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의 각도, 태초의 시어 찾기
김선주 / 시인, 문학평론가
1.
나호열의 시 「껌」은 우리 삶에 내재된 상과 하, 양과 음, 선과 악 등 수직적 구도를 형성하는 대상을 감각적 시어를 통하여 상반된 이미지로 그려낸다. 즉 시적 화자가 “마이너리티”의 대상으로서 씹히는 껌을 지칭했다면, 껌을 씹는 행위의 주체는 자본과 계급으로 간주되는 그 무엇을 의미한다. 어쩔 수 없는 천민자본의 유입이 만들어낸 현상을 인식한 대상이 불행한 껌으로 형상화된다. 이는 블루칼라와 화이트칼라로 길항관계를 유지하며, 지식세계에 존재하는 상대성 원리와도 직결된다.
씹어주세요
내 몸의 향기와 달콤함이 사라질 때까지
이빨로 자근자근 애무해 주세요
버릴 땐 안녕이란 말은 하지 마세요
애꿎게 재회를 약속하는 것은 쿨하지 않아요
전에 무엇을 했느냐고 묻는 것도 예의가 아니에요
전생에 나무였다고 말하면 믿으시겠어요
나무의 눈물이 고무라 하면 웃으시겠어요
이 질기고 탄력있는 몸매는
어쩔 수 없이 숨기지 못하겠네요
이 열등감이 집착이 되네요
이제 이 열등의 이빨로
어디든 붙어드릴께요
당신이 나를 버리는 그 순간
껌은 이렇게 해석된다. 잘 안 풀린, 어려운, 잊혀진, 조건이 좋지 않은, 돈을 잘 벌 것 같지 않은 마이너리티.
- 「껌」전문
아무리 몸부림 쳐도 소용없는 계급사회가 이미 천민자본의 상징처럼 굳어진 현대사회에서 시인은 모든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다만, 마이너리티로 호명될지라도 그 정체성까지 잃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무언으로 요구하는 것이다.
씹든, 주무르든 어차피 버릴 거면 “당신이 나를 버리는 그 순간” 알량한 동정은 금하라. 마치 관심 있는 듯 지난 과거와 족보에 대하여 캐지 말라. 마이너리티 신분의 내가 지금 신분을 가장하여 족보를 고백한다고 해서 “당신들”은 인정하기커녕 비웃음을 흩뿌리지 않겠는가. 소수의 민족이 화인처럼 규정된 출신성분을 지니고 있는 한 아무리 화려한 성과를 낸다고 할지라도 그 입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다. 누군가 “열등감”이라 치부해도 어쩔 수 없다. 이것이 곧 현실이 아니겠는가.
어느 날 시적 화자는 가을의 문턱에서 자신의 생을 돌아보고 있다. 문득 현실을 직시하며 때론 슬픔과 아쉬움의 눈으로 세상을 관조한다. 여태껏 쌓아온 연륜의 현 시점에서 사람과 물질을 애써 구별할 가치나 필요도 없다.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흐르면 “어느 사람은 늙어 갔고” 마치 공식처럼 “어느 사람은 낡아져 갔다” 순간 화자는 생각한다. 과연 늙거나 낡아져도 향기롭거나 아름다운 사람일수는 없을까?
세월 이기는 사람 보지 못했다
어느 사람은 늙어 갔고
어느 사람은 낡아져 갔다
늙지도 않고
낡지 않을 수 없으나
높은 나뭇가지에 매달려
그저 잘 익어갈 수는 있을 듯
문득 한 소절 바람이 지나가기를 기다려
늙음과 낡음이 몸을 섞어
물컹 뒷 맛으로 남는 일
독이 오른 가슴에서 쏴아쏴아 술 익는 소리
석류 기어코 터지고 말 때 들려오는
- 「불후의 명곡」전문
그는 문명이 가져온 허망감, 무가치, 인간성 상실로 인해 극심한 절망에 휩싸인 현실을 자책한다. 결국 늙거나 낡아지면서도 “높은 나뭇가지에 매달려” 인내하며 끝내 병들고 마는 인생이 숱하게 널려있다. 그들은 물질을 추종하다가 명분 없는 죽음을 택하고 그에 준한 살인행위와 폭력, 권모술수, 상대평가, 행과 불행의 기준으로 삼고 있는 시대에서 더 이상 유물론과 인격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자연스레 “늙음과 낡음”이 공동체적 개념으로 다가오지만 “물컹 뒷맛으로” 남을 뿐이다.
