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
박성현
그는 벽돌이었네
갈색 창문과 높은 구름, 한낮의 태양과 투명한 대기
8월과 입추가 서로 이어지고 풀어지는
계절의 경계에서 한 때 그는
회색, 회색의 빨강,
빨강의 수분과 초록의 이끼를 껴안는
단단한 포옹
예전에 그가 벽돌을 집어들었을 때
성좌처럼 흩어진 점들이 연결되고 그때마다 그의 손은
붉은 점토로 바뀌었지만 비로소 뿌리 내린
자작나무 숲처럼
계절은 거슬러온 삶을 묻지 않네
태평양을 건너온 바람이 그의 몸에 소금을 뿌리고,
벌거숭이처럼 벗겨져 늙어가도
그것은 순간 무너지고 순간 쌓이는 중력의 속도
성급한 사람들은 그의 균열을 메웠지만
단지 기울기의 속도만 늦췄을 뿐이네
저 벽돌들이 허물어진 공중에
새가 날아오고 꽃씨가 솟아오르고 다시 입추가 머물 것이네
한 때 벽돌이었던 그는, 이미 벽돌이 아니었다 말하네
- 『문학과 의식』 2012년 겨울호
기억이라는 상처, 또는 통증에 관하여
나호열
‘담’은 많은 이야기를 거느리고 저기 서 있다. 한없이 따스하기도 하고 떨쳐 내버릴 수 없는 통증 그 자체로 ‘몸’을 이루며 서 있다. 그 온기와 통증은 온전히 ‘몸’에 자리 잡고 있으나 그 ‘몸’의 주재자인 정신은 정체를 드러내는 법이 없다. 아니, 정신 그 자체가 온기와 통증이기에 ‘담’은 어쩔 수 없이 균열과 무너짐을 기다리는 바람의 이야기일 것이다. 바람의 이야기는 밖으로 새어나오는 법이 없다. 오로지 기억 속에서만 상처로 남고 통증으로 기어다닌다. 달리 말하면 안과 밖을 경계지우는 담은 안락을 꿈꾸기 위해 스스로를 가두어야 하는 삶의 지독한 모순을 증명한다.
시인 공광규는 그의 시 「담장을 허물다」에서 이렇게 말한다. ‘고향에 돌아와 오래된 담장을 허물었다/ 기울어진 담을 무너뜨리고 삐걱거리는 대문을 떼어냈다/ 담장없는 집이 되었다/ 눈이 시원해졌다’. 그러니까 공광규 시인은 ‘담’을 사유 私有의 욕구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안쓰러운 장벽으로 인식하고 있다. 아무렇지 않게 감금의 즐거움을 감수하는 욕망이 더 이상 죄스럽지도 않은 세상사에서 장벽을 허무는 일은 쉬운 일이 어디 쉬운 일일까?. ‘공시가격구백만원짜리 기울어가는 시골 흙집 담장을 허물고 나서/ 나는 큰 고을 영주가 되었다’(「담장을 허물다」, 마지막 연)는 시인의 권유와 결행 決行은 눈이 시원해지고, 자연의 영주가 되는 지름길인데, 우리는 여전히 통증 그 자체인 ‘담’을 허물어뜨리고 ‘담’을 이루는 ‘몸’의 쾌락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주저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래서 몸의 쾌락을 벗어나려고 하는 통증을 한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다. ‘이름을 부르면 쓸쓸한 휘파람 소리로 답할 것 같은 /가슴과 등외엔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나는, 담이다’(한옥순, 「담」, 첫 연).
아하, 그렇다. 가슴은 따스한데(안) 등은 빙벽(밖)이어야 하는 삶의 기억을 어디 먼데로 유폐시킨다 해도 몸이 결리는 담痰은 치유될 길이 없는 것이다. 망망대해에 외로이 떠 있는 섬의 돌담은 바다로부터 매섭게 몰아치는 바람을 막기 위해 쌓은 것이지 가진 것을 지키려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고가 古家의 눈높이만큼의 흙담은 찰랑찰랑 안과 밖을 자유롭게 오가는 호기심의 눈길을 가로막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의 풍경은 어떤가? 아침이면 이중삼중의 자물쇠를 열고 출근했다가 저녁이면 둔중한 자물쇠를 기꺼이 채워놓은 즐거운 고통을 괴로운 즐거움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런 국면이 박성현의 시각에 포착될 때 ‘담’은 보다 비극적이면서 역설적으로 극즉반 極則反( 극에 달하면 다시 되돌아가는)의 순환의 희망을 노래하는 상징이 된다.
박성현이 포착한 ‘담’은 사회라는 거대한 포위망에 갇히거나, 혈연에 의해 숙명으로 받아들여진 ‘나’이다. ‘담’이라는 전체에 길항하는 부분으로서의 벽돌은 타자 他者와 변별되는 ‘나’만의 속성이다. 개인적인 취향, 성격, 꿈 등등의 ‘나’의 속성은 사회나 혈연의 힘에 의해, 또는 세속에 길들여지거나 굴복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결국 굴절된 ‘담’의 외피로 뒤덮혀 버린다.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닌 경계인(회색의 담)으로 살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붉음으로 상징되는 삶의 순수한 열정을 잃지 않으려는 분투는 8월(젊음)에서 입추(중년)으로 접어드는 보편적 인간사의 단면에 다름 아니다. 누군가를 보호하는 울타리로서의 ‘나’는 균열을 피할 수 없고 붉고 단단했던 순수의 벽돌들은 소금기와 바람에 마모되어 갈 것이다. 그러나 절망하지는 말자. 누군가를 위해 헌신했던 시절이 지나고 소용이 다했을지라도 (한 때 벽돌이었던 그는, 이미 벽돌이 아니었다 말하네) 무궁한 우주의 순환은 허물어진 담을 위로하며 새가 날아오고 꽃씨가 솟아오르고 다시 입추가 머물 것이므로, ‘담’이 간직한 바람의 이야기는 영원히 지속될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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