오히려 그 지배기표의 허구성을 드러내는 것에서 라캉 이론과 데리다의 이론은 구분된다. 지젝은 이 점에서 라캉이 브레히트와 유사하다고 말한다. 브레히트의 한 연극에서 배우가 무대 위로 올라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노동자를 착취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자본가이다. 이제 나는 내 노동자들에게 착취를 정당화시키는 부르조아 이데올로기의 진리에 대해 설득하고자 한다.” 이러한 일을 하는 자본가가 있을 수 있는가? 물론 없을 것이다. 지젝이 말하고 싶은 것은, 데리다는 이러한 ‘어리석은’, 불가능한 일을 라캉이 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지만 사실 이는 라캉 이론의 구조에 대한 오해에서 연유한다는 것이다. 지젝에 따르면 라캉이 예컨대 “나는 내가 말하고 싶은 바를 말하고 있다”고 말할 때, 의도와 결과의 일치라는 형이상적 주장을 믿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다. 라캉이 ‘객관적인’ 과정, 절대적 위치에 대해 말하는 것은 정말로 그러한 객관성과 절대성이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이러한 입장을 취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지젝은 수동적 입장에서 데리다의 비판으로부터 라캉을 옹호하고 있으나, 오히려 거꾸로 라캉의 입장에서 데리다의 문제점을 지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 데리다는 라캉의 이론을 형이상학, 로고스 중심주의, 또는 팔루스 중심주의라고 비판했는가? 데리다는 차이를 극단적으로 강조하므로 그의 이론 틀 내에서는 고정점에 대한 고찰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데리다의 입장은 극단적 초월주의(ultra-transzendentalism)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입장에 서면 고정점, 상상계의 필연성 등에 대한 주장이 불가능해진다. 따라서 데리다 눈에, 라캉이 ‘고정점’을 이야기할 때 전통적 형이상학으로 복귀하는 것으로 보였던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니다. 데리다가 철학사 전체를 너무 독단적으로 비판한 것도 그의 ‘극단적 초월주의’에 연유한다. 이러한 극단적인 사고는 고정점을 인정하지 않으므로 상대주의로 전락할 위험이 있고, 또 모든 것을 상대적으로 볼 수 있는 존재는 신밖에 없으므로 이는 다시금 ‘절대주의적 사고’와 통할 수 있다는 부담을 데리다의 이론은 가지고 있다.


III. 지젝의 이데올로기론: (사회)철학과 임상이론의 만남.

앞에서 언급한 바 있듯이 라클라우는 지젝의 라캉 해석에서는 임상적 측면이 “전적으로 부재”하다고 말한 바 있다. 실제로 지젝은 임상이론과 임상사례에 대해 특별히 따로 논의하지 않으므로 이러한 라클라우의 평가는 전적으로 옳다고 하겠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젝의 이데올로기론, 철학적‧정치적 라캉 해석에서 지젝의 해박한 정신분석학적 임상이론 지식이 중요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제 여기에서 생각해 볼 문제가 하나 생긴다. 굳이 정신분석학을 철학적, 그리고 사회철학적 차원에서 해석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임상이론만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정신분석학은 곧 임상이론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아마도 이러한 질문조차도 무의미할 것이다. ‘병든 사람’을 ‘치료’할 목적으로 정신분석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정신분석학에서 말하자면 ‘확실한’ 해답을 찾으려 한다. 그들은 신경증, 성도착증, 혹은 정신병의 원인은 무엇이고, 이를 치료하려면 무엇을 해야하는가 등등의 ‘직업적’ 문제와 직접 관련이 없으면 그것은 정신분석학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정신분석학을 ‘좁은 의미의’ 임상이론과 동일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지젝의 라캉론은 단지 ‘무익한’ 철학적 작업으로 비춰질 수도 있다. 하지만 특히 라캉 정신분석학 임상이론에서는 ‘정신병리현상에 대한 인간학적, 실존적 해석’이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지젝의 라캉론은 곧 ‘은폐된’ 임상이론이라고 말해도 무방하리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대상관계이론이나 자아심리학을 따른다면 달리 생각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적어도 라캉은 정신분석가가 되려면 철학, 문학, 예술, 논리학, 수학 등의 분야의 지식을 두루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점은 새겨둘 만하다.

