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상투적 세계를 노래하는 것은 가능할까
----최근 시의 경향과 한 늙은 시인의 모색
김만석 editor@kyosu.net
지석철,「 부재」, 캔버스에 유채, 53×70cm, 2001.
저 투박하고 물질적인 바위 역시 사실은 자연이 빚은 빈 의자일 것이다. 화가가 그려낸 인위의 빈 의자가 ‘지금 여기 없는’ 존재를 끊임없이 환기한다면, 시인들의 세계는 어떤가. 평론가 김만석은 최근 시적 경향들이 의자를 둘러싼 일종의 모험을 벌이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늙은 시인의 시적 모색을 조명한다.
넘어진다. 문턱에 걸려 넘어진다. 사위는 분간되지 않는다. 비로소 그는 말을 시작한다. 그의 말은 넘어진 말이다. 넘어져 일어나 비틀거리며 균형을 잡지만, 그의 말은 더듬거리며 흘러나올 뿐 문장의 규범적 체계와 규칙에 딱 맞게 부합되지 않는다. 넘어진 말, 시인. 하물며 그가 이 세계에 오래 산 자일수록 더 빈번히 넘어져 일어나기조차 힘든 사태에 직면하기 일쑤라면, 넘어지지 않는 시인은 아직 말을 너무 잘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가 적절한 방향과 속도를 가늠하여 나아갈수록 더 가혹하게 더 혹독하게 넘어지고 있다면, 그의 말은 비명에 가깝고 그럴수록 말을 더 예민하게 발음하려 들 것이다. 무엇보다 그가 이미 시인으로 살아왔다는, 그리 놀랍지 않은 사실 탓에 넘어짐으로써 발음하는 말은 균형이 잘 잡힌 대지 위에 서있는 사람들이 알아듣기 힘들거나 혹은 알아들은 사람들을 기울게 만들고 넘어지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미리 경고해야 하지만, 거의 매번 그 표지는 어디에도 기록되는 법이 없다.
의자 위에서 넘어지기
그래서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책이나 시집을 의자에 앉아 읽는지 모른다. 의자야말로 존재를 지탱하는 안전한 지평이기 때문이다. 마치 플라톤이 침대로 포착했던 것처럼, 의자가 존재를 떠받드는 근원적인 무엇이기라도 한 듯, 의자는 넘어지지 않도록 균형을 잡아주며 존재의 위기를 지탱하도록 만든다. 하지만 의자는 안전을 보장하지만, 몸을 경직되게 만들고 운동을 중지시킨다는 점에서는 존재의 가능성을 폐쇄적으로 구성할 위험이 있다. 이 때문에 종종 책을, 서둘러, 미리 누워서 읽는 것인지 모른다. 특히 시집은 의자에 앉아 책상 위에 두고 읽기보다, 몸에 밀착하기가 훨씬 수월하다는 점에서, 더 사려 깊게 몸 위에 올리거나, 두 손으로 시집을 나비모양으로 만든 뒤 날아가는 말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면서 읽기도 한다. 그 무게가 먼저 읽는 사람들을 기울게 만들고 넘어지게 만든다고 할까. 누워버리거나 엎드리거나 의자로부터 넘어진 말과 더불어 넘어져 읽음으로써 세계가 기우뚱해지는 순간에 온 몸으로 시가 기어코 열어버린 그 세계에 참여하게 된다.
넘어진 말과 넘어진 세계, 시라는 넘어짐. 최근 시적 경향들이 의자를 둘러싼 일종의 모험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은 넘어짐과 관련된 흥미로운 지점을 드러내면서 시적 기울기의 형태와 방향을 가늠하도록 유도한다. 이는 시와 언어의 관계에 대한 문제를 근본적으로 다시 성찰하도록 만들면서 시가 과연 무엇인가, 시가 무엇이고자 하는가에 대한 물음으로 이끌어왔다. 예컨대, 2000년대 이후 시를 둘러싼 논쟁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는데, ‘미래파 논쟁’과 ‘시와 정치 논쟁’이 그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두 논쟁은 현대시에 관련된 다양한 문제의식들을 다시 창안하도록 촉구했고 어느 정도‘시’와 관련된 입장들을 구성하거나 재형성했지만, 시적 경향에 대한 논의를 새로운 국면으로 이끄는 데에는 실패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범박하게 말해 그 두 논쟁들은 기본적으로 미학과 정치라는 두 축을 경유하면서 이루어졌고 무엇보다 시를 어떤‘의자’에 앉힐 것인가로 나아가면서 제출된 질문에 답하는 것을 미뤘다고 할 수 있다. 시가 앉아 있던 의자가 흔들렸지만, 시가 나아가는 방향은 진단하는 게 더 불가능해졌다.
