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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풍경 너머의 풍경

경주 먹장 덕산 유병조 선생

by 丹野 2011. 12. 25.

 

 

경주 먹장 덕산 유병조 선생

 

 

작은 아버지 일 도우며 첫발 디뎌
가난에도 좋은 먹 만들기 평생 바쳐… 자식들 수차례 설득 제조 명맥 이어
송연먹 개발… 전통먹 우수성 알려… 신미술 대전 등 여러차례 수상도
일본처럼 먹박물관 만드는게 소원


[세계일보] 2011.11.13 21:38

 

 

"천년의 흔적을 만든다는 자부심으로 좋은 먹을 만들기 위해 하루하루 공들여 살다 보니 한평생이 흘렀습니다." 전통 먹 제조에 인생을 건 경주 먹장(墨匠) 덕산 유병조(72) 선생은 먹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58년이 흘렀다며 유수와 같은 세월을 아쉬워했다. 그는 전통 먹 제조에 후회 없는 한평생을 바쳤다.

"먹으로 쓴 글을 태우면 종이만 없어질 뿐 먹은 재 속에서도 희미한 존재를 남깁니다. 인간은 백 년도 살기 힘든데, 천 년 세월을 견디는 먹을 보면 경이롭지요."

전통 먹을 만드는 일에 대한 유 선생의 자부심은 하늘을 찌른다.

일제강점기인 1940년 2월 일본 오사카에서 출생한 유 선생은 광복 이듬해인 1946년 3월 여섯 살 어린 나이로 부모와 함께 한국으로 돌아왔다.

경북 경주시 산내면에 정착한 유 선생은 어린 시절 먹고 입을 것도 없는 지독한 가난 속에서 성장했다. 열넷 살 되던 해, 울산에 사는 두 작은아버지를 도와 먹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것도 겨울철에만 가능했다. 아교를 비롯한 재료가 쉽게 변질되는 여름철에는 먹을 만들지 못하기에 이 기간에는 농사나 품팔이로 생계를 이어갔다.

유 선생은 먹 만드는 기술을 작은아버지로부터 습득한 뒤에도 경주 산내면 자신의 집에서 먹을 만들어 작은아버지에게 납품했다.

그는 1983년 비로소 '신라 조묵사'란 상호로 직접 만든 먹을 팔기 시작했다. 그러나 판로 개척이 어려워 생활고는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그래도 유 선생은 먹 만들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먹 제조의 일인자가 되기 위해 동트기 전에 일어나 밤 12시 전에는 잠자리에 들어본 적 없다. 좋은 먹 개발에 몰두한 그의 인생은 오롯이 먹 자체였다.





경주 먹장 유병조 선생이 먹이 잘 만들어졌는지 직접 눈으로 검사하고 있다.

좋은 먹을 생산하려면 우선 재료가 좋아야 한다. 소가죽으로 만든 아교와 그을음을 잘 배합해 먹을 만든다. 나무를 태워 모으는 그을음은 다 같지 않다.

"각종 나무로 그을음을 만들어 봤지만 소나무의 광솔만 한 게 없어요. 좋은 광솔을 구하기 위해서 경주에 있는 모든 산을 이 잡듯이 뒤지고 다녔습니다. 이렇게 구한 광솔을 태우면서 그을음을 채집한 뒤 아교와 여러 재료를 혼합해 먹을 만드는 것이죠."

혼합한 먹 재료를 성형한 뒤 40∼45일 건조한다. 공기가 통하지 않는 밀폐된 박스에 넣어 건조하는데, 이 작업이 먹의 품질을 좌우한다. 잘못 건조하면 굽거나 깨지는 등 상품 가치가 없어진다.





작업장에서 재료들을 형틀에 넣어 먹을 만들고 있다.

유 선생은 좋은 먹을 생산하기 위해 수없이 실패를 거듭한 끝에 자신만의 먹을 제조하는 데 성공해 '먹 제조 일인자' 위치에 올랐다.

그는 1997년 한국산업인력관리공단으로부터 '먹 만들기 기능전수자(1997-04호)'로 선정됐으며, 2005년 해인사팔만대장경 탁본용 먹물 스무 말을 제공하기도 했다.

팔만대장경이 오랜 세월 보존될 수 있었던 건 먹 때문이라는 게 그의 믿음이다. 나무에 먹물을 바르면 좀먹지 않아 훼손을 방지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는 2009년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35호로 지정돼 인증서를 받았다.

그는 "좋은 먹은 먹물이 맑고, 붓에 잘 묻고, 종이에 많이 번지지 않아야 한다. 또 소리가 맑고 은은한 향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좋은 먹을 갈면 한 차례 맑은 향기가 풍긴다. 이 때문에 먹을 감별할 때는 입에 대고 입김을 한 번 분 후에 재빨리 냄새를 맡는다. 경미한 사향 냄새가 풍기면 좋은 먹이다. 유 선생은 "좋은 먹은 무겁고 나쁜 먹은 가벼우며, 두드려 보면 좋은 먹은 맑은 소리가 나지만 나쁜 먹은 소리가 없다"고 말한다.





