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발견
이만섭
수문을 열고나오는 저수지의 물은 파죽이다
제 안에 침잠하던 고요가 사자후처럼
기세를 내뿜는 사이 난간에 피워내는 물꽃
울음의 형식으로
폭죽의 형식으로
폐부가 이렇다는 듯 고요를 쏟아 꽃 피워낸 물의 사연을
새끼줄 같은 내력으로 잇고 가는 강,
말은 애초에 미약해서
도리 없이 침묵을 택했던 것이다
귀의 입으로 소리를 삼키며 천천히 몸속에서 숙성한 말들은
뼈에서 가져온 듯 밀밀해져 마침내
다물어진 관자놀이로 온점을 찍고 나온 듯
침묵 끝에서 울음이 도고 폭죽이 되고
괄호에 묶인 말의 통로는
활주로처럼 단단한 육질의 언어가 되었다
씨앗으로 파종하여 꽃처럼 피워낸 말이
침묵의 갈피에서 가져온 문장이었던 것이다
절반의 하루
이만섭
노동을 마치고 귀가하여 드러눕는 등을
저녁의 방이 쓰다듬는다 기다렸다는 듯이
꿈꿀 때까지 또는 아침이 올 때까지
해와 달을 빌려 쓰는 삶인데
어느 시간인들 소중하지 않을까만
거리낌 없이 다시 뻗을 수 있는 자리에
생의 무게를 싣는다
천정은 별자리의 중심에 놓여 있고
창밖은 꽃나무들을 세워 봄밤을 기리고 있으니
벽시계 제시간을 지키는 일이나
책장에 골똘하게 꽂혀있는 손때 묻은 서책들
네 벽에 무성히 올린 덩굴무늬 벽지며
눈에 보이는 것들 모두 나를 위해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며
절반의 하루를 동행하고자 깨어 있다
삶의 경계선을 넘어오는 생의 적들을 물리치고
신성한 노동으로 얻은 자유가
이만한 게 또 있을까
그 대가로 시작하는 소중한 하루
구들을 진 몸이 먼저 휴식을 통과 중이다
- <시와 정신> 2013년, 여름호
이만섭
전북 고창 출생
2010년 <경향신문>신춘문예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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