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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나호열 시인/詩

촉도(蜀道) / 나호열

by 丹野 2013. 10. 12.

촉도(蜀道)

 

 나호열

 

 

경비원 한씨가 사직서를 내고 떠났다

십 년 동안 변함없는 맛을 보여주던 낙지집 사장이

장사를 접고 떠났다

이십 년 넘게 건강을 살펴주던

창동피부비뇨기과 원장이 폐업하고 떠났다

 

내 눈길이 눈물에 가닿는 곳

내 손이 넝쿨손처럼 뻗다 만 그곳부터

시작되는 촉도

 

손때 묻은 지도책을 펼쳐놓고

낯선 지명을 소리 내어 불러보는 이 적막한 날에

정신 놓은 할머니가 한 걸음씩 밀고 가는 저 빈 유모차처럼

절벽을 미는 하루가

아득하고 어질한 하늘을 향해 내걸었던

밥줄이며 밧줄인 거미줄을 닮았다

 

꼬리를 자른다는 것이 퇴로를 끊어버린 촉도

거미에게 묻는다

 

 

-《시와 정신》2013년 가을호

 

 

 

  근래 시를 읽고 '아, 이 시 참 좋네!' 하고 무릎 쳐본 지 오래됐다. 잠깐 반짝하다 사그라지는 요즘 음악처럼 구성. 연출된, 가슴은 없고 머리로만 짜깁기한, 그 시가 그 시 같은...오늘 아침 나호열의 시를 읽고 오랜만에 가슴이 뻥 뚫린 듯 후련하다. 공룡자본의 그늘 속으로 사라져버린 '경비원 한씨' 와 '낙지집 사장' '창동피부비뇨기과 원장'은 왜 폐업을 했을까? 폐업한 젊은 가장은 옥상 난간이거나 넥타이를 매기 좋은 어느 산 촉도(매우 험한 길) 속으로 사라져버린 것은 아닐까? /내 눈길이 눈물에 가닿는 곳/ 내 손이 넝쿨손처럼 뻗다 만 그곳부터 / 시작되는 촉도/ 사는 것이 밥줄이며 밧줄이고 거미줄인...공룡자본의 꼬리는 어디일까? /꼬리를 자른다는 것이 퇴로를 끊어버‘리는 촉도는 아닐까? (조삼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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