먹 생산에 필요한 재료를 혼합해 손수 먹을 만들고 있는 모습.

좋은 먹을 만들어 일본을 앞서기 위해 연구에 매진한 결과 그는 유리에 가는 먹 개발에도 성공했다.

먹을 주먹으로 쥐어서 만들었다 해서 이름 붙여진 '주먹 먹'은 유리판, 쟁반 등에 언제 어디서나 간단하게 갈아 쓸 수 있다. 동·서화나 탁본용으로 뛰어나 개발된 지 1년 만에 인기를 끌고 있다. 이 같은 먹 제조법은 특허 등록된 상태다.

유 선생의 대표적인 먹은 송연먹이다. 우리나라에 대대로 전해오는 먹으로 옛날 고서화에서 나타나는 연한 색상을 띠고 있어 먹 중에 으뜸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송연먹은 쓰다 남은 먹물이 벼루에 말라붙었다가도 갈면 처음처럼 다시 갈리는 게 특징이다.

현재 유 선생의 공방인 신라조묵사에서 제조되는 먹은 주먹먹과 송연먹 외에도 유연먹, 송향먹, 송선먹, 문향먹, 채색먹, 옥로향먹 등 다양하다.

먹을 팔아 생활하는 그의 생활은 어렵지만 마음은 푸근하다. 큰아들 성우(41)씨와 딸 정화(40)씨가 최근 전통 먹 전승자가 돼 공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아들과 딸은 "생활이 안 된다"며 수차례 먹 전통기술 전수를 그만두려 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자식들을 설득하기 위해 애썼다.

붓을 사용하는 동아시아에서 전통 먹 만들기는 고유의 문화유산으로 가치가 크며, 그 기능을 가진 사람이 적어 보존 전승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먹은 예로부터 서가의 문방사우(먹, 종이, 붓, 벼루) 중 으뜸이라 했다. 먹은 제 몸을 갈아 글씨나 그림 등 새로운 형상을 세상에 남긴다. 유 선생은 몸을 갈아 흔적을 남기는 먹처럼 자신의 인생을 갈아 먹을 만들고 있다.

우리나라에 언제부터 먹이 사용되었는지 기록은 없다. 다만 고대로부터 먹이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며, 신라시대부터 비로소 질 좋은 정품 먹이 생산됐다고 전해진다. 일본 쇼쇼인에는 신라먹이 소장돼 있으며, 일본 고대 역사서인 일본서기에는 고구려의 승려 담징이 일본에 먹 제조법을 가르쳤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사실로 비춰 볼 때 우리나라 전통 먹은 일본보다 역사가 앞선다. 그렇지만 우리 전통 먹은 위태롭게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현재 국내에서 먹을 생산하는 곳은 경주와 대전뿐이다.

지난해에는 우리 전통 먹의 우수성을 인정한 일본인으로부터 유 선생을 만나자는 연락이 왔으나 그는 단번에 거절했다. 일본인들이 자신의 노하우를 빼앗아 갈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언제나 일본보다 더 좋은 먹을 만들기 위해 힘썼다"는 그는 자신이 만든 먹을 일본에서 전시하고 싶다는 열망도 내비쳤다.

그는 지난 8월12일부터 10월10일까지 60일간 열린 2011 경주세계문화엑스포 기간 동안 신라먹을 전시했다.

유 선생은 또 '환영(幻影) 속의 환영, 그 안의 정(靜)'이란 제목으로 지난 6월14일부터 19일까지 경주 라우갤러리에서 전통 먹 전시전을 개최하는 등 바쁜 한 해를 보내고 있다. 전시에는 주먹먹, 송연먹, 유연먹 등 6∼7종류가 소개됐다.

그는 그동안 전통 먹 생산에 기여한 공로로 상도 수차례 받았다. 전국 전통 공예품 경진대회에서 6차례 수상한 것을 비롯해 경북 공예품 경진대회, 관광기념품 경진대회, 대한민국 전통 미술대전, 신미술대전, 신미술 창작전 등에서 여러 차례 상을 수상했다.

그는 "대구·경북지역의 서예가들만이라도 전통기술 계승과 발전을 위해 값싼 중국산 먹이나 고가의 일본산 먹을 사용하지 말고 우리나라 전통 먹장들이 생산한 국내산 먹을 사용해 줬으면 좋겠다"며 "죽기 전에 일본처럼 먹 박물관을 건립하는 게 소원"이라고 말했다.

경주=장영태 기자 3678jyt@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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