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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나호열 시인/세상과 세상 사이

킹스톤에서 하루 / 나호열

by 丹野 2012. 3. 2.

 

                                                                                                                                     * 호접란

 

킹스톤에서의 하루 - 나호열

 

1. 촛불을 켜며

 

   저녁 식탁에 혼자 앉아서 책을 읽을 때나 와인을 마실 때, 편지를 읽을 때 촛불을 켠다. 촛불이 만들어내는 너울거림, 그림자와 음영이 가져다주는 펄럭임이 불필요한 시선을 삭제해주고 명징과 혼돈 사이의, 빛과 어둠의 경계를 부드럽게 나누어주기 때문이다. 일 주일의 여행기간 동안 빨간 양초 두 자루가 늘 내 곁에 있었다. 암호화된 카드를 넣어야 열리는 호텔의 방문, '이리 오너라!' '나야, 문 열어!'와 같은 살 겨운 외침이 없어도 그 문은 무뚝뚝하게 열리고, 왈칵 어둠을 쏟아내면 나는 전등 대신 초에 불을 당겼다.

 

  수없이 불러보는 나의 이름과 뒤로 사라져버린 시간들의 틈새로 촛불은 바구니 속에서 고개 숙이는 장미 꽃잎으로 가만가만 나를 대신해서 울어 주었다. 슬플 때 울지 않고, 기쁠 때 웃지 않고 슬플 때는 웃고, 기쁠 때 눈물 흘리는 또 하나의 단단한 가면이 이국의 검푸른 어둠 속에서 그렇게 차곡차곡 내려 쌓이고 있었다.

   나는 촛불을 켜고 시를 쓰고, 편지를 썼으며 한 켜씩 떨어지는 그 빛 속에서 육신의 아름다운 마멸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우리의 생명이 잠시 숨결을 멈추는 촛불처럼 쉬임이 있던가

 

 

2. 킹스톤 가는 길

 

   속력을 올리면 차는 부르르 온몸을 떨었다. 길은 넓게 열려 있었으나 아무래도 바퀴 쪽에 이상이 있는 듯 싶었다. 타이어의 압력이 일정하지 않거나 균형이 맞지 않을 때 생기는 현상으로 생각되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어 그저 무사히 운전을 마칠 수 있기만을 기도하면서 떨리는 운전대를 움켜쥐었다. 바퀴가 이탈하면 어떻게 하나, 왼쪽 바퀴 하나가 떨어져 나간다면, 앞바퀴 두 개가 동시에 떨어져 나간다면 어떤 사태가 발생할까? 우선 거울을 통해서 뒤따라오는 차량의 흐름을 파악하고, 재빨리 갓길로 차를 빼야하며, 동시에 비상등을 켜고, 급브레이크를 밟으면 안 된다. 시속 90킬로에서 100키로 사이에서 들려오는 마모음이 경고하는 의미를 되씹으면서 내 삶을 해체시키는 요인들에 대해서 오랜만에 경건하게 무릎을 꿇었다. 해체는 집착이 강할수록 급속하게 진행된다. 명예에 대해서, 부에 대해서, 안락에 집착하면 할수록 그것으로 말미암아 부서지는 삶을 무수히 보아 왔다. 인생의 굽이굽이를 돌아오면서 이제는 텅 빈 겨울 들판 같은 내일이 버티어 서 있다고 해도 두렵지 않은 나이가 되었다는 말인가?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지금 나는 기계의 완고함과 매커니즘에 안도하면서 이렇게 가슴을 벌름대고 있지 않은가? 이 세상에서 가져가야 할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알면서 어떤 집착에 나는 몸을 기대고 있다는 말인가?

 

 

   유람선은 시간이 맞지 않았다. 바다와 같은 너른 호수 사이에 떠 있는 섬을 바라보고 노을을 바라보기에는 돌아가야 할 시간이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손바닥만한 도시를 누비는 시티투어 버스를 기다리며 의자에 앉는다. 옆에 있어야 할 나의 그림자, 촛불로 타오르는 손길이 자꾸 어깨 근처에서 흘러내렸다. 늦봄의 바람은 스쳐 지나가는 한 여행자의 꿈처럼 눈에 물기를 담아낼 뿐, 나는 거기에 있었으나 나는 부재중이었다. 시청 앞에서 버스가 출발하고 50분 동안, 작은 도시의 골목길을 누비면서 노랑머리의 젊은 여자 가이드는 한시도 쉬지 않고 150년이 채 안 되는 그 도시의 과거와 현재를 내가 해독할 수 없는 낯 선 언어로 토해내고 있었다. 차라리 나는 꾸깃꾸깃해진 한 편의 시를 내 옆에 보이지 않게 앉은 그에게 보여주고 파파라치에 대해서, 폐광과 늙은 여자의 그로테스크한 대비를 한국어로 이야기하는 것이 더 행복했는지 모른다. 하루 종일 나와 동행했던 죽음에의 공포와 관음증에 노출된 윤리와 회귀해야 하는 시간의 유효성은 나와 함께 하면서도 좀처럼 그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물어보라, 그대가 벤취에 앉아 응시한 저 쪽에 누가 있었는가? 한 장의 사진 속에 그대를 담아주기 위해서 누가 빛나는 그대의 생애의 셔터를 눌러 주었는지 물어보라