새의 노래는 아무래도 상투적이지 않다
흥미로운 것은 이 논쟁이 어느 정도 젊은 시인들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는 사실이다. 원천적으로 시인들이 일상적 세계의 봉합을 찢는다는 가정에 동의한다면 모두 젊은 시인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동안 보여주지 않았던 미학적 새로움을 통해서 등장한 젊은 일군의 시인들의 시 세계에 시단과 출판시장이 동시적으로 열광함으로써 이들 시에 대한 집중적인 조명이 이어졌고 일종의 흐름이나 경향을 형성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 때문에 시단과 출판시장과의 공모관계를 비판하는 논의도 없지 않았지만, 그조차 젊은 시인들의 시 세계에 대한 주의를 기울이게 만드는 효과로 기능했던 탓에 혹은 젊은 시인들 가운데 미학적 새로움보다 기왕의 서정적 전통을 계승하는 젊은 시인들을 주목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논쟁의 자리에 기왕의 시적 세계들이 자신의 몫을 가지지 못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마치 이들이 비평적 논의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처럼, 전관예우만을 하고 있는 것처럼 이들이 사라지고 없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물론 그렇다고 이러한 경향들에‘대항’해서 시력이 오래된 시인들의 시를 따로 조명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논쟁의 귀결이 일종의 시적인 것에 대한 승인 구조를 단절적으로 구성하려는 전략으로도 간주해볼 수 있다면, 기왕의 시인들이 열어 놓은 세계와 그 세계의 변화, 그 속에서 또 다른 세계를 창안하려는 노력들을 너무 쉽게 동일한 것으로 환원하는 오류를 범하거나 폐기처분하는 것은 아닌가라고 질문할 수는 있을 것이다. 아니, ‘서정’이‘자아’의, 말 그대로‘문제 영역’이고‘자아’가 사물과 세계와의 관계에서 모종의 운동을 수행하므로 상투적이라고 가정된 시적 형식조차도 변경되는 사회와 언어적 조건 위에서 구축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둬야 하지만 그러한 서정적 형식을 전통적인 서정적 경향이라고 비판하면서 해명하지 않는 것은 문제일 수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다른 방식으로 서정에 대해 질문하는 경로에. 대한 무지가 초래된 것은 아닐까? 조정권의『고요로의 초대』(민음사, 2011년)는 이러한 지점에서 하나의 지표를 제공해주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 시집은 1부와 2부로 이루어져 있는데, 1부가 시 혹은 언어 자체에 집중하는 시들을 엮었고 2부에서는 일상적 생활의 고통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시들이 배치돼 있다. 즉, 1부의 시들은 미학적 새로움에 응답하는 시적 경향들과 조응하고 있고 2부의 시들은 시와 정치에 관련된 질문들과 일정 정도 조응한다. 1부와 2부 사이에는, 독립돼 있지 않지만, 생태 문제에 관련한 시들이 배치돼 있어 이 시집이 언어, 자연, 사회를 매개로 미적인 것, 생태적인 것, 정치적인 것을 두루 포괄하고 있는 형식으로 간주하게 만든다. 그러니까, 이 시집은 최근 현대시를 둘러싼 다양한 담론들에 관련된 질문을 내재적으로 구축하고 있는데,‘자아’를 언어, 자연, 사회의 갈등적인 영역으로 만들면서 전투의 장소로 전환하는 데까지 이른다. 그는 기왕의 서정적 자아의 이미지와 그 언어를 경유하면서도 그 자아와 언어의 한계를 승인하여 자아의 이미지를 1인칭으로부터 이행하는 세계를 발견하는 데에 이른 것을 볼 수 있다.
요컨대, 시가 근원적으로 자아의 이행의 양식이라면, 비록 그것이 동일성의 체계라는 혐의를 지우기 어렵다고 하더라도, 이행이라는‘과정’에 관심을 모을 필요가 있을 터이고 그 과정이 어떠한가에 대해 집중적인 성찰이 요구돼야만 한다. 한 번의 넘어짐이 초래하는 자아의 파탄과 파국의 결과만으로, 그러한 방법적 시 쓰기(새로운 감수성)만을 초점화해 시의 경향성을 진단하고 미래를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하거나 특정한 경향들을 특권적인 방향으로, 허구적으로 이끌 수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조정권 시인이 도달한 바, ‘나’를 고립무원으로 이끌고 간 끝에‘그’를 만나고‘나’의 말을 침묵 속에 부려두는 법을 깨우치면서 시를 쓴다. 아니, 말의 부재 속에 깃든 시를 읽는 법을 보여주면서, 기록된 언어 너머에 존재하는 시를 듣게 만드는 경지에 이른다(「나는 나를 잠재우려 애쓴다」). 그런 점에서 그가 새의 노래를 들으면서 그 노래가 무엇이었는지 말하지 않는 것은 차라리 윤리적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새에게 준 시1」).