시인은 차분하게 “한 소절 바람”을 부르고 있다. 이미 충분한 생을 살아온 사람의 입김은 “시월의 시린 저 발자국 소리”마냥 차갑고 고즈넉하다. 평상시처럼 “뭐, 아무려면 어때”라는 체념적 삶을 향한 질타와 감동을 단번에 토해낼 수 있는 최후의 “바람”을 느긋이 기다린다. 어정쩡한 중년의 끝에 서있는 것만큼이나 위태로운 생도 없다. 기어코 “독이 오른 가슴에서” 터져 나오는 고통의 소리를 들어봐야 아는가. 어느 것도 택할 수 없는 중간자적 입장은 늘 곤고하다.
2.
이 시에서 누군가의 그리움 가득한 마음이 전해진다. 모처럼 시간을 내서 “거진”을 방문한 시적 화자의 눈에 “빨간 심장을 닮은 우체통”과 “그리운 이름을 부르는 공중전화”가 구름처럼 뭉실뭉실하게 와 박힌다. 이처럼 시인은 손수 지어낸 공간 속 배경을 통해 삶과 죽음, 그리고 현재성을 담담하게 그려낸다. 늘 애타는 심정으로 “방파제를 넘어 온 파도가” 빨간 우체통에서 누군가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고, 언제부턴가 “그 옆 딸각 목젖을 젖히며” 수평선과 맞닿아 있는 “공중전화는” 끊임없이 일렁이는 “그리운 이름을” 목이 터져라 불러댄다.
빨간 심장을 닮은 우체통엔 방파제를 넘어온 파도가 팔딱거리고
그 옆 딸깍 목젖을 젖히며 그리운 이름을 부르는 공중전화는 수평선에 가 닿는다
신호등은 있으나마나
건너가고 싶으면 건너고 멈추고 싶으면 그만인
언제나 토요일 오후 그 시간에 느리게 서 있는
십 분만 걸어 나가도 한 세상의 끝이 보이는 곳
어슬렁, 거기
집에서 무덤까지 그 사이
- 「어슬렁, 거기」전문
이 같은 정경은 불특정 대상이든 특정 대상이든 누구에게나 애절한 “그리움”의 형상으로 비춰진다. 멀리 떠나 있으면 누구나 외롭고 그립다. 분명한 것은 막연한 대상이 아니다. 멀리 갈수록 뚜렷한 대상이 되어 파도처럼 바람처럼 밀려서 가슴에 파고든다. 그 순간 시적 화자는 생과 사, 남과 여, 고향과 타향, 마음과 마음 “집에서 무덤까지 그 사이”의 경계선을 넘나들 수 없는 미로에 사로잡힌다. 하지만 그다지 멀지도 어렵지도 복잡하지도 않은 거리에서 그 미로의 과정은 순식간에 끝나고 만다. 언제까지나 “그 시간에 느리게 서 있는” 동네 풍경과 사물들, 어느새 평생 켜질 것 같지 않던 “있으나마나한 신호등”에 기적처럼 푸른 빛이 넘실댄다.
시인은 이처럼 미묘한 생의 형태를 “어슬렁, 거기”의 화법으로 천천히 고백하고 있다. 그러기에 모든 것을 급하게 판단하지 말고 “느리게” 접근하고 그만큼 ‘미학적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사랑과 이별, 벗과 적, 예의 등 모든 삶의 원리가 그렇다.
누구나 한때 화려한 꿈에 사로잡혀 앞만 보고 달려온 시절이 있었다. 꿈을 이루기 위하여 열심히 노력하고, 치열한 노동의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주변에서 나 혹은 너를 향하여 쏟아낼 무수한 조롱과 멸시와 냉대를 우리는 기억한다. 그토록 애써도 꿈의 실현이 어렵다는 것을 나이 들거나, 가혹한 실패나 실연을 경험하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된다. 이미 인생은 정해진 것, 혹은 여러 가지 환경으로 인해서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직면한다.
