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유하는 존재를 향한 서정의 시선
나호열 (시인)
시가 정보의 언어로 구성되었다 하더라도 시는 정보를 전달하는 언어게임으로 사용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 비트겐슈타인
시의 새로운 지평
오늘에 있어서 문학, 특히 시의 앞길은 탄탄대로인가? 몇 년 사이 인문학의 위기가 제기되고 이 위기를 타개할 방안이 군웅할거 했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인문학에 대한 관심과 탐구가 삶의 자존감과 가치를 고양한다고 소리 높여 외쳐도 여전히 인문학은 우리 삶의 변두리를 배회하고 있으며 삶의 중심부로 들어올 틈이 보이지 않는다. 한 예를 들어 보자. 시는 비교적 짧은 구조적 특성 때문에 신문이나 지하철 스크린 도어 등 우리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장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형서점의 시집코너는 뒷전으로 숨어들고 있으며 수많은 문학잡에 실린 작품들은 눈길 한 번 받기도 전에 지면에서 사라진다. 평생교육원이나 문화센터 등의 시 창작 강좌는 문학 인구의 저변 확대에 공(?)을 세우고 있지만, 전 세대를 아우르는 보편적 현상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여전히 한 쪽에서는 문학이(시가) 너무 어렵다는 대중화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고 그 반대편에는 문학(시)이 대중예술임을 거부하는 양가적 심리가 상존하고 있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면 오늘의 삶은 생각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아도 전혀 이상하지 않고, 불편해하지도 않는 세태 속에 놓여 있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어 보인다. 이런 까닭에 시 쓰기를 업으로 하는 오늘날의 시인들은 안팎으로 궁색한 국면에 놓여 있다. 우선 시를 써야만 하는 필연성을 끊임없이 확보해야 하는 부담감과 창작이 함의하고 있는 ‘새로움’의 경지를 개척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이겨내어야 하고 그 다음 자신의 창작품이 어떻게 세상에서 소모될 것인지에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 “새로움을 표상한 것만이 시적 진정성을 지닌 것으로 평가 받는다는 흐름 속에서 전통을 수용하면서 배반하는 이중의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는 갱신의 징후를 받아들여하는 과제( 「서정의 본질과 미래」, 하상일, 『리토피아』 2006년 겨울호)”는 시인이라면 마땅히 받아들여야만 하는 숙명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인의 괴로움은 위와 같은 질문을 자신의 내부로 돌릴 때 더욱 심화되기 마련이다. 창작이 필시 드러냄의 욕구에서 시작되기는 하지만 그 드러냄의 욕구를 추동하는 근저에는 알게 모르게 존재에 대한 예민한 촉수 -시인의 감각- 가 도사리고 있다. ‘존재’가 의미하는 바의 ‘항존성’은 변화라는 롤러코스터에 무참하게 흔들리기도 하고 한없이 몸 안으로 퇴적되는 시간은 기억으로 변용되면서 오지 않는 시간, 미래에로의 진군을 가로 막기도 한다. 이 지점에서 어느 시인은 전통적인 길을 따라 시적 자아를 세계에 편입시키기도 하고 또 어느 시인은 모험을 감수하면서 세계와 자아의 교섭 통로를 막아버리고 존재 그 자체에 대한 질문으로 환원시켜 버리기도 한다. 바로 이 지점이 시에 있어서의 대중성을 가름하는 분기점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우포늪을 들먹일 건 없겠다 제 어미의 자궁벽을 뚫듯
연잎의 주름을 찢고 창날처럼 솟아오르는
가시 뭉치들, 멀리서 보면
수면으로 대가리를 밀어 올리는 청둥오리 같은데
밤송이처럼 벌어지는 꽃받침 사이로
단 한 번 저렇게 빠져나오는
핏빛 꽃잎들
핸드헬드* 카메라로 찍어둬야 한다 시는
빛의 거친 입자 속에 살아 숨 쉬는 것이므로
공중에서 말라붙는
