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바람의 궁전
나호열 시인/세상과 세상 사이

전쟁과 평화의 길을 가다 / 나호열

by 丹野 2012. 6. 26.

 

전쟁과 평화의 길을 가다

나호열

 

한 두 번 지나가는 길이 아니건만 새로이 길을 밟을 때 마다 풍경은 바뀌어 있다. 구불구불했던 옛길은 다림질하듯 직선으로 펼쳐져 있다. 강원도 산간의 길도 예외는 아니어서 한나절이 걸려야 닿을 수 있던 곳도 서너 시간이면 너끈하게 당도한다. 옛길은 강을 따라 동무하듯 이어지고 높은 산을 넘을 때는 사람도, 차도 조신하게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으나 오늘의 길들은 터널로, 교량으로 이어져 속도와 효율성을 자랑한다. 그러나 조금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오늘의 길들은 인간의 교만의 상징이라는 숨은 뜻을 불쾌하게 품고 있다. 길이 험했을 때에는 사람들의 걸음걸음은 조심스러웠고, 자연의 뜻을 거스르지 않으려는 기색이 역력했으나 오늘날의 인공의 기술은 안전이라는 효능을 과신한 나머지 오히려 안전을 도외시하고 자연을 일상의 배경쯤으로 치부하는 못된 습관에 길들이게 한다.

 

17년 전, 이맘때쯤 김용은 박사와 나는 설악산 자락 어드메쯤에 여장을 풀고 옛길을 더듬고 있었다. 나는 평안이 보장된 울타리를 벗어나 새로운 도전을 향해 걸어갈 때였고, 김용은 박사는 힘든 공부를 마치고 막막한 미래를 뚫고 나가야 할 모색의 시간을 맞이할 때였다. 누구에게나 그러하듯이 마음가는대로 미래는 다가와 주는 법은 아니어서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던 것 같다. 저녁 무렵 찾아간 청간정은 우뚝 서 있었으나 비에 젖어가는 그 모습은 우리의 모습을 닮아 있었다. 관동팔경 중의 하나였다는 과거 속의 정자, 비오는 저녁 그 누에 올라 대책 없이 전개될 삶에 대해서 바다에게 물어 보았으나 막막하기는 바다도 마찬가지여서 바다는 말없이 오징어잡이 배를 보여주었고, 인간의 눈물겨운 노동을 가물거리는 오징어배 불빛으로 보여 주었으며, 그 불빛은 처연한 눈물로 투영되어 되돌아왔다. 그 옛날 이 정자에 올라 시를 읊고 풍경을 음미한 사람들은 농민도, 어민도 아니었으리라.

 

죽은 채로 이렇게 살겠다

불끈 쥔 주먹 같은 숯 검덩이 가슴 같은, 아니,

시커멓게 타버린 눈물 같은 솔방울 몇 개 달고

철 안든 대나무 곁에 서 있다.

두 눈에 불을 켜고 바닷속을 뒤집는 오징어배의 노동이

허약한 팔뚝에 낚싯줄처럼 걸리고

수평선에 목매고 싶은 그런 여름은 가고 없다

논에 김매러 갈 시간, 정신없이

땅에다 잘못도 없이 고개 조아려야 하는 사람들 사이에

시인들은 정자에 앉아 무엇을 생각했을까

사표 쓰고 막막히 떠나와서

이제야 말을 버린다

바다의 몸짓처럼, 쌍욕처럼

토악질하듯 정처없는

말을 버린다.

마지막 목구멍으로 치밀어 오르는

사랑한다

그 말도 버린다.

                                                  졸시 -「청간정에서」전문

 

그 다음 날도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다. 6.25 전쟁 이후 수복된 접적지역에 위치한 건봉사는 마악 민간인 통제구역에서 해제된 탓에 탐방객들은 찾아볼 수 없었다. 우리나라 4대 사찰에 꼽힐 만큼 거찰이었던 건봉사는 전쟁통에 다 허물어지고 총탄 자국이 일주문에 선연히 남아있을 만큼 처연한 모습이었다. 물어 물어 건봉사에 들어갔을 때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새롭게 조성하고 있는 멀끔한 절간이 아니라 광막하게 비어있는 폐허였다. 푸르르게 잡풀들이 이름 모를 풀꽃들을 피워내고 그 사이사이로 빗줄기가 내려꽂히던 너른 공터에서 폐허가 주는 적막함과 더불어 세우고, 파괴하고, 다시 세우는 우리 삶의 비의를, 앞으로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을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내 몸과 마음을 낮추는 것.....그리고 그 해 여름이 가기 전, 한 편의 시가 마음 속에 새겨졌다.

 

 

온몸으로 무너진 자에게 또 한 번 무너지라고

넓은 가슴 송두리째 내어주는 그 사람

봄이면 이름 모를 풀꽃들에게 넉넉하게 자리 내어주고

여름에는 우중첩첩 내리쏟는 장대비 꼿꼿이 세워주더니

가을에는 이 세상 슬픔은 이렇게 우는 것이라고

풀무치, 쓰르레미, 귀뚜라미

목청껏 울게 하더니

겨울에는 그 모든 것 쓸어 담아 흰 눈으로 태우는

건봉사, 그 폐허

나도 그에게로 가서

그대의 폐허가 되고 싶다

아무렇게 읽어도 사랑이 되는

사랑을 몰라도 눈물이 되는

바람의 집

그대의 종이 되고 싶다

                                                           졸시 「건봉사, 그 폐허」 전문

 

 

서울에서 통일전망대 방향으로 길머리를 잡으려면 오르고 내려야 하는 길이 진부령이다. 태백준령이 바닷바람을 막아 겨울이 길고 눈이 많은 내륙지역은 황태덕장으로 안성맞춤이어서 한계령 갈림길을 지나 고개마루에 이르기까지 줄지어 서 있는 덕장들과 상점들을 만날 수 있다. 고개마루에는 상설 미술관도 있고, 한 때 우리나라 최고의 스키장으로 명성을 날렸던 알프스 스키장의 을씨년스러운 폐장의 풍경도 만날 수 있다. 동해바다에서 자취를 감춰버린 명태가 동태가 되고, 그 동태가 황태가 되듯이 우리의 일생도 수없이 모습을 바꾸어간다. 남을 배려하지 않고, 베품을 모른 채 일생을 마감하는 자신만의 안락을 꿈꾸는 ‘배고픈 부자’가 많다는 어느 심리학자의 일갈이 진부령 고개를 넘을 때마다 가슴 한 구석을 콕콕 찌르는 것은 이순의 나이에도 아직 성숙의 가능성이 있다는 징조가 아닐까하는 희망이 남아있기 때문일까......

 

언제면 나도 황태가 될 수 있을까요

비비꼬인 사랑과 미움의 내장 해탈하고

죽어서도 말하고 싶은 천형으로 목구멍에 말뚝 박히고

매운 바람과 눈 맞으며

언제면 나도 철들 수 있을까요

이 세상 어디에도 맞지 않는 초점

죽어서도 죽도록 두들겨 맞아

그대의 시원한 입맛으로 한순간

보시할 수 있을까요

                                                                                    졸시「진부령을 넘으며」전문

 

 

 

출처 / 세상과 세상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