곁눈질을 멈추고
나호열
생각해 보건대, 이즈음의 세상은 너무 분노가 가득 차 있는 것 같다. 아니, 분노가 아니라 분노를 조장하는 말들이 넘쳐나고 있다는 것이 더 적확한 표현이겠다. 세 치 혀에서 나온 말들이 달리고 달려서, 유령처럼 소리 소문 없이 불질을 해대어서 가뜩이나 부조리한 일이 가득한 세상에 기름덩어리를 쏟아붓는듯하기도 하다. 소위 SNS라 불리는, 트위터와 같은 대중소통수단은 언로의 확장을 가져왔음은 틀림이 없으나 저속하고 품위를 잃은, 믿거나 말거나, 맞거나 틀리거나 아무런 구애를 받지 않는 익명의 말들이 화살처럼 쏟아져 내리는 것을 보면 두렵기조차 하다. 언론의 자유가 보장된 나라에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 말들이 부화뇌동을 염두에 두고 있거나 익명의 소문에 기대고 있다면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마이클 샌들의 『정의란 무엇인가』란 책이 오랫동안 베스트셀러 목록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 불과 얼마 전이다. 정의 正義의 정의 定義를 몰라서(알기 위해서) 그 책이 불티나게 팔려 나갔던가? 『정의란 무엇인가』의 원 제목은 『Justice』이다. ‘정의란 무엇인가’를 묻는 일과 ‘정의’ 그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이 차이는 의 義와 정의 正義를 엄밀히 구분하지 못하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한 마디로 정의는 의와는 다르다. 정의가 사회규범으로서, 법으로서 사회의 안정과 질서를 지시하는 유동적이고, 상대적인 서구적 개념이라면 의는 유교에서 수 천년 동안 부르짖어온 인간이라면 마땅히 행해야할 ‘인간다움’의 표징이다. 이 둘은 가끔 서로를 포섭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갈등과 모순관계에 직면할 때도 있다.
정의가 활착되어 있는 사회와 명목상의 정의가 가장되어 있는 사회는 마땅히 구분되어야 한다. 마이클 샌들은 이미 관습화된 정의가 과연 합리적인 사고인가를 되묻는 정당화의 질문을 던지는 것이라면, 우리가 지금 되물어야 할 것은 관습화된 정의가 우리에게 과연 존재하고 있으며 그 정의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얼만큼 그것을 수행할 의사를 가지고 있느냐이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도 이 글이 정말 나 자신의 진정성을 얼만큼이나 담보하고 있는지 확신하지 못한다. 내가 빈궁하다고 해서 그 모든 허물을 부자들에게 돌릴 수 있는 근거가 있는가? 탐욕을 부정하면서, 부자들의 사치를 비난하면서 왜 명품 시계와 가방에 열광하는가? 한미 FTA를 반대하면서 나는 왜 농촌으로 달려가 낫과 곡괭이를 들지 않는가? 한강물을 믿지 못하여 비싼 생수를 마시면서 왜 나는 팔당 호숫가의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오물을 마구 흘리면서 점잔을 떨고 있는가? 이 모순덩어리인 나 자신에 대해서 부끄러움을 느끼다 못해 ‘인간’ 그 자체에 대해 심각한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는 것이 솔직한 나의 일상이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말은 가슴이 먹먹해지는 아름다운 명제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아직도 그 명제가 당위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나에게도 뜻대로 되지 않은 인생의 분노가 있으며 분노의 말들이 고슴도치의 가시처럼 온몸에 돋아있기 때문이다. 시인으로서 할 말이 있다면 “나도 사람이(일반화된)꽃보다 아름답다”는 생각을 축복처럼 갖고 싶다는 열망이 있다는 것이다. 세상을 곁눈질하면서 요령껏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묵묵히 한 길을 걸어가고 싶은 것이다.
시인은 말을 다루는 사람이다. 예술의 속성이 그러하듯 기성 旣成을 뒤엎고 전인미답의 경지를 앞 서 가려고 열망하는 존재이기는 하지만, 그보다도 남이 쓰지 않는 말, 버려지고 잊혀진 말들을 따뜻하게 품어 분노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사람들에게 되돌려주는 일에 봉사해야 한다고 믿는다. 묵묵히 자기 길을 걸어갔던 사람들, 법정 스님, 김수환 추기경이 걸어갔던 신앙의 길이 아니더라도 히말라야 설산에 몸을 묻은 박영석 같은 사람들, 스무 두 살에 제 몸을 살랐던 전태일 같은 노동자들이 걸어갔던 패기에 찬 올곧은 길을 보여주고 동행하기를 권유하는 위안의 시를 써야 할 나이가 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계간 <<시와 산문>> 2012년 봄호 신작시 시작메모로 게제된 글
-출처 / 세상과 세상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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