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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나호열 시인/세상과 세상 사이

죽음에 맞서는 삶의 길 / 나호열

by 丹野 2013. 2. 9.

 

 

 

 

죽음에 맞서는 삶의 길

나호열

 

 

 

지금도 그랬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품어보는 일이 있다면 시인이 현자이거나 올곧은 선비라는 이야기이다. 시언지 詩言志의 오랜 전통이 오늘날에도 유효한 것인지 가늠할 수는 없어도 맑은 정신을 노래하는 자, 삶을 뜨겁게 안아들이고 미적 승화를 거두어들이는 존재로 세간에 인식되었으면 하는 마음은 여전하다. 다른 장르와는 달리 말(言)을 다루어야 하는 시인의 숙명은 시와 시인을 한데 묶어보는 상식(?)탓에 걸림돌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귀동냥으로 얻어들은 회사후소 繪事後素니, 교언영색 巧言令色이니 대교약졸 大巧若拙이니 하는 말들이 유독 시인들에게 엄정하게 적용되는 모습은 차라리 공포에 가깝다. 그러나 시대적 양상이 변화함에 따라 시의 쓰임새나 기법은

한층 다양해지고 견고해져서 섣불리 어설픈 잣대 하나로 시를 평가하는 일은 무모한 일전이 될 것은 뻔한 일이다.

 

난세가 지속되는 탓인지 몇몇 현자 賢者들이 어리석고 상처받은 대중들에게 위로의 말을 던지는 것이나 그 반대편에서 자극적인 언동으로 위무를 일삼는 사람들 사이에서, 더욱이 판타지를 현실화하는 휘황찬란한 영상에 맞서 시와 시인이 해야 할 역할은 감소되거나 약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오죽하면 프로슈머Prosumer(생사자이면서 동시에 소비자인)로 자학하는 일까지 생겨났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시는 생산되고 있고 새로운 시인은 지치지 않고 태어나고 있음은 우리만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유전자 덕분인지 모를 일이다. 아무튼 한쪽에서는 시가 현학적이고 어려워서 대중들에게 배척당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다른 편에서는 고급예술이란 원래 아무나 향유할 수 없는 일련의 숙련 과정이 있어야 한다고 고개를 꺾지 않는다.

 

이 두 가지 주장 모두 나름의 타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으므로 어느 한 편에 서서 골라서 읽는 재미를 만끽하면 될 듯도 싶고 아니면 어렵지 않으나 무언가 문제 하나를 독자에게 던져주는 그런 시에 눈길을 주는 방법을 택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독자에게 문제를 던져주는 시란 무엇일까? 한마디로 이야기해서 생각하는 인간이 지니고 있는 상식을 뒤집어보고 문득 잊고 있었던 편견을 꼬집어 주는 각성 覺醒의 시라면 어떨까? 여기 유안진의 시 「9년 뒤에 웁니다」(『현대시』2012년 12월호)와 이재무의 「알피니스트들」(『시와 표현』 2012년 겨울호)을 소개해 보고자 한다. 이 두 편의 시가 다루고 있는 주제와 기법은 매우 상이하지만 비유의 사용을 억제하고 있어 쉽게 읽힌다는 점, 그러나 읽고 난 후에는 우리가 애써 외면했거나 상식으로 치부했던 문제를 독자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읽을 꺼리를 제공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한 마디 덧붙인다면 이 두 편의 시는 ‘삶이 무엇인가?’라는 문제가 아니라 ‘삶의 길을 어떻게 걸어가야 하는가?’하는 암묵의 질문을 던지면서 후회 하지 않는 삶이 최선의 삶이 아닐까하는 조심스런 진단을 숨겨놓고 있는 듯하다는 점이다.

 

9년 뒤에 웁니다

유안진

 

절하느라고 엎드리는데 들렸다

몇 년 되었지?

일어나며 속셈하는데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하늘을 찔렀을 증오가 하늘처럼 무너졌다

 

손바닥이라도 찔리고 싶어 봉분封墳을 쓸어보는데

상석비문床石碑文이 눈길을 피한다

비바람 깎던 돌에도

눈바람 식히던 돌에도

틈새를 만든 세월이 끼여 있었다

 

어쩌리, 등 돌렸던 등을 다시 등 돌릴 수밖에

가슴이 통째 아버지 아버지 메아리친다

아저씨라고 못 불러 가슴 치던 주먹도

벌건 손바닥으로 어이없다는 듯 쳐다본다

 

무너진 하늘을 밟고 내려오느라고

발목이 자꾸 접혔다

오지 마라 다시는

바람소리? 목소리? 누구의?

 

-『현대시』2012년 12월호

 

먼저 유안진의 「9년 뒤에 웁니다」를 읽어보자. 화자 話者는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9년 만에 아버지의 묘를 찾는다. 망자인 ‘아버지’는 화자에게는 ‘아저씨’라고 불리워야 할 내밀한 복잡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듯하다. 화자는 오랜 증오를 무너뜨리고 외면의 긴 세월을 뛰어넘어 화해와 용서의 시간을 가지려 한다. 그러나 「9년 뒤에 웁니다」의 결말은 결코 평화롭지 않다.