 

 

 

3. 정적 한 움큼

 

   그가 나에게 준 것은 정적이다. 나는 가끔 그에게로 가서 정적과 몸을 비빈다. 정적은 단순한 숨죽임이 아니다. 정적은 운동의 정지가 아니며, 페허의 잔영이 아니다. 가장 원초적이면서도 삶의 원동력이 되는 숨결이 그 속에 있다. 언어의 그물을 뚫고 나오는 싹이며 가장 보잘 것 없는 생명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다. 건봉사나 회암사 절터 폐허에서 만나는 정적은 참 아름답다. 신 새벽 황토 숲길에서 만나는 정적이나, 이별을 예감하며 잠깐 깜박거리는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도 아름답다. 내년에 꽃 피우기 어렵다고, 장담 못한다고 누구의 스승이 되지도 못하는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하라고 제자가 보내온 호접란 한 盆이 두 달이 넘도록 꽃 피어 있는 모습을 몇 시간을 싫증내지 않고 바라볼 수 있는 것도 정적의 힘이다.

  정적은 건너갈 수 없는 강이며, 너무 높아 올라갈 수 없는 산이며, 아직 읽어낼 수 없는 삶의 경전이기도 하다.

 

  나는 정적을 덮기도 하고, 발길로 차기도 하며, 정적을 펼쳐 세상과 장막을 치기도 한다. 정적으로 밥을 먹고, 정적의 향기를 맡고 풍선처럼 정적을 이 똥막대기에 가득 채워 스모그 가득한 하늘 위로 밀어보기도 한다.

 

  그가 나에게 준 것은 정적이다. 정적과 대화를 해보았는가? 영어, 일어, 중국어 어느 언어로도 정적과 대화를 할 수는 없다. 수화나 점자를 동원해도 그것은 마찬기지이다. 도(道)라고 해도 기(氣)라고 해도, 열반이라고 해도 상관이 없다. 정적은 내가 인식하는 만큼만 나에게로 온다. 부피로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부피로, 무게로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무게로, 너비로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너비로 다가온다.

  그 정적은 나이가 마흔 아홉이고, 66 킬로그램의 무게와 173센티미터의 신장을 가졌다.

 

 

 

4. 사랑하기 위하여

 

   나는 우민(愚民)이면서 나는 우민(憂民)이다. 세상은 더럽고, 누추하고, 오물 덩어리 같다. 그 오물을 몸에 묻힌 채로 참 오래 살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더럽다 더럽다 외치면서 나는 브루조아의 달콤함을 잊은 적 없다. 세금 꼬박꼬박 내면서 그 돈이 어디로 흘러가는 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남북이 통일되어야 하는데, 세상은 해체되고, 해체된 이성은 이제는 제멋대로 갈 길을 가는데, 나는 브루조아가 아닌데, 이제는 꿈에서 깨어날 때도 되었는데, 우리 애들 보다도 철이 부족하다. 시인이라면 적어도 불의의 세상에 돌멩이 하나라도 날릴 수 있어야 하는데, 취로봉사 나가는 구부정한 노인들의 옆을 매연을 풍기며 지나가는 아침에도 나는 꿈만 꾸고 있다. 할 말이 많은 것이 시인의 첫 번 째 자격인데, 변혁과 혁명과 미의 찬미자 이어야 하는데 내가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한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사랑에 대해서 탐구하는 일 일 뿐이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은 네가 아름답기 때문이 아니라 네 옆에 내가 서 있을 때 내가 아름다워지기 때문이고, 네가 내게 필요한 것은 내가 네 곁에 서 있을 때 네가 아름다워지기 때문이다.”

 

 

   내가 해놓고도 잊어버린 말을 어느 학생이 다시 내게 들려주었다. 몇 해 전 봄 학기 강의 때였을 것이다. '딱딱한 철학 얘기 집어치우고 사랑 얘기나 합시다' 라고 떼쓰는 학생들에게 아무 생각 없이 떠든 이야기를 용케도 기억하고 있는 그 학생에게 나는 은연중에 나의 시 쓰기의 일단을 보여준 것은 아닐까 싶다. ‘사랑은 죽음으로 완성된다’ 이 말은 어느 시집의 짧은 글에 수록했던 기억이 나고 사랑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하면서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영원히 향유할 수 없는 인간의 이상일지 모르기 때문에 그 비극성이 두드러지는 것이라고 나는 느낀다. 마더 테레사처럼, 아우슈비츠의 유대인들을 구해 내려고 전생을 바친 독일인처럼, 불특정 다수를 향한 선행, 예수나, 석가모니나 공자같은 성인들, 그 모두가 인간임을 안간힘을 쓰며 찾아내려고 했던 구도자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욕망의 분출이 왜 금기시 되어야 하는가? 그들 또한 상대방을 향해서 형극의 사막을 걸어가는 순례자가 아닌가? 정의를 내리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멀어지는 관념이 사랑이다. 그래서 나는 끈질기게 인간의 유전자에 달라붙는 그 관념에 대해서 말을 걸고 싶어진다.