시인의 이러한 윤리적 태도는 일상적 삶의 영역에서도 세계를 따뜻하게 어루만지려는 데에서 다시 확인될 수 있다. 어떤‘어머니’가 막국수가게처럼 생긴 깃발을“보도블록 틈에 세워 놓고”국회의사당을 향해 노래를 부르는데, 신호를 기다리던 차들이 신호가 바뀌어도 지나가지 않는 것을 보고“저 노래를 밟고 지나갈 순 없다”는 공통성에 번쩍 눈을 뜬다(「1인 시위」). 시위를 하는 존재와 노래를 등치시키면서 그녀의 삶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쏟아내는 일을 자아의 위치에서‘결정’하는 것이 아니라“차들이 모두 서 있었다”라며 세계가 그러한 조건들을 이미 형성하고 있으며‘자아’는 고작“저 노래를 밟고 갈 순 없다”는 외부의 공통성에‘참여’하는 방식으로 제한한다. 자아에 대한 이 엄격한 태도는 그가 정신성의 높이를 오랜동안 구가해 왔기 때문에 가능하겠지만, 이 높이가 자아의 확장이라는 문제와 연동된 것이 아니라 외부와의 지속적인 긴장을 통해서 자아의 불가능성을 문득 만남으로써 이뤄지고 있음을 새삼 확인해야 한다.
너무나 고고한 세계 혹은 홀로 가는 길
하지만, 말을 아껴 말함으로써 침묵의 영역을 시에 보존할 수 있다는 믿음은 그러나 현실 자체에서 지속적으로 침묵하도록 요구받는 절망적 삶의 문제와 직면할 때 할 말을 잃게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즉, 말을 아껴 말하는 것은 자기의 고립을 통해서 관계를 절단하고 내부로 침잠해 들어가 비약할 때에나 가능한 일이지, 현실과 직접적으로 부딪는 과정에서 산출되는 다른 세계로의 이행은 모색하지 않는다. 그것은 너무 고고한 세계이고 오직 홀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이어서 그 말들을 감당하기는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득의의 경지이지만, 삶이 사막에 처해 있는 자들과는 결코 조우할 수 없는 사태가 초래되는 것은 아닐까. 말을 통해 세계를 열었지만, 세계를 버림으로써 말을 얻고 홀로 더불어 있는 기묘한 상태로 고립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지점으로 넘어진 말과 세계가 어디로 나아갈 수 있는지를 드디어 사고할 수 있는 것도 축복된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김만석 경성대 강사ㆍ국문학
2005년도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 당선. 시전문계간지 <신생> 편집위원, 미술문화잡지 <B-art> 편집위원.
출처 / 세상과 세상사이 -나호열의 시창작교실 자료
보문사 솟을모란꽃살문
우표에 대한 상처 / 조정권
옛날 나는 수신지 없는 곳에 나를 발송해버렸다.
나를 내 속에 봉인한 채
저 하얀 나비들과 함께
나도 모르는 곳으로.
나는 봉함된 편지처럼 길에서 떠돌았다.
나를 받아 봤다고?
나를 읽어냈다고?
(내 삶은 수신자가 없다)
얼음 덮인 산꼭대기
흰 구름의 거주자 그 윗분.
내 삶을 갓 뜯어 본 초록색 신록의 우표처럼 인정해 주신다면.
그 눈부신 흰색의.
나는 내 삶에 침을 발라
그분에게 발송했건만.
내가 보는 것은 무 장다리 밭의 흰 나비들 뿐.
나는 저 나비들을 하늘에 발송한다.
겉봉을 동여맨 꽃봉오리를 품고.
나는 나를 발송한다.
염소들이 즐거이 헤져 버린 저녁풀밭으로.
나는 나를 발송한다.
그러나 신 앞에서 나는 아직 겉봉이 봉인된
편지.
고백을 들어낸 이 가벼운 날개의 모순.
오랜 세월 나는 나를 발송했었다.
내 뒤통수는 세상을 떠돌았다.
나는 어느 날 발견될 것이다.
내가 반송되었다는 것을.
아직도 발송되지 않은 나의
겉봉.
이제 나는 나도 아니고 너도 아닌 ‘그’
‘그’라는 삼인칭으로 존재하고 있다.
나를 향해 이제
나는 이제 나는 나라고 말하지 않는다.
나는 그가 말한다고 말한다.
나는 이제 그가 말한다고 말한다.
- 출처 / 시원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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