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의 새로운 시 쓰기 5 / 이지엽
라.대지적 여성성,혹은 존재적 성찰
바다에 이르러
강은 이름을 잃어버린다
강과 바다 사이에서
흐름은 잠시 머뭇거린다.
그때 강은 슬프게도 아름다운
연한 초록빛 물이 된다.
물결 틈으로
잠시 모습을 비쳤다 사라지는
섭섭함 같은 빛깔.
적멸의 아름다움.
미지에 대한 두려움과
커다란 긍정 사이에서
서걱이는 갈숲에 떨어지는
가을 햇살처럼
강의 최후는
부드럽고 해맑고 침착하다.
두려워 말라, 흐름이여
너는 어머니 품에 돌아가리니
일곱 가지 슬픔의 어머니.
죽음을 매개로 한 조용한 轉身,
강은 바다의 일부가 되어
비로소 자기를 완성한다
- 허만하「낙동강 하구에서」전문
허만하의 「낙동강 하구에서」의 작품에는 존재의 없어짐 위에 존재하는 실존의 인식을 보여준다. 죽음의 자리에서 곧 태어나는 것,
그 자리는 '미지에 대한 두려움'과 '커다란 긍정 사이에' 놓여 있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그 태어남은 이전의 것과는 분명 다른 태어남이다. 죽어가는 것을 새로 태어나는 것들의 일부에 불과 할 뿐이다. 없어짐으로 그는 더 커다란 존재가 된다. 그것을 우리는 비로소 완성이라고 부를 수 있다. 없어지지 않고서는 존재하지 않으며 진정하게 완성될 수도 없다. 커다란 존재는 그것으로 족한가. 그렇지않다. 그것이 도달하는것은 '어머니의 품'이다. 대지적 여성성으로의 안김이다. 그의 시가 죽음과 존재의 문제를 즐겨 다루면서도 오히려 부드럽게 느껴지는 것은 그의 시 곳곳에 자리한 이 대지적 여성성의 상상력 때문이다. 이 대지적 여성성을 거론할 때 우리는 다음의 시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새들은 잠 깨어 어두운 나뭇가지에 앉아 있었다
그 중 한 마리가 비명을 내지르자
밤의 살이 젖어지고 비릿한 피가 새어 나왔다
여자의 몸이 활처럼 휘고
뜨겁게 젖은 뿌우연 살덩이가
여자의 숲 아래로 고개를 내밀었다
파도의 검푸른 옷자락이 여자를 덮어주었다
여자는 지금 마악 낳은 아기를 배 위로 끌어올렸다
땀 젖은 저고리를 열고 물컹한 달을
넣은 다음 고름을 묶고 젖을 물렸다
기슭아래 밤의 나무들이 그제야
푸르르 참았던 한숨을 내쉬었다
- 김혜순 「月出」후반부
하나의 생명체가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을 밀도 있게 그려냈다, 독특한 상상력을 따라가 보면 끈질긴 여성성이 모체가 되고 있다. 대지와 인간과 우주의 모든 것까지도 끌어안고 있다가 살을 찢어내는 고통 속에서 새 생명을 탄생시키는 女子,누가 이 거룩하고 숭고한 제의를 폄하할 수 있겠는가. 이 거대한 생명의 집은 시인의 상상력을 통하여서만 강렬하게 재구성 될 수 있는 것이다.
저 넓은 보리밭을 갈아엎어
해마다 든든한 보리를 기르고
산돼지 같은 남자와 시름하듯 사랑을 하여
알토란 아이를 낳아 젖을 물리는
탐스런 여자의 허리 속에 살아 있는 불
저울과 줄자의 눈금이 잴 수 있을까
참기름 비벼 맘껏 입 벌려 상추쌈을 먹는
야성의 핏줄 선명한
뱃가죽 속의 고향 노래를
젖가슴에 보얗게 솟아나는 젖샘을
어느 눈금으로 잴 수 있을까
몸은 원래 그 자체의 음악을 가지고 있지
식사 때마다 밥알을 세고 양상추의 무게를 달고
그리고 규격 줄자 앞에 한 줄로 줄을 서는
도시 여자들의 몸에는 없는
비옥한 밭이랑의
왕성한 산욕産慾과 사랑의 노래가
몸을 자신을 태우고 다니는 말로 전락시킨
상인의 술책 속에
짧은 수명의 유행 상품이 된 시대의 미인들이
둔부의 규격과 매끄러운 다리를 채찍질하며
뜻없이 시들어가는 이거리에
나는 한 마리 산되지를 방목하고 싶다
몸이 큰 천연 밀림이 되고 싶다
- 문정희 「몸이 큰 여자」전문
문정희의 시에서 우리는 '몸이 큰 여자'의 대지적 여성성을 만나게 된다. '뜻없이 시들어가는 이 거리에 / 나는 한 마리 산돼지를 방목하고 싶다 / 몸이 큰 천연 밀림이 되고 싶다'는 발언 안에는 시들고 늙어가는 시대를 다시 생명과 환희로 바꾸어 놓는 대지의 여성성이 숨쉬고 있다. 자질구레한 세상사가 아니라 사나운 '산돼지'라 할지라도 그것이 포악하고 탐욕스럽다 할지라도 '몸이 큰 천연 밀림'된다면 이를 넉넉히 품어줄 수 있지 않으랴. 남성들이 아무리 여성들에게 군림하려들더라도 그대들은 결국 거대한 밀림의 지극히 사소한 부분만을 망가뜨리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비옥한 밭이랑의 왕성한 산욕産慾과 사랑의 노래'를 지닌 여성, 건강한 어머니로서의 여성성은 ,식사때마다 밥알을 세고 양상추의 무게를 달고 그리고 규격 줄자 앞에 한 줄로 줄을 서는 도시 여자들, 이 아무리 다이어트 시대를 살아가더라도 잊지 말아야 할 덕목이다.그 것이 실은 이 땅을 지키게 한 힘이며 진정한 아름다움이다. 여성의 몸은 그리하여 미답의 신비와 스스로의 치유능력을 지닌 푸른 초원과 넓고 큰 밀림이다. 짓밟아도 뭉개지지 않는 원시적 생명력을 지닌 존재이다. 이 대지적 여성성은 젊은 시인들에 의하여 훨씬 강도 높고 다양한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음이 주목된다.
533쪽-542쪽 생략
오늘날의 한국 시인들은 과연 어느 쪽에 서야 하는가, 문명비판의 정신사적 몸부림이든, 솟구치는 생명력에의 경의나 생태환경에 대한 관심이든, 소시민의 건강한 일상성이든, 대지적 여성성 혹은 존재적 성찰이든, 반구조 혹은 탈중심주의에 도전하든 이는 온전히 시인 본인의 자유에 속하는 문제다. 다만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에 대해 고민을 하고 새로운 세계와 시에 대해 아픔을 느끼는 시인이라면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진지하게 던져보아야 할 시점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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