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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향기로 말을거는 詩

붉은 시편(詩篇) / 이경교

by 丹野 2012. 12. 10.

  붉은 시편(詩篇)

 

     이경교

 

 

 

   중국에 머문 내내, 헝가리 영화 <붉은 시편>이 떠오르곤 했는데 총칼 앞에 집단 나체로, 붉은 꽃 리본으로 저항하던 헝가리언들, 내 몸을 헝가리언 랩소디 가락이 칭칭 휘감아, 나도 붉은 눈물 왈칵 쏟고 싶었다

 

   무지개다리 붉은 벽돌, 반달처럼 허리가 휜 곡선 앞에서 붉은 벽돌과 단풍 사이에 얽힌 어떤 비의(秘義)를 읽는다

   어느 땐가 단풍은 벽돌 속으로 스며 벽돌이 되었다고, 벽돌빛은 오랜 세월 밖으로 뱉어낸 단풍의 호흡이라고

 

   늦가을 창가에서 노을을 본다 내 안에도 가만가만 불씨 한 잎 지펴져 벌겋게 번진다 핏빛 중국 역사를 떠올리다가 황해 건너 반도 소식 궁금해진다 잿빛 하늘로 핏방울처럼 번지는 노을, 저 번짐을 나는 붉은 시편이라 고쳐 부른다

 

   일출과 일몰 사이 황해가 서 있듯, 사랑하고 죽는 거리 저만큼 가까운 걸까

 

   시간의 결 거슬러 오르면 붉은 벽돌과 단풍이 한 몸이던 것처럼, 이우는 저 태양도 말을 하던 시절이 있었던 모양, 입술 벙긋벙긋 새어나온 한 마디 말, 그게 일몰은 아닐까

 

   붉은 시편 한 행을 마침내 읽었다 

 

 

 

 —《시사사》2012년 9-10월호 

 

 

 

이경교 / 1958년 충남 서산 출생.

1986년 《월간문학》 신인상 당선.

시집 『꽃이 피는 이유』『달의 뼈』『모래의 시』등.

시 해설서 『한국 현대시 이해와 감상』.

명지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