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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풍경 너머의 풍경

정림사지 5층석탑

by 丹野 2013. 1. 8.

 

[테마있는 명소] 정림사지 5층석탑--긴 잠 깨어난 ‘사비 백제’의 숨결

헤럴드경제 | 입력 2013.01.03 09:21 | 수정 2013.01.03 09:30

 

     

     

    [헤럴드경제: 부여=남민 기자]부여 읍내 한복판에 자리한 정림사지를 찾았다. 규모가 큰 사찰도 아니고 고작 사찰터를 찾다니?


    처음엔 나 자신도 이런 의문점을 가졌다. 말로만 들어온 정림사지, 그러나 부여에서 백제를 관광하고 느끼다 보면 정림사지 5층석탑을 꼭 봐야하는 명소임을 깨닫게 된다. 굳이 문화답사가 아니더라도, 가벼운 마음의 여행일지라도, 가장 백제다운, 가장 부여의 백제다운 혼과 모습이 이 5층석탑에 농축돼 있기 때문이다.

    서기 660년 7월18일, 백제가 패망하던 그날 이후 정림사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5층석탑 하나만 달랑 남기고 모든게 사라졌다.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불과 70년 전(1942년), 긴 잠에서 깨어 1280여년의 후손들 앞에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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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여시대의 백제의 숨결을 가장 잘 보여주는 정림사지 5층석탑

    정림사지(定林寺址)는 왕궁이 있던 부소산과 정남쪽 궁남지의 중간 지점에 있다. 일단 왕궁 바로 앞의 사찰이고 보면 백제왕조와 어떤 식으로든 연관이 있을 법하다는게 학자들의 평가다.

    백제는 전쟁에서 패망했고 국민은 신라로 편입됐다. 안타깝게도 많은 백제의 유산들은 소실 등으로 사라졌다. 이 정림사도 무려 1주일간 검은 연기를 뿜으며 불에 탔다고 한다. 정문으로 들어서는데 바로 앞에 '백제초등학교'가 보인다. 순간 묘한 느낌이 든다. 패망한지 1352년이 흘렀고 수많은 흔적이 사라진 지금 백제초등학교라는 간판이 왠지 홀로 살아남은 백제의 후손 같은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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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림사지 박물관 정문

    정림사지에 오면 볼 것은 딱 3가지 밖에 없다. 정문 입구에 들어서면 만나는 정림사지박물관과 아래쪽의 5층석탑, 그리고 석불여래좌상이 그것이다. 추가한다면 석탑 앞쪽의 연못 정도가 전부다. 그러나 내용면에서는 이를 압도한다.

    박물관에는 융성했던 백제의 불교문화와 백제인들의 삶, 그리고 인도에서 시작해서 중국을 거쳐 들어온 탑의 변천사 등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절터에서 발굴된 백제와 고려때의 유물도 전시돼 있다.

    그런데 정림사라는 절 이름은 사실 고려(1028년, 현종)때 지은 것으로 밝혀졌다. 그 이전, 즉 백제시대에는 정림사였는지 다른 이름이었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석탑 하나만 남기고 흔적없이 사라진 절을 고려시대에 다시 지었고 고려인의 작품으로는 석불좌상 하나만 추가로 남기고 또다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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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층석탑은 일반인이 봐도 안정감 있고 단아하면서 예쁘다는 느낌을 준다. 이곳에서 백제문화를 공부하고 해설해주시는 오가야 마사코(鋸屋 正子) 선생님은 "당시 백제는 인도와 중국으로 건너가 탑에 대해 배워왔는데 특히 중국으로부터는 목탑기술이 들어왔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 목탑은 화재에 치명적으로 약해 목탑의 기술에 석탑의 완성품을 만들어냈다고 한다. 이 작업은 그 만큼 더 어려웠고 더 진보된 기술이었으며, 이는 후에 신라와 일본으로 기술을 전수하게 된다.

    그러니 이 5층석탑이 화려했던 백제 탑 기술의 결정체로 이웃 나라들에 이 선진기법을 전수했다는데 의미를 두고 보면 좋을 듯 하다. 백제시대의 탑은 현존하는 것이 거의 없다. 이 정림사지 5층석탑은 국립부여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금동대향로와 함께 가장 부여의 백제다운 혼의 결정체로 꼽힌다.

    오가야 선생님은 탑에 다가가서 흐릿해서 보일 듯 말 듯한 글씨를 가리키면서 나당연합군의 중국측 장수 소정방이 글을 새긴 것을 설명해 주었다. 1층 탑신에는 '당나라가 백제를 정복했다'는 소정방의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이로 인해 한동안 '평제탑(平濟塔)'이라는 치욕적인 이름으로 불렀다고 한다. 하지만 탑 1층에 새겨진 소정방 기공문을 보면 백제시대 건립한 탑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기공문 마지막 부분엔 '현경 5년(660년) 8월15일에 세우다'로 돼 있으며 '660년 7월18일 항복'으로 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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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정방이 새긴 전승 기념 글자

    이 탑 뒤쪽에는 금당 자리가 있는데 흙을 높이 쌓아 정리해둔 터만 남아있다. 그 뒤쪽엔 원래 강당이 있던 자리로 전각이 세워져 있으며 여기에는 고려시대의 거대한 석불여래좌상이 있다. 그러나 여느 석불상과는 달리 이목구비 등이 뚜렷하지 않고 형체만 살린 조금 어설퍼 보이는 느낌이다. 덩치에 위압감을 느끼기에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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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시대 작품인 석불여래좌상

    다시 탑 앞으로 나와 정면으로 걸어나가면 작은 연못이 있다. 직사각형의 연못에 가운데 좁은 길을 냈다. 옛 정림사 시절엔 이쪽 앞쪽에 정문이 있고(지금도 문은 있다) 이 정문을 통해 연못을 건너 여러 문을 거치며 5층석탑과 강당으로 향하는 구조란다. 여기서 백제 사찰의 남북 일직선상 가람배치와 조경문화도 엿볼 수 있으나 상상으로나 가능한 일이다. 이에 대한 복원물은 이곳 박물관에 축소해 전시해 두고 있다.

    가까운 곳에 국립부여박물관과 부소산성, 구드래 나루터, 그리고 궁남지 등이 있어 함께 둘러보면 '부여의 백제'를 느끼는데 멋진 경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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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못을 지나 5층석탑 그리고 전각이 일직선상으로 가람배치했다.(왼쪽 사진)

    ■ 정림사(定林寺)

    : 정림사는 백제가 도읍을 웅진(공주)에서 사비(부여)로 옮겨오면서 건축한 '부여의 백제'의 대표적인 사찰이다. 소실 등으로 백제 당시의 절 이름이 기록에 남아있지 않아, 소정방이 탑에 새긴 글을 빌어 '평제탑(平濟塔)'이라 불렀으며 1942년 발굴 때 '태평팔년 무진 정림사 대장당초(太平八年 戊辰 定林寺 大藏當草)'라고 적힌 기와조각이 발견되면서 정림사로 부르게 됐다.

    하지만 부여로 천도한 성왕은 당시 중국 양나라 무제에게 사찰건축 기술자들을 파견하는 등의 기록으로 봐서 양나라의 정림사 이름을 따 백제시대때에도 정림사로 불렀을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고 한다.

    suntopia@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