단 한 번의 죽음에 이르기 위하여
물샐틈없는 햇빛 속으로 솟아오르는, 주둥이 벌린 맹금류의
목구멍처럼 붉은
시
위의 시는 「너는 또 가시연꽃으로 피어나서」의 전문이다. 오정국의 시집 『파묻힌 얼굴』에서 드물게 ‘시’ 를 대상화한 작품이기도 하지만 .- 이 시집의 마지막 시 「파묻힌 얼굴」의 부제도 ‘또는 매장된 시’인 점은 잠시 유보해 놓기로 한다 - 이 시를 통과하지 않고는 『파묻힌 얼굴』을 즐길 수(?) 있는 행운을 누리기 힘들 것이다. 위 시의 핸드헬드*에 붙은 주석에 따르면 영화는 고정된 위치에서 피사체를 촬영해서는 안된다는 기법이다. 즉 움직이는 피사체야말로 존재 그 자체를 증명하는 것이므로 움직임이야말로 끊임없이 소멸하면서 새롭게 태어나는 존재 그 자체이다. 그래서 시인에 따르면 ‘빛의 거친 입자 속에 살아 숨쉬는’ 것이 바로 시이며 그 시가 향하는 곳은 ‘공중에서 말라붙는/ 단 한 번의 죽음에 이르는 행위’이다. 그런 까닭에 시 「파묻힌 얼굴」에서 드러나는 ‘파묻힘’은 시의 죽음이며 개체로서의 한 존재가 거역할 수 없는 피동의 상태를 의미한다. ‘어머니’는 한 생명을 잉태하였으나 그 잉태된 개체는 그 ‘어머니’에게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 타관을 떠돌던 한 개체가 되돌아 온 것은 진흙으로 봉해진 무덤 앞이다. 어쩌면 시인에게 있어서의 시란 엉덩이로만 빛의 윤곽을 느끼시는, 영원히 내가 돌아갈 수 없는 어머니이며, 이는 목마름이나 굶주림으로 물샐틈없는 햇빛을 받아먹으려는 행위의 부질없음과 닿아 있다. 요약해서 말한다면 시는 존재를 확인하는 움직임인 동시에 존재 그 자체이다.
시와 시집 사이의 언어
이 부질없는 행위가 존재의 목마름이나 존재의 해명을 가져올 수 없음을 알면서도 그 행위를 멈출 수 없는 것이 시인의 숙명이다. 그 누가 시인이 되어야 한다고 명령했던가! 프로메테우스나 시지프스가 걸머져야 했던 천기누설의 형벌을 기꺼이 감수하는 존재가 시인이란 말인가! 하여튼 오정국의 시집 『파묻힌 얼굴』은 시에 대한 시인의 확고한 심중을 헤아리지 못한다면 시 읽기의 즐거움은 커녕 그나마 가졌던 시에 대한 낭만적 환상을 여지없이 깨뜨리기에 충분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시집의 첫 편부터 시 읽기의 난해함에 빠져, 한 편 한 편 궁구해 들어갈 때마다 그마나 옹색하게 지니고 있던 시에 대한 여러 정의들을 무력하게 만들고 마지막 시에 이르러서는 더욱 오리무중에 빠져들게 만드는 매력(?)에 휩싸이게 될테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시 읽기의 어려움을 시인에게로 전가하는 것은 옳지 않다. 시 읽기의 즐거움은 시인이 파 놓은 함정을 피하고 미로를 헤쳐나가는 내공을 지닌 독자에게만 찾아오는 행운이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해도 오정국의 시, 아니 시집 『파묻힌 얼굴』의 감상은 골치 아픈 수학문제를 푸는 것만큼 어렵다. 시의 행간은 눈에 훤히 들여다보이는데도 깊이를 알 수 없고 일상의 문법으로 뛰어 넘을 수 없는 너비를 지니고 있다. 한 마디로 상식을 버리고 문법을 버릴 때만이 『파묻힌 얼굴』의 그림자를 붙잡을 수 있다.
한 편의 시가 그 자체로 완결성을 지니고 있다면 그 시들의 집합인 시집은 시인이 의도했던 아니던 간에 어떤 집합적 색깔을 띌 수밖에 없다. 한 편의 시가 가지는 층위는 시집으로 묶일 때 쌓아질수록 높아져가는 탑과 같은 것은 아닐지라도 시집이라는 전체의 부분으로서의 조각으로 기능함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어쨌든 참을성을 가지고 『파묻힌 얼굴』을 뚫고 나아간 독자는 데카르트가 열망해 마지않았던 명석하고 판명한 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의 허망함을 깨닫게 될 것이다. 적절한 비유가 될지 모르겠으나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세상은 사물(things)의 총체가 아니라 사실들의(facts) 총체’라는 판단은 『파묻힌 얼굴』을 받아들이는데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은 끊임없이 중얼거리고 있는데 그 중얼거림은 결코 대상을 향해가는 발화 發話가 아니며 오히려 자신의 내부로 향하는 본능적 외침에 가깝다.