 

 

   절친한 시인과 장충동 족발 집에 간 적이 있다. 무엇이든 잘 된다 싶으면 너도나도 원조의 간판을 내어 단다. 냉면, 갈비, 아이들이 좋아하는 떡볶이, 설렁탕, 순두부..... 원조를 좋아하는 한국인의 내밀한 욕구는 무엇일까 잠시 생각해본다. 가짜에 너무 많이 속았다는 것이다. 국민을 위한다면서 사리사욕을 채운 정치 지도자들, 배움 따로 실천 따로인 지식인들, 그러고 보니 나도 가짜 시인일 지 모른다. 등골이 오싹해지면서 손님들로 가득한 첫 번 째 집에 주차를 부탁했다. 손님이 많아서인지 내다보지도 않고 문전박대다. 저 만큼 아래에서 어느 아주머니가 손짓을 한다. 차를 옮기고 족발을 먹으면서 그 시인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세상을 모나게 산다는 것은, 내가 모남으로서 타인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요?. 둥글게 산다는 것은 세상을 적당히 살자는 게 아니라 적어도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 만큼 둥글어져야 한다는 거지요’ 나는 반성한다. 올바로 걸어간다고 하면서 나는 타인들에게 많은 상처를 주었다. 사랑은 직접적인 대상을 향해서 가는 것이기도 하지만, 간접적으로 이 세상에 영향을 주는 것이기도 하다. 계산을 마치고 나오는데 주인 할머니는 이렇게 인사를 했다.

 

  ‘고맙습니다. 다음에 또 오세요’ 가 아니라 ‘고맙습니다. 맛있게 드셨습니까? 손님, 돈 많이 버세요’ 의례적인 인사가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씀 ‘돈 많이 버세요’ 이런 말은 처음 들었다. 돈을 주는 것이 아니지만 그 인사말은 며칠 동안 내 머리에서 나를 즐겁게 해주었다. 시가 무엇이란 말인가? 시를 쓰는 내가 즐겁고, 내 시를 읽는 독자들이 즐거우면 나는 그들에게 무량의 사랑을 주는 것이다. 어느 시를 쓰고 난 후 30분이 즐거운가 하면 어느 시는 하루가 가고, 삼일 동안 기분 좋아지는 시가 있다. 그러나 일주일이 기분 좋고, 한 달이 기분 좋아지는 시를 아직 나는 쓰지 못했다. 그러므로 나는 아직 시인이 아닌 것이다.

 

 

 

 

5. 촛불을 끄며

 

   742호의 촛불을 쓰면서 742호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742호는 무엇인가? 어디에 있는가? 아파트 호수인가? 아니면, 병원의 병실? 객사? 나는 사랑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본다. 사랑이라는 행위의 분출은 어디서 비롯되는가? 나는 단언코 말할 수 있다. 그 모든 희생을 감수해도 두렵지 않은 마음이 사랑의 첫 출발이다. 목숨을 내놓고도 불안해하지 않는 그 마음이 없다면 그 사랑은 가짜다. 올초에 金時羅 시인이 작고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거지들의 삶을 그린 품바를 기획하고 민중들에게 마당극으로 알린 인물이다. 대학로에서 그의 추모공연이 있어서 간 김에 머리에 남는 대사 하나를 옮겨 적는다. 거지 왕초가 거지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거지 왕초 : 너희들 거지에 대해서 정의를 내려 봐라!

      …중략

    거지 왕초 : 거지란, 있는 사람들에게 베푸는 연습을 시키는 사람을 말한다. 알았냐?

 

 

 

  거지 아닌 존재는 없다. 우리는 서로 서로 구걸하는 존재다. 갈구만 하고, 소유만을 요구하는 것은 사랑이라고 할 수 없다. 742호의 촛불은 742호의 장소성에 따라서 여러 갈래의 심상을 불러일으킬 것인데, 나의 의도를 이 땅의 광인狂人 송명호 시인은 적확하게 짚어내어 이런 글을 보냈다. 모골이 송연할 만큼 그는 예리하게 나를 찾아내었던 것이다. 그래서 가짜 시인은 언제든지 탄로가 나기 마련이다.

 

  이 시는 빠스쩨르나끄의 「의사 지바고」를 연상시킨다. 지바고는 라라가 잠들었을 때 그녀와 그녀의 딸 옆에서 울면서 기도한다. ‘신이여, 이 아름다운 여인이, 이 순결한 것이 모두 저의 것입니까’

작품에 나타난 라라는 러시아 대지를 상징하고 러시아 대지는 시인 철학자를 사랑한다 뜻의 지바고를 사랑한다. 이 시에서의 촛불은 시인의 고결한 내면을 비추는 불꽃이다

  그의 글을 읽고 나는 확실하게, 내가, 아직까지도 가짜 시인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의사 ‘지바고’의 기도를 읽고 그 아름다움에 반해 끝내 러시아어를 독학했다고 밝히고 있다. 나는 촛불을 끈다. 얼마간은 말을 잃어버릴 것 같다.

 

출처 / 김창집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