왜 라캉은 쉬운 길을 놔두고 굳이 어려운 길을 택했는가? 잘 알려져 있듯이 라캉은 ‘미국적 정신분석학’―자아심리학―을 통렬히 비판했다. 여러 이유가 있었겠지만 라캉이 보기에 자아심리학자들 혹은 이에 영향받은 사람들은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을 이해하기 쉽게 만들었고, 그럼으로써 정신분석학을 ‘상식적인’―이데올로기적인―세계관에 통합시켰기 때문이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정신분석 치료란 무엇인가? 자아심리학적 견해에 의하면 치료란 환자의 자아를 강화하여 그를 사회에 보다 잘 적응시키는 것이다. 이들의 견해에 따르면 치료란 환자 혹은 환자의 보호자가 원하는 상태로 그(녀)를 회복시켜 사회에 신속히 적응하도록 돕는 것이다. 누구나 알고 있는 ‘쉬운’ 해답이다. 그리고 결코 틀린 대답도 아니다. 어느 누가 이 점을 무시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은 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프로이트는 치료를 사회로의 적응의 문제로만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만약 환자가 적응해야 한다고 기대되는 저 사회 자체가 문제 투성이라면? 그렇다면 환자가 사회에 적응해야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꾸로 사회가 환자에게 적응해야 한다. 사회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신경증의 치료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어떤 여자가 신경증에 걸렸다면, 그녀의 신경증은 경우에 따라서는 남편에 대한 복수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이 경우 아내의 치료를 위탁한 남편의 성격과 생활이 바뀌지 않는다면 아내의 신경증은 쉽게 고쳐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신경증이 치유된다 하더라도 그 여자는 회복 즉시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할 것이다. 이러한 단순한 예만 보더라도 우리는 정신분석학적 치료란 단순히 테크닉이나 기교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한마디로 표현하면, 정신분석치료는 주체와 타자의 관계에 대한 ‘총체적’ 재구성을 의미한다. 정신분석학은 실존적, 현실적 고통에 시달리는 분열된 주체가 타인과 세계에 대해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지 깊이 성찰할 것을 요구한다. 그 분열을 ‘꿰매기’ 위해 환상적 대상, 이데올로기적 숭고한 대상에 집착할 것인가? 아니면 “욕망을 포기하지 않는” 주체가 될 것인가?

라캉은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복잡한 측면’을 염두에 두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우리는 정신분석학적 개입을 정의 및 용기에 관한 근본적인 대화로까지, 즉 위대한 변증법적 전통 속으로 밀어 넣어야 하는가? 그것은 하나의 질문이다. 그것은 풀기 어려운 질문인데, 솔직히 말하자면 현대인은 그러한 커다란 주제에 접근하기에 너무 미숙해졌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행동, 적응, 집단 도덕의 관점에서 그리고 잡담으로써 일을 해결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여기에서…문제의 심각성이 생겨나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은 심리 치료를 위한 학문이라고 간단히 말한들 누가 시비를 걸겠는가? 그런데도 라캉은 정신분석학을 “정의와 용기에 관한 근본적인 대화”로 확대시켜야 한다고 ‘현학적으로’ 말한다. 여기에서 “정의와 용기에 관한 근본적인 대화”란 플라톤의 철학을 의미한다. 라캉은 정신분석학을 플라톤적 전통―위대한 변증법적 전통―속에서 고찰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알랭 바디우는 이를 라캉의 “플라톤적 몸짓”이라고 표현한다(물론 라캉이 언급하는 철학자가 플라톤밖에 없다는 말은 아니다. 라캉이 관심을 가졌던 철학자는 플라톤 이외에도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칸트, 헤겔, 맑스, 후설, 메를로-퐁티, 하이데거, 비트겐슈타인, 퍼스 등 수없이 많다.) 하지만 현대인은 그러한 커다란 주제에 접근하기에 너무 미숙해졌으므로, 그저 “행동, 적응, 집단 도덕”의 관점에서 “잡담”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지젝의 라캉론은 정신분석학과 ‘큰 이야기’를 결합시킬 것을 요구하는 라캉의 생각에 잘 부합하기 때문에 더욱 우리의 흥미를 끈다.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에서 지젝은 이데올로기의 작동 방식에 대해 설명하면서 특히 무의식, 물신, 잉여향유 등의 개념에 주목한다. 먼저 무의식 개념에 대해 살펴보자. 꿈과 같은 무의식의 형성물에 등장하는 상징의 ‘내용’을 무의식과 동일시하는 통속적 해석에 반대해 지젝은 라캉을 따라 무의식을 내용이 아니라 형식의 관점에서 정의해야 한다고 본다. 예컨대 꿈속에서 우산은 남근이다라는 식의 내용적 해석이 아니라, ‘기표’의 관점에서 무의식과 심리적 과정을 사유하는 것이다. 라캉과 지젝에 따르면 프로이트적 의미의 무의식은 ‘차이’ 자체로서 ‘정의상’ 영원히 의식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의식이 의식으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반드시 의식(이 제공하는 재료)의 협조를 받아야 한다. 따라서 꿈에서든, 증상에서든 일단 의식적 재료와 연관을 맺게 된 무의식은 이미 무의식 ‘자체’는 아닌 것이다. 무의식은 말하자면 ‘세계 바깥’에 있는 것이므로, 이 탈세계적인 것이 세계 안으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왜곡(전치와 압축: 프로이트; 혹은 은유: 라캉)과정을 겪어야 한다. 프로이트가 말했듯이 무의식은 꿈의 사고 혹은 내용(왜곡되어 등장하는 내용)이 아니라 ‘꿈의 작업’이다.