나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머리 위로 구름이 흘러왔다... 장미의 이름을 부르면 장미가 피어났고/ 그 이름 부르지 않아도 /희고 붉은 꽃잎이 피었다 지곤 했다
시「‘나는 아무 것도’ 의 이야기」에서 거칠게 뽑아본 위의 인용문은 이성/감성, 주체/객체, 인간/자연 등과 같은 근대정신의 폐기를 암시한다. 차이 difference는 이것과 저것을 경계 짓는 중요한 기준이지만 이 차이를 인식하는 이성은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 얼핏 무력한 허무주의의 그림자가 지나간 것도 같지만 그것 또한 사실이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인과 因果의 법칙은 무력해진다. 생각해 보라! 인간이 있기 때문에 동물이 있고, 동물이 있기 때문에 식물이 존재하는가? 그러므로 이 인과의 법칙은 다음과 같이 수정되어야 한다.
존재는 부분으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부분의 전체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런 까닭에 이 시집의 첫 머리에 놓인 시 「 진흙을 빠져나오는 진흙처럼」은 이 세계와 존재에 대한 시인의 의식을 대변한다. 몸 하나를 버리고, 몸 하나를 얻는 변태의 주체는 어디에 있는가? 몸 하나를 지우고, 몸 하나를 살려내는 이 불가시의한 생명력을 프로그래밍한 아트만 Atman은 어디에 있는가? 진흙으로 대변되는 불가해성이야말로, 물과 흙이라는 이질적이면서도 상호보완적인 물질로 이루어진 진흙을 쪼개고 또 쪼갠 끝에 남는 허무가 아니라 진흙 그 자체로 ‘진흙을 빠져나오는 진흙처럼’ 온전히 받아들여야 할 경전인 것이다. 이 경전의 주재자인 시인은 무당도 아니고 심령술사도 아니다. 그러나 온갖 어려움과 유혹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형이상학 저 너머에 있을 신神 앞으로 나아가 무릎 꿇는 대신에 이 세상에 충만한 사실들의 기록에 열중하기로 한다. 맑은 눈과 바람을 읽는 귀로 얻어낸 것은 가치와 의미에 물들지 않은 생생한 순간이다. 지금 ‘순간’이라고 중얼거리는 순간과 순간 사이의 풍경이야말로 『파묻힌 얼굴』이 열망해마지 않는 이미지이다. 이미지는 그것이 감각되는 순간에 관념 concept화 되는 것이지만 결코 그 이미지는 원본 그대로 재생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관념은 태생적으로 언어를 수반하는 것이고 그 언어야말로 이미지를 집약시키는 것이 아니라 무한으로 분산 파생시키는 역할을 떠맡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들 ‘언어와의 싸움’이라고 시와 시인을 정의할 때 부딪치는 난관은 오정국 시인에게 있어서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한 마디로 『파묻힌 얼굴』에서의 언어의 역할은 의미의 전달이 아니라 이미지의 부각에 기울어져 있다. 시인은 무당도 아니고 심령술사도 아닐뿐더러, 접신 接神 이나 독심 讀心이 아닌 의미의 무화 無化를 꿈꾸면서 언어를 배반하는 것이다.
진정성을 담보한 시학
그렇다고 해서 시집 『파묻힌 얼굴』이 온통 전위적인 언어 실험에 기울어져 있다고 판단하는 것은 성급한 결론이다. 고봉준이 시집 해설에서 ‘매혹’이 글쓰기의 원천이라고 지적했던 것을 기억하자. ‘쓴다는 것은 언어를 매혹 아래 두는 것이다.’는 언명은 매혹적이다. 오정국의 시가 난해한 말놀이로 떨어지지 않는 까닭은 그가 시 쓰기의 중심에 서정 抒情이라는 튼튼한 신념을 세워놓았기 때문이다. 절벽의 꽃이라 부제가 붙은 시, 「그렇게 눈빛을 마주쳤으니」는 백척간두에 매달려 있으나 생명의 참 뜻을 결코 잃지 않은 가난하고, 소외되고 버림받은 존재들에 대한 따스한 시선을 보여주고 있다.