 

무너진 하늘을 밟고 내려오느라고

발목이 자꾸 접혔다

오지 마라 다시는

바람소리? 목소리? 누구의?

 

- 「9년 뒤에 웁니다」 마지막 연

 

망인 亡人이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러므로 ‘오지 마라 다시는’은 과거의 화자를 향해 현재의 화자가 내뱉는 회한의 외침이다. 그 회한의 외침은 받아줄 대상이 사라진 불통의 외침이다. ‘바람소리? 목소리? 누구의?’는 불통의 업보로부터 빚어진 고독의 다른 이름이다. 농경사회의 파괴, 급격한 도시화와 개인주의는 익명의 사회, 존재가 사라진 닉네임의 시대, 진정한 소통이 부재함에도 불구하고 소통하고 있음을 믿고 싶어하는 유목민의 긴 그림자를 연상케 한다. 부재하는 대상에 대한 사랑, 이해, 용서와 화해가 무슨 소용인가? 모든 삶의 가장 큰 선물은 ‘오늘’이다. 오늘을 뜨겁게 산다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가슴의 아름다운 화원으로 만드는 소통의 열쇠가 아니겠는가?

 

 

알피니스트들

 

이재무

 

수압 높은 심해가 심해어의 터전이듯

 

가파른 벽이 생활의 문門인 이들이 있다

 

수직 움켜쥐고 기어오르며 한 땀,

 

한 땀 목숨 수놓는,

 

여름 한낮 들끓는 고요 속

 

지상의 낙지 족들은

 

한 방향에의 고집

 

등로에 충실할 뿐

 

애써 등정 고집하지 않는다

 

매순간 오르는 일이 아프고

 

아름다운 결실이므로 저, 필사의

 

몸짓들은 꿈의 실현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해마다 마침표 없는 순환의

 

문장들 뜨겁게 써가고 있는,

 

바닥에서 기신하여 도정에서 마감하는,

 

시지프스 후예들이 쓴,

 

미완의 푸른 책 열어 숨차게 읽는다

 

계간 『시와 표현』 2012년 겨울호

 

 

이재무의 「알피니스트들」은 「9년 뒤에 웁니다」와는 다른 시선으로 삶을 조명한다. 이 시 또한 평이하게 읽을 수 있으니, 산객들에게 통용되고 있는 ‘등로’와 ‘등정’의 의미를 금방 알아차릴 수만 있다면 묵직한 기로에 독자를 서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박영석은 2011년 에베레스트 안나프루나에서 산몰한 산객이다. 에베레스트 14좌, 7대륙 최고봉 등정, 북극점, 남극점을 최초로 정복한 그는 그가 행했던 등정주의( 경로의 난이도나 장비의 유무에 상관없이 목적을 쟁취하는)를 벗어나 등로주의(미답의 경로를 새로이 개척하는)의 도전을 거듭하다가 생을 마감했다. 생전에 박영석은 이렇게 말했다. “히말라야에서 강한 인간은 없다. 그렇다고 약한 인간도 없다. 다만 신 앞의 인간이 있을 뿐이다” 산을 정복의 대상, 향락과 건강을 지키는 도구로 생각하는 철없는 등산객에 불과한 필자는 역설적이게도 ‘죽음이 눈앞에 도사리고 있을 때 삶의 경건함이 또렷해진다.’는 산객들의 심지를 알아채지 못한다.

 

매순간 오르는 일이 아프고

 

아름다운 결실이므로 저, 필사의

 

몸짓들은 꿈의 실현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 「알피니스트들」 부분

 

상식으로는 무모한 도전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산객들의 분투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 앞에 당당히 맞서보려는 의지에 다름이 아니다. 암벽에 매달려 매순간 엄습하는 죽음의 그림자와 맞서는 순간, 삶이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를 깨닫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 시의 화자는 위대한 자연을 읽고 알피니스트의 도전을 읽는다.

 

 

바닥에서 기신하여 도정에서 마감하는,

 

시지프스 후예들이 쓴,

 

미완의 푸른 책 열어 숨차게 읽는다

 

 

- 「알피니스트들」 마지막 부분

 

안빈낙도 安貧樂道를 재앙으로 여기는 자본의 욕망 앞에서 당신은 여전히 등정주의를 꿈꾸고 있는가? 남보다 더 빨리, 더 높이, 더 많이 갖는다고 죽음을 피할 수 있는가? 차라리 ‘바닥에서 기신하여 도정에서 마감하는,’ 삶을 향하여 정신과 몸을 크게 한번 뒤틀어 볼 용의는 없는가?

 

두 편의 시, 「9년 뒤에 웁니다」와 「알피니스트들」을 읽는 즐거움은 어설픈 깨달음의 설파나 현란한 언어의 기교, 갈피 없는 상상력에 기대지 않고 현실에서 부딪치는 체험으로부터 빚어지는 질문을 조용히 우리 앞에 내미는 데 있다. 결코 위압적이지 않은 그 질문에 대한 정답은 각성의 층위에 따른 독자들의 입맛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므로 없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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