무의식은 어디에 있는가? 보통의 경우 사람들은 공간 은유에 의존해 무의식의 위치를 설명한다. 또는 무의식은 의식 ‘아래’에 있다거나 혹은 무의식이라는 보다 큰 ‘그릇’의 ‘위’에 또는 ‘속’에 의식이 위치하고 있다고 막연히 말한다. 하지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공간 은유는 ‘철학적’ 설명보다 더 이해하기 어렵다. 도대체 무의식이 나의 어느 ‘곳’에 있단 말인가? 지식과 상식이 풍부한 어른보다는 어린아이가 문제의 핵심을 찌른다. 어린이들은 “마음이라는 것은 도대체 나의 어느 곳에 있나요”라고 질문하지 않는가?

다시 지젝으로 돌아가자. 지젝은 무의식을 어떻게 정의하는가? 그에 따르면 무의식은 사유의 형식이다. 그런데 이 ‘사유형식’의 존재론적 지위와 ‘사유’의 존재론적 지위는 결코 같지 않다. 여기에서 지젝은 사유의 외부와 내부라는 전통적인 구분을 넘어선다. “사유의 형식은 사유의 외부에 존재한다.” 하지만 사유의 형식은 사유의 한 부분임에 틀림없음으로, 사유의 형식은 사유 내부에 존재한다고 말해도 무방하다. 즉 사유의 형식은 사유의 내부에 존재하며, 동시에 외부에 존재한다. 사유의 형식은 지젝에 따르면 무의식에 다름 아닌데, 이렇게 사유의 외부에 존재하는, 사유의 형식으로서의 무의식이 상징적 질서를 구조짓는다. 여기에서 지젝은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이론가인 존-레텔의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에서의 논의를 원용한다. 존-레텔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상품은 구체적인 사용가치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상품교환 사회에서 사람들은 실제로 교환 행위를 할 때 그 상품의 사용가치가 아니라 추상적인 교환가치에 따라 교환 행위를 하는가? 교환 행위가 발생할 때 실제로 상품의 질은 변화하는데 왜 사람들은 그것은 불변이라고 생각하는가? 왜 사람들은 교환가치를 어떤 불변의 실체적 가치로 간주하는가? 이것이 바로 ‘상품 물신성’인데, 존-레텔에 따르면 상품 물신성 현상이 생겨나는 이유는 의식적 사유와 행위 사이에 균열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상품교환체제의 작동에 결정적인 요인은 각 개인의 의식적 사유가 아니라 행위라는 것이다. “교환 행위 동안에 각 개인은 마치 상품은 물리적, 물질적 변화를 겪지 않는 것처럼, 마치 상품은 생성과 소멸이라는 자연적 순환으로부터 면제되어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여기에서 존-레텔은 “현실적 추상(Realabstraktion)“이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이는 개인의 의식적 사유가 아니라, 의식적 사유와 무관한 행위가 현실을 구성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상품추상의 본질은 그것(상품추상)이 사유에 의해 산출되지 않는다는 것, 즉 인간의 사유 속에서가 아니라 행위 속에 그 기원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레텔은 의식적 사유에 의해 현실이 구성되는 것으로 간주하는 전통적 관념론과 결별하고 있다. 지젝은 존-레텔의 논의를 보다 일반화해, 상징적 질서를 구성하는 우리의 ‘기계적인 행위’를 무의식으로 정의한다. ”실재적 추상이 선험적 주체의 무의식이다.“

