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호열 시인 - 신작 집중조명
『우리詩』2013년 2월호
껌 外 5 편
껌
나호열
씹어주세요
내 몸의 향기와 달콤함이 사라질 때까지
이빨로 자근자근 애무해 주세요
버릴 땐 안녕이란 말은 하지 마세요
애꿎게 재회를 약속하는 것은 쿨하지 않아요
전에 무엇을 했느냐고 묻는 것도 예의가 아니에요
전생에 나무였다고 말하면 믿으시겠어요
나무의 눈물이 고무라 하면 웃으시겠어요
이 질기고 탄력있는 몸매는
어쩔 수 없이 숨기지 못하겠네요
이 열등감이 집착이 되네요
이제 이 열등의 이빨로
어디든 붙어드릴께요
당신이 나를 버리는 그 순간
껌은 이렇게 해석된다. 잘 안 풀린, 어려운, 잊혀진, 조건이 좋지 않은, 돈을 잘 벌 것 같지 않은 마이너리티.
어슬렁, 거기
- 거진에서
나호열
빨간 심장을 닮은 우체통엔 방파제를 넘어온 파도가 팔딱거리고
그 옆 딸깍 목젖을 젖히며 그리운 이름을 부르는 공중전화는 수평선에 가 닿는다
신호등은 있으나마나
건너가고 싶으면 건너고 멈추고 싶으면 그만인
언제나 토요일 오후 그 시간에 느리게 서 있는
십 분만 걸어 나가도 한 세상의 끝이 보이는 곳
어슬렁, 거기
집에서 무덤까지 그 사이
불후의 명곡
나호열
세월 이기는 사람 보지 못했다
어느 사람은 늙어 갔고
어느 사람은 낡아져 갔다
늙지도 않고
낡지 않을 수 없으나
높은 나뭇가지에 매달려
그저 잘 익어갈 수는 있을 듯
문득 한 소절 바람이 지나가기를 기다려
늙음과 낡음이 몸을 섞어
물컹 뒷 맛으로 남는 일
독이 오른 가슴에서 쏴아쏴아 술 익는 소리
석류 기어코 터지고 말 때 들려오는
시월의 시린 저 발자국 소리
어떤 말씀
나호열
뼈 없는 동물이 되라 하신 이
겨울잠인지 동안거인지
봄이 될 때까지 기다리라 하신 이
그 닫힌 문을 향하여
신이 사라지고 발이 닳고 닳도록
무작정 걸어 왔으나
쓸데없이 길어진 팔
붉은 혀의 꽃밭 같은 손은 문고리에 닿을 듯 말 듯
봄이 오지 않기를 기도했네
차라리 삭풍에 매 맞는 것이 행복하다고
미치지 않으면 저럴 수 없다
눈사람
말씀 대신 서 있네
믿느냐
나호열
하냥 높은 산에 올라 밑도 끝도 없이 세상을 향하여 외쳤던 그 말
벗에게 귀 간질이며 했던 그 말
그녀에게 일생을 던지며 울먹였던 그 말
도끼로 내려치듯 하늘이 쩌엉쩡 깨지는 어느 날의 우레처럼
그 말을 오늘 듣는다
문 밖에 그 기척
걸레가 된 신발이 끌고 온 길은 세월이 삭제된 테이프처럼
바람이 가득 차 있다
믿느냐
진즉 나에게 물었어야 할 그 말
벙어리 폭설로 그 죄를 묻고 있다
강화도 하점면 부근리 고인돌 2011.01
강화도, 1월
나호열
온통 바람 밭이다
말의 씨앗
한 자리를 맴돌고 있는 발자국들이
이랑 위로 돋아 오르려고
사위를 둘러싼 칼과 채찍 즐겁게 맞아들이는 동안
점점 더 커져가는 내 귀는
오래 전 잃어버렸던 그 말을 번역하려고
허공에 하염없이 그물을 던졌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잠깐 일 만 년이 지나갔다
울컥,
한 마디 문장이 빗장을 여는 듯
기러기 떼 노을을 추운 마을 쪽으로 끌고 가고 있다
-『우리詩』2013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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