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만 시집]햇살 바이러스
詩로 여는 세상, 2013년
시인의 말
어둠이 몰려온다.
안개보다도
비보다도
바람보다도 무서운 어둠
사방에 짙게 드리운 어둠
세상이 너무 밝아서 나는
어둠을 사랑하게 되었다.
빛과 희망을 꿈꾸는 삶이 이제
지긋지긋하다.
어둠 속에서
어둠에 안겨
터질 듯한 울음
가까스로 참으로
꾸역꾸역 어둠을 삼켜야 한다.
계사년 초봄
고성만
동쪽 시냇물을 따라간다
- 길. 1
고성만
냇물이
필터로 거른 것같이 맑아졌다
등성이에서 산마루로 바람 불어가듯
해 뜨는 쪽 향하여
가지뻗는 나무들
언젠가 잃어버렸던 악기를 연주하는 우듬지 근처
여태 발음하지 못한 말들이
가만가만 흔들리는 물 속
골짜기 사이
또 골짜기 지나
귀를 씻으러 간다
검은 그림자 흰 여백 안으로
몰래 스미고자 했지만
끝내 들키고야 말았던 발짝 소리로
가도
다 못 가고
다시 돌아오는 길 위
산죽이 발처럼 둘러쳐져 종일 사운거리는 언덕
빈 하늘에 걸린 낮달 가져다가
한 종지 떠서
찻물 끓인다
명두
- 길.
고성만
개복숭아 핀 봄
아래로 아래로
길이 흘러내리는 남쪽 항구
부 - 어디로 향하는 배인가
고동 소리 들리는 계단에서
서서히 걸어 올라오는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웬 걱정이 그리 많으우? 그녀를 따라
대나무 깃대 끝 붉은 조각 펄럭이는 집으로 들어갔다
비쩍 마른 몸매에
창녀라 하기에는 어쩐지 늙은,
무녀라 하기에는 어쩐지 젋은,
싸구려 염색에 요란한 파마머리를 한 그녀는
울긋불긋 그림이 붙어 있는 벽을 향해
무릎 끓고 한참 엎드렸다 일어서서 손 씻은 다음
생년월일시를 물었다
까만 청동거울에 비친 얼굴을 보고
외로운 고 자 사람 자 자,
삼대가 객사할 팔자야 중얼중얼
나는 그 여자를 기둥에 결박하고
재갈 물린 뒤 지폐 몇 장 던져둔 채
밖으로 나왔다 연분홍
꽃잎 따라
어디론가 가고 싶은 날이었다
화엄사 구층암 모과나무 기둥에 기대어 앉아
고성만
기억이 구불구불 구부러진다
석탑의 기단은 지불돌이 되고
옥개석은 받침대가 되어
7층도 되었다가 9층도 되었다가
돌이 식빵처럼 날아다닌다
강아지가 독경을 한다
매미가 바라를 친다
풀들이 찻물을 끓인다
탑신 감고 올라간 나팔꽃은 나팔을 불고
접시꽃은 접시에 밥을 날라오고
구름 톱날과 바람 지렛대로
뒷살 기슭 울퉁불퉁한 모과나무 베어
기둥을 세우는 사람들
한여름 더위 피해
산속 암자에 잠시 머무르는 나는
시베리아의 바람을 소재로 한
교향곡에 귀 기울인다
러시아 혁명을 주제로 한 시 읽으며
모과나무 기둥에서 증발한 물이
다시 모과나무 뿌리로 올라와
쉴 사이 없이
꽃 피었다 지는 소리 듣는다
가장 어두운 마을의 잠
고성만
양귀비 꽃잎 같은
해가 지자
캄캄하게 저무는 마을
너덜거리는 지붕
덜컹거리는 창문 곁을 지나는 중
무너지기 직전의 집에서 슬피 우는 소리 들렸는데
나도 언젠가
흑단의 상자에 손 집어넣어
반질반질 윤기 나는 어둠을 만진 적이 있다
빛 한 점 스며들지 않는 방에서
누군가의 이름을 애타게 불러본 적이 있다
해가 멀고 먼 주소를 돌아 돌아오는 동안
시든 댕댕이덩굴 위
마리로랑생의 그림처럼 뜨는 달
하얀 얼굴 검은 눈동자가
옛날 이 집에 살던 소녀인가
소녀들 따라온 가족인가
수저 젓가락 딸그락거리는 소리
주전자의 물이 끓는 소리 몇 개 별을 주워
돌아갈 준비가 된 나는
초롱꽃 봉오리 품고
깊이 잠든다
햇살 바이러스
고성만
햇살이 균을 퍼트리자
블루베리밭에 블루베리 따러 갔다가 겁탈당하는 소녀들
나중에 미용사가 되거나 요리사가 될 소녀들이
슬피 운다 개중에는
국회의원이 되거나 우주인이 될 소녀도 섞였다는 소문 들렸는데
쌍꺼풀 양악 가슴확대 지방흡입 시술받는 소녀들
얼굴을 바꾸고
몸매를 가꾸고
마음씨를 가공하여
아시아 유럽 아메리카 남극 북극 대륙까지 정복하게 될 소녀들
지나치게 빨리 뜨거워지는 날씨만큼
조숙한 소녀들을 사랑하는
소년들이 등장한 것도 그 즈음
소녀처럼 화장하고 소녀의 손과 발에 키스하는 소년들
소녀와 함께 밥 먹고 잠자고 노래 부르는 소년들 중에는
장차 로봇경진대회에서 우승하거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딸 소년도 섞였다는 소문 들렸는데
사실은 건달이나 부랑자가 될 확률이 농후했으므로
교통사고
자살사고
폭력사고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는 소년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녀들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소년들
검은 그림자의 숲에서
춤춘다
해가 지고
달이 뜨는 동안
고성만 시인
1963년 전북 부안 변산 출생.
조선대 국어교육과,
전남대 교육대학원 졸업.
1993년 〈광주매일신문〉신춘문예 '고부에서 보낸 일 년' 당선,
1998년《동서문학》신인상에 '섬, 검은 옷의 수도자' 외 4편 당선으로 등단.
시집 『올해 처음 본 나비』『슬픔을 사육하다』『햇살 바이러스』.
현재 광주 국제고등학교 교사. 이메일 kobupoet@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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