뼈 없는 동물이 되라 하신 이 겨울잠인지 동안거인지 봄이 될 때까지 기다리라 하신 이 그 닫힌 문을 향하여 신이 사라지고 발이 닳고 닳도록 무작정 걸어 왔으나 쓸데없이 길어진 팔 붉은 혀의 꽃밭 같은 손은 문고리에 닿을 듯 말 듯 봄이 오지 않기를 기도했네 차라리 삭풍에 매 맞는 것이 행복하다고 미치지 않으면 저럴 수 없다 눈사람 말씀 대신 서 있네
- 「어떤 말씀」전문
그동안 자신의 경험한 삶을 토대로 남은 희망을 기대삼아 후예들에게 또는 슬픔과 아픔에 젖어 살아가는 이들에게 같은 방식으로 전수하고 있다. 이를 실천하지 않으면 그들을 위해 아무것도 할 일이 없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전통적인 관습을 따라 도식적으로 행할 뿐이다. 어느새 덕지덕지 자신을 뒤덮고 있는 명예와 가식, 체면에 눌려 부질없이 자존심의 수위만 높아진 껍데기를 발견한다. 어느 한 순간, 많은 가르침이 순식간에 부질없게 다가온다. 그것이 도서를 통한 교훈이든, 고귀한 척 낭설을 퍼뜨린 교훈이든, 숱한 인생의 과정이 결국 실제적 삶에 못 미친 것을 깨닫는다.
3.
시 속 화자가 외치는 “그 말”의 실체 “믿느냐”는 얼핏 애절하고 신비롭다. 허약하고 거짓된 세상에서 “믿느냐”의 외침은 삶을 지탱하는 원동력이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세상에 흔하게 널린 사어에 불과하다. 규정된 자리에서 주어진 책무에 충실했던 누군가 전하는 “그 말”을 과거 어느 순간들을 조합해 시적 화자가 오늘에 이르러 문득 회상해본다.
하냥 높은 산에 올라 밑도 끝도 없이 세상을 향하여 외쳤던 그 말
벗에게 귀 간질이며 했던 그 말
그녀에게 일생을 던지며 울먹였던 그 말
도끼로 내려치듯 하늘이 쩌엉쩡 깨지는 어느 날의 우레처럼
그 말을 오늘 듣는다
문 밖에 그 기척
걸레가 된 신발이 끌고 온 길은 세월이 삭제된 테이프처럼
바람이 가득 차 있다
믿느냐
진즉 나에게 물었어야 할 그 말
벙어리 폭설로 그 죄를 묻고 있다
- 「믿느냐」전문
어느덧 “문 밖에 그 기척”을 남기고 무작정 열심히 버텨온 한 사람이 어느 순간 “삭제된 테이프처럼” 성과 없는 인생의 그릇에 “바람만 가득 차 있는” 것을 목격하고 잠시 머뭇거린다. 그리고 비로소 깨닫는다. 이 시는 그동안 지나온 인생을 반추해보고 스스로 깨달아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는 아포리즘 성격을 띠고 있다. 이미 세월을 흘러 보내고, 많은 실수와 실언으로 위치를 재조정하기엔 너무 초라한 현실이 보인다. 이제와 인생을 한탄해 보아도 소용없는 짓 아닌가. 그럴 바에야 차라리 “벙어리 폭설로 그 죄를 묻고”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자는 것이다.
온통 바람 밭이다
말의 씨앗
한 자리를 맴돌고 있는 발자국들이
이랑 위로 돋아 오르려고
사위를 둘러싼 칼과 채찍 즐겁게 맞아들이는 동안
점점 더 커져가는 내 귀는
오래 전 잃어버렸던 그 말을 번역하려고
허공에 하염없이 그물을 던졌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잠깐 일 만 년이 지나갔다
울컥,
한 마디 문장이 빗장을 여는 듯
기러기 떼 노을을 추운 마을 쪽으로 끌고 가고 있다
- 「강화도, 1월」전문
시 속에 등장하는 화자는 “강화도, 1월” 매서운 바람이 부는 바닷가에서 숱한 상념의 시간을 갖는다. 곧 그의 실제적인 자아를 되찾고자 애쓰는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모든 것이 제대로 풀리지 않고 꼬일 때는 혼자 먼 곳으로 여행을 다녀온다. 먼 과거 어느 지점에서 누군가로부터 들은, 즉 자신을 향한 그 “말의 씨앗”을 통해서 오늘날 자신의 현재성이 결여된 삶을 비교 분석한다. 미세하나마 슬쩍 인생의 각도를 조절해본다. 마침내 무엇인가 큰 것을 얻은 것 마냥 착각하고 돌아와, 또다시 삶을 유영하는 내가 보인다.
* 월간 우리시 2013년 2월호 시작특집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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