그렇다면 이데올로기는 단순히 “허위의식”, 즉 현실에 대한 환영적 표상이 아니라, 현실을 구성하는 “비지식” 혹은 “알지 못함”으로 정의되어야 할 것이다. 현실이 현재의 상태로 구성되어 존속할 수 있는 것은 현실의 ‘실재’, ‘진리’를 사회 구성원들이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알지 못함’이라는 것은 단순히 지적인 인식의 유무라는 좁은 의미가 아니라,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는 행위, 그리고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행하는 행위까지 포함하는 보다 넓은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각 개인의 구체적인 행위 속에 이데올로기가 구현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데올로기는 ‘사회적 현실’이며, 행위 속에 구현되어 있다는 점을 중시해 말한다면 이데올로기는 단순히 ‘알지 못함’이라기보다는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해지는 행위 속에 존재하는 것, 혹은 행위 그 자체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지젝은 이데올로기, 믿음, 그리고 무의식은 우리의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현실, 즉 우리의 외부에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지젝은 지금까지 논의한 상품 물신성에 고유한 이러한 논리를 ‘성도착증의 논리’―‘그럼에도 불구하고’―로 설명한다. 성도착증 환자가 어머니는 팔루스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부인’(Verleugnung, désaveu)하고, 마치 어머니가 팔루스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듯이, 이데올로기적 주체는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알고 있지만 마치 이에 대해 전혀 모르는 것처럼 사실상 행동한다(물론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할 수도 있다). 상징계는 이렇듯 사회구성원들의 ‘성도착적’ 행동에 의해 유지된다. 또 지젝은 우리의 무의식이 행위로 전환되어 나타난다는 점에서 이데올로기와 고전적인 히스테리 증상인 ‘전환 히스테리’와의 유사점을 본다. 이 외에도 이 글에서 언급할 수 없었으나 지젝은 법과 초자아의 관계, 외상적 법의 내면화의 과정과 관련해 알튀세르 이론의 장점과 한계, 환상과 증상의 문제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흥미롭게 서술하고 있다.

지젝의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은 라캉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지금까지 사회철학, 그리고 이데올로기론이 남겨놓은 여러 난제들에 대해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정신분석학과 사회철학의 대화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책으로 평가될 수 있다. 적어도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에서의 이데올로기론은 ‘아직’ 완벽하지 않지만, 이 책에서 제시된 논점들이 보다 충실히 전개된다면 지젝 이론은 이데올로기의 분야에서도 기억할 만한 ‘현대적 고전’으로 남게 될 것임이 틀림없다. 필자는 특히 지금까지 불투명하게 남아 있던 문제로서 ‘개인과 사회의 관계’에 대해 설득력 있는 해결책을 제시한 것에 지젝의 이데올로기론의 공헌이 있다고 본다. 잘 알려져 있듯이, 개인(주체)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지금까지의 논의는 개인 혹은 구조를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일면성을 벗어나지 못했다. 휴머니즘적 맑스주의자는 주체의 사회 변혁능력을 강조하지만, 사회 변혁을 통해 모든 사회적 억압을 제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역사주의적 오류에 빠지는 경우가 많았다. 지젝에 따르면 현실사회주의는 사회주의가 실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다시 되돌아오는, “비역사적인” 외상적 중핵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전체주의 국가로 변해버렸다. 구조주의적 맑스주의자는 구조의 힘을 일방적으로 강조했다. 구조주의 맑스주의 이론 틀에서는 개인의 변혁 능력, 주체의 내밀한 삶과 고통의 문제를 생각할 수 있는 이론적 도구가 없다. 이에 대해 라캉-지젝주의적 맑스주의‘는 이렇게 대답한다. 과도한 보편화(구조주의)가 사회의 역사성을 숨긴다면, 과도한 역사화(휴머니즘)는 다양한 역사에 항상 꼭 같이 반복되는 “외상적(실재적) 중핵”을 보지 못한다.

이것이 함축하는 바는 이렇다. 주체의 자기분석(자기성찰)이 실제적인 사회변혁을 대신하는 것은 아니지만, 주체의 자기성찰 없는 사회변혁은 궁극적으로 인간 해방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왜 "세미나 제7권: 정신분석학의 윤리"에서 <안티고네>를 분석하면서 라캉이 정치를 직접 논하지 않고 ’정신분석학의 윤리‘라는 우회로를 통해 간접적으로 정치에 대해 이야기해야만 했는지 수긍할 수 있게 된다. 정신분석학은 정치를 ’궁극적으로‘ 주체의 윤리적 결단의 효과라는 관점에서 파악하기 때문이다. 지젝이 우리에게 보여주었듯이 사회변혁, 보수적 이데올로기의 극복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성도착적 행위‘의 논리를 포기하는 주체의 윤리적 결단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는 것이다.

 

 

 

출처 / 다음 아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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