나무는 구름을 흘려보내고
굴뚝은 연기를 흘려보내고
모래는 모래를 흘려보내고
절벽의 꽃 타래들, 꽃숭어리 떨구듯
머리채를 흔들 때,
너의 이별은 완성되고
말을 하지 않아도 나는 알았네
차마 건네지 못한 네 말이
꽃숭어리로 떨어지던 것을
- 시 「그렇게 눈빛을 마주쳤으니」 4연
이 밖에도 적지 않은 시편에서 눈물 섞인 서정성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은 칸트가 미 美를 감흥 pleasure로 받아들이고 극히 개인적인 숭고함으로 인식할 때의 상황과 그리 멀지 않은 지점에 오정국의 시법이 놓여 있다는 증거이다. 『파묻힌 얼굴』이 시인의 세계나 존재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일으키기 위한 전조 前兆일지 아니면 서정의 인식을 강화하는 방법론에 그칠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파묻힌 얼굴』에 등장하는 해체의 경향이 결정적이지는 않다는 점이다. 이 글을 시작하면서 시 「너는 또 가시연꽃으로 피어나서」를 언급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이 언급은 필자의 성향에 따른 편협한 분석일 수도 있다- 다시 상기해 보면 시인에게 있어서의 시는 몽환적이고 자동기술적인 해체의 시가 아니라 언어의 가족유사성에 근거한 존재에 대한 눈물나는 분투의 결과물이 아니었던가.
거시적인 관점에서 인간의 역사를 변증법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일견 타당해 보인다 하더라도 한 시대의 정신이나 풍조가 바로 그 앞의 정신이나 풍조에 대한 반발에 그치는 경우를 종종 보아왔다. ‘서정’은 예술에 있어서 공공의 적이 될 수는 있으나 영원히 말살되고 도태되어야 할 공격의 대상은 아니다. 이 글의 모두에서 잠시 밝혔지만, 전위에의 욕구는 예술 창작자들의 공통된 욕구이다. 앞 서 가고, 미답의 경지를 개척하는 유혹 앞에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 창작자들이 앓고 있는 병인 것이다. 그러나 구상 具象을 뛰어넘는 추상 抽象이 있을 수 없듯이, 시에 있어서의 서정은 시인에게는 필요충분조건이다. 그래서 오규원이 그의 시 「용산에서」 ‘시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외쳤다고 해도, ‘왜냐하면 서정주의가 그 양태의 다양성과 더불어 다시 한국시의 존재공간에 광활한 구름을 드리우고 있는 참이다(「한국시는 언제고 파괴를 살게 되려나리라」, 정과리 『현대 한국시』 창간호 2008)’는 전망은 여전히 유효한 언명이 된다. 한 마디로 오정국의 시는 젊다. 시가 젊은 것이 아니라 낡아빠지고 쓸모를 다하거나 볼품없는 일상의 사실들에게 젊음의 피를 불러 일으키는 오정국의 정신이 젊다.
일찍이 오정국의 시를 읽었던 기억이 내게는 없다. 올 겨울이 길다 하여 동안거의 목록에 우연히 『파묻힌 얼굴』을 인터넷으로 구입했던 것이므로, 그가 나와 동시대인이며, 비슷한 시기에 등단을 한 시인이며, 이미 빛나는 몇 권의 시집을 간행한 바 있다는 동류의식은 『파묻힌 얼굴』을 감상하는데 어떠한 자장 磁場도 미치지 않았다. 오히려 습관이 주는 안온함에 묻혀가는 사람들에게 자기갱신의 실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시인의 투지에 두려움과 경외심을 품게 되었던 것이다. 자기갱신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자신을 자신으로 인식케하는 제도나 인식의 기득권을 과감하게 파기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자기갱신이라면 『파묻힌 얼굴』은 서정의 원심력의 가장 끝까지 언어를 밀어 올리는 시인의 노력이 눈부신 결과물이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서정의 원심력이 언어에 미치지 못할 때 파묻힌 얼굴은 무한천공의 별이 되거나 아니면 그 반대로 산산이 부서져내려 사막의 모래알이 될 것인데 그 양자택일은 오롯이 독자들의 몫이 될 것이다.
내 이렇게 깜깜하게 눈멀어, 아무래도 이 문장은
빛이 나에게 준 상처, 빛의 劍 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겠다
- 시 「금서」 마지막 부분
계간 시와 표현 2012년 봄호 출처 / 세상과 세상사이
'나호열 시인 > 詩 창작 강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높이의 詩學 / 조정권 (0) | 2012.03.30 |
---|---|
잘 표현된 불행 / 황현산 (0) | 2012.03.08 |
따뜻한 허무주의자의 노래 / 황정산 (0) | 2012.03.01 |
곁눈질을 멈추고 / 나호열 (0) | 2012.02.29 |
육화되지 않은 새로움은 뼈만 남은 생선에 얹히는 허공과도 같다 / 나호열 (0) | 2012.02.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