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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향기로 말을거는 詩

자정의 속도 외 / 박성현

by 丹野 2013. 6. 4.

 

자정의 속도 

 

 

박성현

 

 

 

내가 내 옆에 누워

조용히 심장소리를 듣고 있었습니다.

말라버린 향수는 얼룩의 영역만 지키고 있었습니다.

나는 일회용 수저처럼 식욕이 없었습니다.

 

 

언제부터인지 무릎은 동요하지 않습니다.

주머니와 계단이 헐렁한 이유입니다.

외투가 걸려 있으니 벽에는 못이 박혀 있겠지요.

못은 이 집의 유일한 안전장치입니다.

 

 

손바닥에서 빈둥거리는 가죽을 벗겨내고,

지문을 삭제합니다. 지문이 기록했던 사건은

따로 저장해 이야기 목록으로 만듭니다.

 

 

—이를테면, 발목이 허물어지는 속도

—이를테면, 낮에 씹은 물고기의 고막

—이를테면, 어제의 신문이 감췄던 문장

 

 

그리고 나는

무수한 ‘이를테면’이 몸의 배란(排卵)이라는

당연한 결론을 삭제합니다.

 

 

누군가의 쓸모를 기다리는

식탁, 엄숙하게 화초를 지키는 창문,

근육을 감추는 어둠은 철저하게

개별적인 자정입니다.

 

 

나는 내 옆에 누워

바닥으로 진화하는 척추를 만집니다.

심장은 멈춰야 할 때를 알고 있습니다.

느닷없이 찾아오는 사건은 없는 것이죠.

—이를테면, 또한 이를테면

 

 

 

—《현대시》2013년 4월호

 

 

 

 

 

 

심야극장

 

 

 

 

 

   모퉁이를 돌면 자정이다. 복도는 아직 열한 시 오십분. 십 분의 어둠을 마시는 동안 연기는 타오르는 것에만 집중했지.

 

 

   저 쇳소리는 망설이지 않아. 어둠 속에서 사각형을 쳐다보는 충혈된 눈알들. 엘리베이터는 열리지 않고 더러운 얼룩이 겨드랑이에서 스멀거리는데 그때 누군가 네 머리에 불을 지른다면.

 

 

   구멍을 늘 헤집는 연기, 뇌를 찢고 검정 기억을 쑤셔 넣는 죽음들. 너는 통증 없는 벌레, 플라스틱 발목이 창 바깥으로 튕겨져 나왔지. 이 극장엔 인형들이 너무 많아, 인형들이.

 

 

   안 그래?

   비상구를 빠져나가는 맹렬한 불과

   독으로 가득한 연기

 

 

   저 미칠 듯 빨라지는 자정의 속도

 

 

   뜨거운 어둠을 마시는 십 분, 혀에서 항문까지 트랙은 너무 짧아. 숨을 멈춘 뒤통수의, 뒤통수의, 뒤통수가 일렬로 늘어선 복도의 모퉁이. 신의 손에는 같은 숫자만 적힌 주사위가 있을 뿐이지.

 

 

   자 그럼 어떤 자정이 올지, 우리 내기할까?

 

 

 

 

—《다층》2012년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